철의 침묵

제0부 · 프리퀄

칼 오르벡 · 본편 이전

선택은 이 기기에 기억됩니다.

← 본편 목차(제1부)로

제0부 1장

반품

현관 등 · 아홉 살에서 열한 살까지

아래로 ↓

I · 손톱

부두 셋방의 밤은 하역기 쇠사슬 소리로 시작해서 그 소리로 끝났다. 아버지는 해가 지면 부두로 나가 밤새 하역기의 쇠사슬에 짐 고리를 걸었고, 쇠사슬이 한 번 감길 때마다 셋방의 창틀이 낮게 떨렸다. 어머니는 낮에 부두 세탁장에서 남의 작업복을 빨았고, 저녁에는 같은 손으로 아들의 손을 씻겼다. 집에 있는 사람은 늘 둘이었고, 셋이 한자리에 앉는 것은 아침 한 끼뿐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나무 대야에 데운 물을 붓고 잿물 비누를 꺼냈다. 세탁장에서 쓰다 남은 조각들을 뭉쳐 만든 비누라 모서리마다 색이 달랐고, 물에 닿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칼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내밀었다. 아홉 살 아이의 손치고는 컸고, 손톱 밑은 부두 바닥의 기름과 녹으로 까맸다.

어머니“손가락 펴. 오므리면 안 빠진다.”

칼“어제도 했잖아.”

어머니“어제 한 건 어제 묻은 거고, 오늘 묻은 건 오늘 빼야지.” 어머니는 칼의 오른손 검지를 붙잡고 엄지손톱으로 손톱 밑을 긁어낸 다음, 비누를 묻힌 솔로 같은 자리를 문질렀다. 솔은 돼지털이 반쯤 빠져 있어서 닿는 데마다 따가웠다.

칼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손을 놓지 않고 더 천천히 문질렀는데, 천천히 하는 쪽이 더 오래 아프다는 것을 그는 일곱 살 무렵에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창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를 하나씩 셌다.

칼“엄마, 방금 감긴 거 들었어? 숨 네 번에 한 번이야. 아빠가 그 사이에 고리를 거는 거지?”

어머니“누가 그러던.”

칼“내가 셌어. 창틀이 떨리면 감긴 거고, 안 떨리면 풀린 거야.”

어머니“쓸데없는 걸 잘도 센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을 멈추고 창 쪽을 한 번 보았다. 쇠사슬이 감겼고, 창틀이 떨렸고, 어머니는 다시 솔을 움직였다.

어머니“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어머니가 왼손으로 넘어가며 말했다. “아침 먹고 회사 훈련소에 간다. 거기서 자고, 거기서 먹고, 거기서 일을 배운다.”

칼“언제까지?”

어머니“오래. 종이에 적혀 있으니까 가서 보면 된다.”

칼“아빠도 알아?”

어머니“둘이 정했다. 아빠는 내일 아침 교대가 늦어서 너 가는 건 못 본다.”

칼“그럼 아빠한테는 뭐라고 해?”

어머니“아무 말 안 해도 된다. 그 사람은 말 안 해도 안다.”

칼“왜 가야 하는데?”

어머니“밥이 나오니까.”

칼“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칼은 대야 밖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손이 먼저 손목을 잡았다.

어머니는 대답하는 대신 솔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문질렀다. 세탁장에서 하루 종일 남의 옷을 비빈 손바닥은 솔보다 거칠었고, 그 손이 손톱 밑을 한 번 지날 때마다 대야의 물이 조금씩 흐려졌다. 물은 처음에 뜨거웠다가 미지근해졌고, 나중에는 손등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식었다. 어머니는 물이 다 식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됐다. 등잔 밑에 대 봐라.” 칼이 열 손가락을 펴서 불빛에 비추자 손톱 밑이 하얬다. 어머니는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칼“아빠 손톱은 왜 안 빼 줘?”

어머니“아빠 건 안 빠진다. 너무 오래 묻어서 손톱 밑이 아니라 살에 들었어.”

칼“나도 그렇게 돼?”

어머니“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빼는 거다.”

칼“내일 또 까매질 텐데.”

어머니“그럼 거기 사람이 빼 주겠지.”

칼“안 빼 주면?”

어머니“그럼 네가 빼라. 엄지손톱 끝으로 밀어내고, 비누 묻혀 비비고, 물이 식을 때까지 놓지 말고.” 어머니는 대야를 들고 일어나 문밖 하수구에 물을 버렸다. 문이 열린 사이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등잔 불꽃을 한쪽으로 눕혔고, 쇠사슬 소리가 방 안에서보다 크게 들렸다. 어머니는 문을 닫고 나서 한동안 문고리를 쥔 채 서 있었다.

칼“거기서도 쇠사슬 소리 들려?” 칼이 이불 속에서 물었다.

어머니“바람이 바다 쪽에서 부는 날은 들린다. 그런 날 세라.” 어머니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등잔 쪽으로 돌아왔다.

칼“바람이 안 부는 날은?”

어머니“그런 날은 세지 말고 그냥 자. 안 들려도 아빠는 걸고 있다.”

칼은 손톱을 혀끝으로 만져 보았고, 비누의 쓴맛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다시 쇠사슬 소리를 세기 시작했다. 소리 하나를 셀 때마다 아버지의 손을 하나 세는 셈이었고, 그 손은 숨 네 번의 틈마다 어김없이 다음 고리를 걸었다. 백을 넘게 세었을 때 어머니가 등잔을 껐고, 이백이 되기 전에 그는 잠들었다.

II · 기름 학교

회사 훈련소는 부두 북쪽 끝, 창고 셋을 함석 담으로 이어 붙인 자리에 있었다. 정식 이름은 정문 위 함석판에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기름 학교라고 불렀다. 들어올 때 손이 하얗던 아이도 일주일이면 손톱 밑이 까매진다는 뜻이었고, 그 말을 처음 지은 아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문 옆 창구에서 장부 담당이 칼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머리가 반쯤 빠진 사내였는데, 펜촉을 잉크병에 담글 때마다 혀를 찼다. 그는 어머니가 불러 주는 대로 장부에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아홉이라는 숫자를 붙인 다음, 창구 밖으로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장부 담당“어머니 되시오? 여기 엄지.”

어머니가 엄지에 인주를 묻히는 동안 종이는 창구 턱에 놓여 있었고, 그 높이가 마침 칼의 눈높이였다. 글자를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숫자는 읽을 수 있었다. 맨 위에 십 년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줄에 밥과 잠자리와 작업복이라는 낱말이 나란히 있었다.

칼“이게 뭐야?”

어머니“밥이 나오는 종이다.” 어머니는 엄지를 종이에 누르고 나서 앞치마에 닦았다. 붉은 물은 앞치마에 옮지 않고 엄지의 주름 사이에 남았다.

칼“십 년이면 몇 밤이야?”

장부 담당“세지 마라. 세면 길어진다.” 장부 담당이 종이를 거두어 서랍에 넣었다. “여기 들어오는 놈들은 첫날 다 그걸 묻는다. 대답해 준 적은 없는데, 물어본 놈들은 다 아직 여기 있다.”

어머니는 정문 앞에서 칼의 옷깃을 한 번 바로잡아 주고 돌아섰다. 어머니는 부두 쪽 골목 모퉁이를 돌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칼은 모퉁이가 빈 뒤에도 한참 그쪽을 보았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서 그 모퉁이 너머의 쇠사슬 소리가 여기까지 희미하게 왔다.

마당은 넓었고, 바닥에 깔린 쇠판 사이마다 배수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기둥에는 사람 모양의 기계 하나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키는 어른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얼굴판은 여기저기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가슴판의 칠은 다 벗겨져 녹이 꽃처럼 번져 있었다. 눈 자리에는 둥근 유리가 둘 있었는데, 왼쪽 유리에는 금이 가 있었다.

아이“멍텅구리야.” 옆에 선 아이가 말했다. 칼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고, 코 밑이 늘 젖어 있어서 소매로 훔칠 때마다 소매 끝이 반들거렸다. “말 걸어도 못 알아들어. 때려도 안 피해.”

칼“그럼 왜 묶어 놨어?”

아이“도망갈까 봐.”

칼“못 알아듣는다며. 그럼 도망가라는 말도 못 알아듣잖아.”

아이“몰라. 교관이 묶었어.” 아이는 코를 훔치고 자기 이름 대신 별명을 댔다. 다들 자기를 콧물이라고 부른다고 했고, 칼보다 한 해 먼저 들어왔는데 한 해 동안 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은 없었다.

칼“가슴판에는 뭐라고 적혀 있어? 기계는 다 번호가 있다던데.”

콧물“교관이 긁어서 지웠어. 연습용은 번호 없어도 된대. 번호가 없으면 아무도 안 찾으러 온대.”

칼은 기계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금이 가지 않은 쪽 유리 안쪽에 아주 희미한 불이 남아 있었다. 꺼진 줄 알았던 등잔 심지에 남은 불씨만 한 빛이었고, 칼이 옆으로 한 걸음 옮기자 그 빛이 조금 늦게 따라왔다.

교관“거기, 새로 온 놈.” 마당 끝에서 교관이 불렀다. 키가 크고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굵은 쇠반지를 낀 사내였으며, 목소리가 마당의 쇠판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그건 구경하라고 세워 둔 게 아니다. 너희는 내일부터 그걸로 배운다.”

칼“뭘 배워요?”

교관“기계를 여는 법. 그 전에 기계를 세우는 법.” 교관은 다가와서 칼의 손을 뒤집어 손톱을 보았다. “깨끗하군. 오늘까지다.”

칼“저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교관“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두에서 쓰다가 눈이 나가서 이리 왔다.”

칼“한쪽 눈은 살아 있던데요.”

교관“그건 불빛이지 눈이 아니다. 불빛이 남았다고 보는 건 아니야. 그 둘을 구별하는 것도 내일부터 배운다.”

콧물“너 몇 년짜리야?” 그날 밤 이층 침대의 아래 칸에서 콧물이 물었다.

칼“십 년.”

콧물“나도. 여기는 다 십 년짜리야, 장부 아저씨가 세지 말라고 했지? 나는 그래도 셌는데 삼천육백 밤이 넘더라. 그다음부터는 까먹었어.”

칼“멍텅구리 눈에 불 있던데.”

콧물“없어, 다 꺼졌어. 교관이 그건 꺼진 기계라고 했어.”

칼“있었어. 내가 옆으로 가니까 따라왔어.”

콧물“거짓말.” 콧물은 그렇게 말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느 쪽 눈?”

칼“안 깨진 쪽.”

콧물은 더 묻지 않았다. 칼은 위 칸에 누워 쇠사슬 소리를 기다렸다. 하역기는 담 너머 멀리 있어서 소리가 셋방에서보다 작았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 때만 겨우 들렸다. 그는 어머니가 말한 대로 들릴 때만 셌다. 숫자는 셋방에서보다 훨씬 느리게 올라갔고, 서른을 넘기지 못한 채 그는 잠들었다. 아래 칸에서 콧물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쇠사슬 소리 사이사이를 메웠다.

III · 닫힌 문

처음으로 담을 넘은 것은 들어온 지 마흔하루째 되는 밤이었다. 칼은 날짜를 세지 않으려고 했지만, 손톱 밑이 다시 까매진 날부터 날짜가 저절로 세어졌다. 숙소 뒤편 창고 담은 녹슨 함석을 덧대어 놓아서 발을 디딜 데가 많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 끈으로 묶어 목에 걸고 맨발로 담을 넘었다.

부두까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낮에는 짐수레와 사람 때문에 길이 길었는데, 밤에는 하역기 불빛만 따라가면 되었다. 쇠사슬 소리는 걸을수록 커졌고, 셋방 골목에 들어섰을 때는 셋방 창틀을 흔들던 그 크기가 되어 있었다. 칼은 그 크기를 귀보다 먼저 발바닥으로 알아들었다.

셋방 문은 잠겨 있었고, 칼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문 앞까지 와서 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등잔 불빛이 그 사람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칼“엄마. 나야.”

어머니“알아.” 문 너머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는 문판 하나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왔고, 조금 쉬어 있었다. “신발은 신었니.”

칼“목에 걸었어. 담 넘을 때 소리 나서.”

어머니“신어라. 바닥이 차다.”

칼은 계단에 앉아 신발을 신었고, 끈을 다 묶을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문판에 이마를 대고 섰다. 문판 너머에서 어머니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그는 숨소리의 높이로 알았다.

칼“열어 줘.”

어머니“돌아가.”

칼“거기 싫어. 애들이 밤마다 울고 밥에서는 쇠 냄새가 나. 열어 줘.”

어머니“돌아가라, 칼. 거기가 너 밥 먹는 데다. 여기서 문 열면 내일부터 너 먹을 데가 없어.”

문고리가 한 번 달그락거렸다. 여는 소리가 아니라 안쪽에서 고리를 한 번 더 거는 소리였고, 칼은 그 소리를 알았다. 바람 부는 밤마다 어머니가 잠들기 전에 문고리를 두 번씩 확인하던 소리였다.

칼은 세 번째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문 앞 계단에 앉아 등을 문판에 붙였다. 문판은 차가웠지만 등을 대고 있으니 조금씩 덜 차가워졌다. 얼마 뒤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문판에 기대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문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앉은 셈이었다.

그 밤 칼은 쇠사슬 소리를 세지 않았다. 대신 문 안쪽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소리는 밤새 한 번도 문에서 멀어지지 않았는데, 잠든 숨은 아니었다. 잠든 사람은 그렇게 오래 같은 자리에 같은 무게로 기대어 있지 않는다. 바닷바람이 골목으로 몰려 들어올 때마다 칼은 무릎을 끌어안았고, 문 안쪽의 숨도 그때마다 한 번씩 멎었다가 이어졌다.

새벽에 쇠사슬 소리가 멎었고, 교대 시간에 맞추어 골목 끝에서 아버지가 걸어왔다. 아버지는 밤새 쇠사슬을 건 사람답게 오른쪽 어깨를 낮게 기울이고 걸었으며, 계단에 앉은 아들을 보고도 걸음의 박자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아들 앞에 서서 한참 내려다보다가 작업 장갑을 벗어 칼의 손에 끼워 주었다. 장갑 안쪽은 아직 따뜻했고 쇠사슬 기름 냄새가 났다.

칼“엄마가 안 열어 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닫힌 문을 한 번 보았을 뿐 두드리지는 않았다. 그는 칼의 장갑 낀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등 뒤의 문판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어머니“칼. 손톱.”

칼“알아.” 칼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대답이 문판까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칼은 버티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은 쇠사슬을 감는 손이었고, 한 번 감긴 쇠사슬은 짐이 땅에 닿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두에서 자란 아이라면 다 알았다.

훈련소 정문 창구에서 장부 담당이 하품을 하며 장부를 펼쳤다. 아버지는 칼의 등을 정문 안쪽으로 한 번 밀었고, 그것이 그날 그가 아들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장부 담당이 보호자 칸에 엄지를 찍으라고 하자 아버지는 인주에 엄지를 눌렀는데, 쇠사슬 기름이 밴 엄지에는 붉은 물이 잘 묻지 않아서 두 번을 눌러야 했다. 장부 담당은 칼의 이름 옆에 무엇인가를 적고 펜으로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칼“뭐라고 적었어요?”

장부 담당“반품.” 장부 담당이 펜을 잉크병에 꽂으며 말했다. “보낸 데서 도로 보내면 반품이지. 이 장부에 그거 말고 적는 말은 없다.”

칼“나 물건 아닌데요.”

장부 담당“장부에 적히면 다 물건이다. 나도 회사 장부에는 물건이야.” 장부 담당은 장부를 덮고 턱을 들어 정문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라. 아침 점호까지 늦으면 그건 또 따로 적어야 한다.”

점심 무렵에는 숙소 아이들이 다 그 낱말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칼이 지나가면 반품이라고 불렀고, 칼이 돌아보지 않자 더 크게 불렀다.

아이“야, 반품, 집에서 안 받아 줬다며? 물건이 맞지 않아서 돌아온 거래.”

콧물“나도 첫해에 나갔었어.” 그날 밤 아래 칸에서 콧물이 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채 말했다. “우리 엄마는 열어 줬어. 국 먹이고, 아침에 업어서 데려다줬어. 나도 장부에는 반품이야. 근데 애들은 나를 콧물이라고만 불러.”

칼“왜?”

콧물“반품보다 콧물이 먼저 붙었으니까.”

칼은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의 장갑을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장갑 손가락 끝에서는 그 뒤로도 며칠 동안 쇠사슬 기름 냄새가 났다. 장갑은 그 뒤로 오래 그 자리에 있었고, 별명은 그보다 더 오래 남았다.

IV · 멍텅구리

두 번째로 나간 것은 열 살 가을이었고, 이번에는 셋방 골목까지 가지 않았다. 그는 부두 끝 계류 기둥에 앉아 하역기가 짐을 내리는 것을 밤새 보았고, 어느 쇠사슬이 아버지의 것인지 끝내 가려내지 못한 채 아침 점호 전에 제 발로 정문을 넘었다. 장부 담당은 이번에는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지만, 아이들은 그것까지 반품이라고 불렀다.

그 겨울 마당의 쇠판에는 아침마다 서리가 앉았다. 맨손으로 쇠를 잡으면 살갗이 들러붙었다가 떨어질 때 따끔했다. 그런 아침에 교관은 아이들을 멍텅구리 앞에 줄 세우고 한 사람에 하나씩 망치를 쥐여 주었다. 망치 자루는 아이들 팔에 비해 길었고, 머리는 아이들 주먹만 했다.

교관“눈부터 깬다.” 교관이 멍텅구리의 얼굴판을 손가락 마디로 두드렸다. “정비하다 보면 멈추지 않는 기체를 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눈이 살아 있으면 손이 떨린다. 너희 손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희 손을 보는 눈 때문에 떨린다. 그러니 눈부터 끄는 법을 손에 익혀라. 유리 테두리 바깥, 이 이음매다. 정확히 치면 한 번에 꺼진다.”

아이“저거 진짜 안 피해요?” 앞줄의 아이가 물었다.

교관“안 피한다.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선 채로 맞는다. 피하는 기계는 정비공이 못 쓴다.”

칼“깬 눈은 누가 다시 붙여요?”

교관“정비공이 붙인다. 깨는 것도 정비공이 하고 붙이는 것도 정비공이 한다. 둘 중 하나만 할 줄 아는 놈은 정비공이 아니다.” 교관은 칼을 한 번 보고 줄 맨 앞의 아이에게 턱짓을 했다.

아이들이 차례로 망치를 휘둘렀다. 대부분은 이음매를 맞히지 못하고 얼굴판의 넓은 데를 때렸다. 망치가 닿을 때마다 마당 전체가 둔하게 울렸고, 멍텅구리의 고개가 맞은 쪽으로 조금 돌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움직임이 우스꽝스러워서 처음에는 몇 아이가 웃었고, 나중에는 다 웃었다. 교관은 웃지 않고 이음매를 맞혔는지만 보았다.

아이“멍텅구리 고개 춤춘다!” 줄 뒤쪽에서 누가 소리쳤고, 웃음이 한 번 더 커졌다.

콧물의 차례가 왔다. 콧물은 망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다가 어깨 높이에서 멈추었다. 팔이 떨려서 망치 머리가 그의 머리 위에서 원을 그렸고, 줄 뒤쪽에서 반품 다음으로 쓸 별명을 찾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교관“내리쳐라. 들고 있으면 더 무겁다.”

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콧물을 보지 않고 멍텅구리를 보고 있었다. 맞을 때마다 맞은 쪽으로 밀리던 고개가 이번에는 맞기 전에 움직였다. 아주 조금, 금 간 유리가 있는 쪽 얼굴이 망치를 든 콧물 쪽으로 돌아갔다. 피하려는 움직임이라면 반대쪽으로 돌아야 맞았다. 그 고개는 망치가 아니라 망치를 든 아이의 떨리는 팔꿈치를 향해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자기 하나뿐이라는 것을 칼은 웃음소리로 알았다. 그다음에 한 일은 생각보다 손이 먼저 했다. 그는 자기 망치를 쥔 팔을 옆으로 크게 돌려 멍텅구리가 아니라 마당 가장자리의 배수 쇠창살을 향해 던졌다. 망치는 쇠판 위를 한 번 튀고 쇠창살 모서리에 부딪혔고,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웃음소리를 한꺼번에 끊었다.

교관“누가 던지라고 했나.” 교관이 줄 사이로 걸어왔다.

칼“쟤가 콧물 쪽을 봤어요.”

교관“기계는 아무 데도 안 본다. 눈이 달린 쪽이 앞일 뿐이다.”

칼“봤어요. 맞기 전에 돌렸어요.”

교관은 규정대로 했다. 연장을 던진 견습생에게는 뺨 한 대와 밤 벌이 정해져 있었다. 교관의 왼손이 칼의 뺨을 쳤고, 가운뎃손가락의 쇠반지가 왼쪽 눈썹 끝을 긁고 지나갔다. 따뜻한 것이 눈꺼풀로 흘러내렸다. 교관은 그것을 보고 손을 거두었는데, 거둔 손을 잠깐 내려다보는 얼굴에 다시 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교관“눈썹은 붙는다. 의무실 가서 소독하고, 해 지면 저 쇠창살 위에 꿇어앉아라. 해 뜰 때까지.” 교관은 쇠창살 앞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 콧물에게 내밀었다. “너는 다시. 이음매다.”

콧물은 그날 이음매를 맞히지 못했다. 그 뒤로도 맞힌 아이는 없었고, 해가 질 무렵 멍텅구리의 얼굴판은 아침보다 훨씬 깊게 우그러져 있었다. 멍텅구리는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칼은 눈썹에 거즈를 붙인 채 남은 오후 내내 그 고개를 지켜보았지만, 맞기 전에 고개가 돌아가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지자 교관이 쇠창살 앞까지 와서 칼이 무릎을 꿇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칼의 거즈와 마당 한가운데의 기둥을 번갈아 보았다.

교관“어느 쪽으로 돌렸다고 했나.”

칼“콧물 쪽이요. 망치 말고 팔꿈치 쪽이요.”

교관“다음부터는 던지지 말고 말로 해라. 말로 하면 나도 본다.” 교관은 그렇게 말하고 멍텅구리 앞으로 가서 한동안 그 얼굴판 앞에 서 있다가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밤은 길었다. 배수 쇠창살은 서리를 먹어 무릎 밑에서 하얗게 빛났고, 바지를 뚫고 올라오는 냉기는 한 시간쯤 지나자 아픔이 아니라 무게가 되었다. 자정이 넘어 숙소 창문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렸다.

콧물“반품.” 콧물이 창틈에 입을 대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너 왜 던졌어?”

칼“쟤가 너 봤어.”

콧물“멍텅구리가 나를 봤다고? 왜?”

칼“몰라. 모르는데 봤으니까 던졌어.”

콧물“내가 그거 맞혔으면 어떡하려고.” 콧물은 한참 말이 없다가 창틈으로 담요 한 장을 밀어 내렸다. 담요는 쇠창살까지 닿지 않고 창 밑 서리 위에 떨어졌고, 칼은 무릎을 떼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집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칼은 무릎을 옮겨 딛다가 쇠창살 한쪽이 덜컥거린다는 것을 알았다. 망치가 부딪힌 모서리의 볼트 하나에 금이 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볼트를 한참 만지다가 손을 떼었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멍텅구리의 성한 눈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그 눈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는 너무 어두워서 알 수 없었다.

V · 배수로

열한 살 여름 장마는 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다. 마당의 배수 쇠창살은 사흘째부터 물을 다 삼키지 못하고 거품을 토했고, 숙소 바닥에는 밤마다 물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빠졌다. 칼은 그 아흐레 동안 금 간 볼트를 매일 밤 손가락으로 조금씩 돌렸다. 장마 마지막 밤에 볼트가 빠졌다.

쇠창살 한쪽을 들어 올리자 아래에서 물소리가 올라왔다. 칼은 신발을 목에 걸고 쇠창살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고, 벽에 박힌 사다리가 손에 잡혔다. 그 사다리가 부두 쪽 큰 배수로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 년 동안 아이들의 소문으로 들어 둔 것이었다. 바닥에 닿으면 물을 따라 바다 쪽으로 걷기만 하면 되고, 부두에 닿으면 셋방 골목까지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사다리는 열두 칸이었고, 칼은 칸을 세며 내려갔다. 일곱째 칸에서 물이 발목에 닿았고, 여덟째 칸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머리와 어깨를 눌렀고, 곰팡이와 바닷물 냄새가 입안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홉째 칸을 디디려는데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왼쪽 무릎이 사다리 쇠 칸 모서리에 정통으로 찍혔다.

소리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소리가 모든 소리를 먹었다. 칼은 바닥의 물속에 주저앉았고, 물은 금세 가슴까지 차올랐다. 일어서려고 왼쪽 다리에 힘을 주자 무릎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고, 다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물은 계속 올라왔는데 손으로 쥔 무릎만 뜨거웠다.

물속 저편에서 불빛 두 개가 다가왔다. 사람의 등불은 흔들리는데 그 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물을 가르며 오는 소리도 사람의 걸음보다 무겁고 일정했다. 칼은 부두에서 그런 걸음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밤에 배수로를 걸으며 막힌 데를 치우는 기계들이었고, 부두 사람들은 그것들을 배수 깡통이라고 불렀다.

기계는 칼 앞에서 멈추더니 물속에 무릎을 꿇었다. 물이 기계의 가슴판까지 올라왔고, 칼은 그것이 일부러 낮아지는 동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계는 한 팔로 칼의 등과 무릎 밑을 받쳐 물 밖으로 들어 올렸다. 쇠로 된 팔은 차가웠다. 사람의 팔이 차가운 것과는 다른 차가움이었고, 아무리 오래 닿아 있어도 칼의 체온이 그쪽으로 옮아가지 않았다.

철인“움직이지 마십시오. 물 밖으로 옮깁니다.”

칼“집에.” 칼은 이가 딱딱 부딪쳐서 말을 한 번에 다 하지 못했다. “부두 셋방에 데려다줘. 골목 끝에서 둘째 집이야.”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걸었다. 칼은 그 말을 들어 준다는 뜻으로 들었다. 기계의 팔에 안겨 있으니 물소리가 멀어졌고, 그는 무릎을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을 풀었다.

칼“너 누구야.”

철인“배수 이 구역 담당입니다.”

칼“이름은 없어?”

철인“번호가 있습니다.”

칼“몇 번인데.”

철인“가슴판에 있습니다. 물 밖에서는 보입니다.”

칼“이쪽이 바다 쪽 맞아? 쇠사슬 소리가 안 들려.”

철인“물 밖으로 가는 중입니다.”

칼“너 팔 차가워.”

철인“온도를 유지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물 밖까지 이백십 보 남았습니다.”

칼“그럼 내가 셀게.” 칼은 쇠사슬 소리 대신 기계의 걸음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걸음은 쇠사슬보다 박자가 빨랐고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배수로는 몇 번 갈라졌고 기계는 갈라질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한쪽을 골랐다. 칼은 그 대답이 자기 질문에 맞는 대답인지 따지기에는 너무 추웠다. 그는 쇠로 된 가슴판에 뺨을 붙이고 걸음을 세면서도 쇠사슬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갈림목에서 위쪽 관이 한꺼번에 물을 쏟았고, 그 소리에 셈이 끊겼다. 백삼십 몇까지 왔는지 떠오르지 않아 칼이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에 기계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철인“백사십일입니다.” 칼은 백사십이부터 다시 셌고, 그 뒤로는 숫자를 놓치지 않았다.

이백십 보째에 기계는 다른 사다리를 올라 쇠 덮개를 밀어 올렸다. 빗줄기가 다시 얼굴을 때렸고, 칼은 눈을 떠서 둘레를 보았다. 쇠사슬 소리는 없었다. 대신 낯익은 함석 담과 그 담에 박힌 정문, 그리고 정문 위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보였다. 등불은 비에 젖어 노랗게 번져 있었고, 기계는 그 등불 아래까지 걸어가 칼을 정문 계단에 내려놓았다.

등불 밑에서 칼은 기계의 가슴판을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판의 앞쪽 절반은 진흙과 녹에 덮여 있었고, 오른쪽 끝에 찍힌 숫자 넷만 빗물에 씻겨 드러나 있었다. 칠, 영, 구, 삼. 칼은 그것을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읽었다.

칼“왜 여기야.”

철인“당신을 받을 수 있는 등록자가 이곳뿐입니다.”

칼“엄마는.”

철인“그 이름은 목록에 없습니다.”

칼“확인한다고 했잖아. 집에 간다고.”

철인“확인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주소입니다.” 기계는 일어서서 정문의 종 줄을 한 번 당겼다. 종소리가 빗소리 위로 울렸다. “인계합니다.”

정문 안쪽 문지기 방에 불이 켜지고 발소리가 났다. 기계는 그 발소리가 문 가까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칼은 일어나 기계를 붙잡으려 했지만 왼쪽 무릎이 다시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계단에 앉은 채 두 손으로 무릎을 쥐었다. 기계는 빗속을 걸어 쇠 덮개 쪽으로 돌아갔으며, 덮개가 닫히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문지기“또 너냐.” 문지기가 우산도 없이 나와 칼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은 왜 그래.”

칼“사다리.”

문지기“깡통이 건져 왔구나. 너희 학교 애들은 꼭 이리로 데려온다.” 문지기는 칼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칼“장부에는 뭐라고 적어요?”

문지기“그건 내일 장부 담당이 정할 일이고 오늘은 의무실이다. 무릎 펴지 말고 내 어깨에 걸쳐라.”

칼은 고개를 들지 않고 정문 등불이 젖은 무릎 위에 만든 노란 동그라미를 보았다. 등불은 밤새 거기 켜져 있었을 것이다. 두드리지 않아도 누군가 나와 보는 문이었다. 그가 두드리고 싶었던 문은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고, 그 문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첫 번째 숫자

VI · 못

의무실에서 보낸 사흘 동안 칼은 그 네 자리를 입속으로 굴렸다. 간호인이 무릎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을 때도, 묽은 보리죽을 떠먹일 때도 그는 숫자를 놓지 않았다. 잠이 들면 숫자가 빠져나갈 것 같아서 밤에는 손가락으로 이불 위에 한 자씩 썼다. 쓰고 나면 이불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썼다.

간호인“뭘 그렇게 중얼거리니.” 붕대를 갈던 간호인이 물었다. 손이 차가운 늙은 여자였고, 소독약 냄새가 손등까지 배어 있었다.

칼“아무것도 아니에요.”

간호인“아무것도 아닌 걸 사흘이나 중얼거리면 그게 제일 큰 거다.” 간호인은 붕대 끝을 매듭짓고 무릎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깡통이 건졌다며. 정문에 내려놨다고 들었다.”

칼“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요.”

간호인“그래도 제대로 내려놓은 거다. 바다에 내려놨으면 어쩔 뻔했니.” 간호인은 소독약 병을 들고 일어나며 덧붙였다. “이 무릎은 다 붙어도 비 오는 날마다 너한테 말을 걸 거다. 대답은 안 해도 된다.”

칼“무릎이 뭐라고 하는데요?”

간호인“그날 밤 일을 잊지 말라고 하지. 잊고 싶어도 비만 오면 다시 일러 준다.”

사흘째 오후에는 장부 담당이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의무실까지 왔다. 그는 침대 발치에 서서 펜촉에 침을 묻혔고, 칼의 무릎과 장부를 번갈아 보았다.

장부 담당“이번 건 뭐라고 적어야 하냐. 집에서 보낸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온 것도 아니고.”

칼“인계라고 적어요. 깡통이 그렇게 말했어요.”

장부 담당“그런 말은 이 장부에 없다.” 장부 담당은 한참 펜을 들고 있다가 칼의 이름 옆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반품 하나에 자진 복귀 하나, 이번 건 건져짐이다. 이름 옆에 세 줄 붙은 놈은 여기서 네가 처음이야.”

숙소로 돌아온 첫날 밤, 칼은 베개 밑에서 못 하나를 꺼냈다. 담을 처음 넘던 해에 함석 담에서 빠진 것을 주워 둔 못이었고, 아버지의 장갑 손가락 하나에 끼워 두어서 녹이 덜 슬어 있었다. 달빛이 창살 사이로 들어와 이층 침대의 나무 틀을 비스듬히 갈랐다. 그는 위 칸에 누운 채 머리맡 틀의 안쪽 면, 누워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자리를 골랐다.

나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못 끝으로 한 획을 긋는 데 한참이 걸렸고, 획이 깊어질 때마다 나뭇가루가 베개 위로 떨어졌다. 칼은 일곱부터 팠다. 그다음 동그라미를 팠는데, 동그라미는 못으로 파기가 가장 어려워서 모서리가 여러 개 생겼다. 아홉의 꼬리를 내릴 즈음 아래 칸에서 이불이 들썩였다.

콧물“그게 뭔데.” 콧물이 아래 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뭇가루가 콧물의 이마에 떨어져 있었다.

칼“숫자.”

콧물“무슨 숫자.”

칼“외우기 쉬운 숫자.”

콧물“뭐가 쉬워, 넷이나 되는데. 쉬운 건 하나짜리야.” 콧물은 소매로 코를 훔치고 칼의 손끝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셋 넘어가면 못 외워. 교관 방 열쇠 번호도 셋이라서 외운 거야.”

칼“하나짜리는 금방 까먹어. 넷이면 손가락 하나가 남아서 쉬운 거야.” 칼은 마지막 획을 그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숫자의 반쪽만 말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고, 나머지 반쪽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콧물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누웠다.

콧물“반품. 그 깡통 무서웠어?” 한참 뒤에 아래 칸에서 콧물이 다시 물었다.

칼“아니. 차가웠어.”

콧물“차가운 거랑 무서운 거랑 달라?”

칼“달라. 무서운 건 떨어지고 싶은데, 차가운 건 그래도 붙어 있게 돼. 물보다는 덜 차가우니까.”

삼까지 다 파고 나서 칼은 손가락으로 홈을 하나씩 더듬었다. 일곱은 곧았고 동그라미는 울퉁불퉁했으며 아홉은 꼬리가 길었고 삼은 아래쪽 배가 조금 작았다. 눈을 감고 더듬어도 넷이 구별되었다. 이제 잠이 들어도 숫자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손끝으로 확인했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와 쇠사슬 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왔다. 칼은 소리가 한 번 들릴 때마다 손가락을 홈 하나로 옮겼다. 칠에서 영으로, 영에서 구로, 구에서 삼으로 옮기고 나면 다시 칠로 돌아갔다. 숫자는 백을 넘어가지 않고 넷 안에서 돌았고, 그는 그 넷을 몇 바퀴 돌기 전에 잠들었다.

가을 점검 날, 교관이 침대 틀마다 손바닥을 훑고 지나가다가 칼의 머리맡에서 멈추었다. 손가락이 홈 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교관“이게 뭐냐.”

칼“외우기 쉬운 숫자요.”

교관“침대 틀은 회사 물건이다.” 교관은 홈을 한 번 더 쓸었고, 칼의 눈썹 끝에 남은 흰 흉에 잠깐 눈을 두었다. “더 파지는 마라. 네 자리면 됐다.”

콧물“혼날 줄 알았지?” 교관이 숙소를 나가자 콧물이 아래 칸에서 속삭였다.

칼“아니. 혼낼 거였으면 처음 손 댔을 때 혼냈을 거야. 손가락이 홈에서 한 번 멈췄잖아. 혼낼 사람은 거기서 안 멈춰.”

콧물“너는 그런 걸 어떻게 봐.”

칼“보이니까 보는 거지.” 칼은 머리맡의 홈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쓸었다. 교관의 손가락이 멈췄던 자리는 동그라미였고, 거기는 그가 가장 서툴게 판 자리였다.

VII · 콧물

그 겨울 첫눈이 온 밤, 새벽 두 시쯤 잠이 얕아졌을 때 칼의 손가락은 눈을 뜨기도 전에 머리맡 틀로 먼저 갔다. 네 자리 홈을 끝까지 더듬고 나서야 그는 아래 칸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았고, 훌쩍이는 소리가 없다는 것이 숨소리가 없다는 것보다 먼저 걸렸다. 콧물의 신발이 없었다. 마당의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장마 뒤 볼트 대신 감아 두었던 철사가 눈 위에 풀어져 있었다.

콧물은 소문을 들은 것이다. 소문은 칼이 어디로 나갔는지까지만 전했지 어디로 돌아왔는지는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칼은 쇠창살로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어 방파제 아래 배수로 출구로 걸었다. 무릎이 눈길에서 두 번 꺾였다.

출구는 쇠살문으로 막혀 있었고, 겨울이라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다. 칼은 출구 옆 돌에 앉아 기다렸다. 물이 바다로 빠지는 소리가 쇠살문 사이에서 일정하게 났고, 칼은 그 소리를 세다가 그만두었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왔다. 무릎 아래가 다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랬으며, 칼을 보자 그 자리에 섰다.

콧물“왜 여기 있어.”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윗동네까지는 걸어가면 금방이야.”

칼“돌아가자. 아침 점호 전이면 자진 복귀로 적힌다.”

콧물“너는 세 번이나 나갔잖아.”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내 반으로 갈라 큰 쪽을 콧물에게 내밀었다. 콧물은 빵을 보다가 받았고, 받자마자 반을 입에 넣었다. 칼은 남은 반쪽을 들고 쇠살문 앞으로 가서 문틀에 앉은 성에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일곱이 생기고 동그라미가 생기고 아홉과 삼이 생겼다.

콧물“그거 네 침대에 있는 거잖아.”

칼“이 안에 사는 깡통 번호야.” 칼이 성에 위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물이 차면 이게 와서 건져 줘. 건져서 정문에 내려놓고, 집에는 안 데려다줘. 우리 집은 이 깡통 목록에 없었어.”

콧물“네 무릎 그때 그렇게 된 거야?”

칼“그래. 오늘은 물이 얕아서 안 왔지만 장마 때 나가면 와. 오면 정문이다. 안 오면 그냥 물이고.”

콧물은 빵을 씹던 입을 멈추고 성에 위의 숫자를 오래 보았다. 그사이 숫자 가장자리가 두 아이의 숨결에 녹아 조금씩 흐려졌다. 콧물이 소매로 코를 훔쳤고, 소매 끝에서 얼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콧물“너희 엄마는 왜 안 열어 줬는데. 우리 엄마는 열어 줬어.”

칼“몰라. 안 열어 줬다는 것만 알아. 문 안쪽에서 밤새 같이 앉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콧물“그럼 열어 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칼“그건 엄마한테 안 물어봤어.” 칼은 성에 위의 숫자를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덧그었다. 흐려졌던 일곱이 다시 선명해졌다.

콧물“그럼 너는 왜 이제 안 나가?”

칼“숫자를 가졌으니까.” 칼은 대답하고 나서 그 대답이 콧물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말했다. “담 넘고 싶은 밤에는 손가락이 먼저 틀로 가. 네 자리 다 더듬고 나면 아침이야.”

콧물“숫자 더듬으면 집 생각 안 나?”

칼“나. 근데 손가락이 바쁘면 다리가 안 나가.”

콧물“나도 하나 새겨 줘. 셋짜리로.”

칼“무슨 숫자로.”

콧물“아무거나. 외우기 쉬운 거.”

칼“그건 네가 정해야 돼. 내가 정하면 네 숫자가 아니야.”

콧물“그럼 돌아가면서 생각할게. 오래 걸려도 돼?”

칼“돼. 점호 전까지만.”

돌아오는 길에 콧물은 칼의 왼쪽에서 걸었다. 칼의 무릎이 꺾일 때마다 콧물의 어깨가 거기 있었는데, 칼은 그것이 일부러인지 묻지 않았다. 정문 등불 아래에는 장부 담당 말고 마당 교관이 먼저 나와 서 있었다. 교관은 두 아이의 젖은 바짓단과 칼의 무릎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교관“둘이 나가서 둘이 왔군. 누가 데려왔나.”

칼“같이 왔어요.”

교관“누가 먼저 돌아가자고 했나.”

칼“제가요. 두 번 했어요.”

교관“세 번째는.”

칼“빵을 줬어요. 저녁에 남긴 거요.”

교관“다음에는 빵 대신 나를 깨워라. 눈길에서 무릎 꺾이는 놈이 사람 데리러 가는 건 규정에 없다.” 교관은 장부 담당에게 고개를 까딱했고, 장부 담당은 두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다.

콧물“반품, 너는 나중에 뭐 할 거야?” 숙소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콧물이 물었다.

칼“정비공. 여기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잖아.”

콧물“나는 하역기 쇠사슬 거는 거 할래. 그건 숫자 안 외워도 된대.”

칼“하나는 외워야 돼. 숨 네 번에 한 번.” 칼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왼쪽 다리를 한 칸 끌어올렸다. “그 사이에 고리를 걸어야 하거든.”

그 주에 칼은 아래 칸 틀에도 숫자 셋을 새겨 주었다. 콧물이 고른 숫자였다. 칼이 못으로 획을 긋는 동안 콧물은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루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받았고, 다 파고 나자 손가락으로 세 홈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무슨 숫자인지 칼은 묻지 않았고, 콧물도 말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칼은 담을 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넘지 않았다. 위 칸의 네 자리와 아래 칸의 세 자리는 손가락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매끄러워졌다.

VI · 다시 물속

비는 이틀 뒤 새벽에 그쳤다. 칼은 의무실 간호인이 소독약 병을 들고 나간 사이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목을 댄 왼쪽 다리는 무릎이 굽지 않아서 그는 다리를 끌며 걸었다. 마당의 쇠창살은 빠진 볼트 자리에 철사가 감겨 있었는데, 감은 사람이 매듭을 대충 지어 두어서 손가락 셋으로 풀렸다.

사다리 열두 칸을 내려가는 데 그날 밤보다 세 배는 오래 걸렸다. 굽지 않는 다리를 먼저 내리고 성한 다리로 받쳐 가며 한 칸씩 내려갔고, 아홉째 칸에서는 잠깐 멈추었다. 칸의 모서리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물은 장마 때보다 훨씬 얕아 무릎 아래에서 찰랑거렸고, 터널 끝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빛은 바다 쪽 출구였다. 쇠살문 너머로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기계 하나가 허리를 굽히고 일하고 있었다. 장마에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깨진 상자와 그물 조각을 쇠살문에서 떼어 내 한쪽에 쌓는 중이었다. 기계는 칼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돌아보지 않았다.

칼은 물속에서 돌을 하나 집어 기계의 등에 던졌다. 돌은 등판에 맞고 물에 떨어졌지만 기계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칼은 하나를 더 던졌고, 그것도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세 번째 돌을 쥐었다가 내려놓고 물을 헤쳐 기계 앞으로 갔다.

칼“돌 맞았는데 왜 가만있어.”

철인“작업에 지장 없습니다.”

칼“아프지도 않아?”

철인“그 항목은 측정하지 않습니다.”

칼“너 장마 끝나면 어디 가?”

철인“이 구역에 있습니다. 폐기 전까지 이 구역입니다.”

가슴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날 밤 진흙에 덮여 있던 앞쪽 절반이 장마 물에 다 씻겨 있었다. 칼은 소매로 남은 물기를 닦아 내고 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숫자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어서 열 자리가 넘었고, 칠영구삼은 그 끝에 붙은 꼬리였다. 숫자 줄 아래에는 작은 글자가 한 줄 찍혀 있었다. 배수 이 구역, 인계는 등록자에 한함.

칼“앞에 숫자는 다 뭐야?”

철인“제조 번호입니다. 앞자리는 공장, 가운데는 만든 해, 끝 네 자리는 그해의 순번입니다.”

칼“그럼 너는 칠천구십삼 번째야?”

철인“그렇습니다. 그해에 만들어진 기체 가운데 칠천구십삼 번째입니다.”

칼“나 기억해?”

철인“이틀 전 밤, 이 구역 셋째 사다리 아래. 왼쪽 무릎 손상. 훈련소 정문에 인계했습니다.” 기계가 허리를 펴고 칼을 내려다보았다. 눈의 불빛은 아침 빛 속에서 생각보다 어두웠다.

칼“왜 정문이었어? 셋방이 더 가까운데.”

철인“거리는 인계 조건이 아닙니다.”

칼“물에 빠진 애 많이 건졌어?”

철인“이 구역에서 열한 명입니다.”

칼“다 정문에 내려놨어?”

철인“등록자에게 인계했습니다. 부두 감시소 다섯, 시료소 둘, 가정 셋, 훈련소 정문 하나입니다.”

칼“정문 하나는 나지?”

철인“그렇습니다.”

칼은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접어 보았다. 열한 명 가운데 셋은 집으로 갔다. 집에 등록자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정문으로 간 아이는 하나였고, 그 하나가 지금 부목을 대고 물속에 서 있었다.

칼“그럼 우리 엄마 이름 알려 줄게. 목록에 넣어.” 칼은 어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고, 셋방 골목의 위치를 덧붙였다. 골목 끝에서 둘째 집이라고, 창틀이 쇠사슬 소리에 떨리는 집이라고.

철인“등록할 권한이 당신에게 없습니다.”

칼“그럼 누가 있는데.”

철인“등록자입니다.”

칼“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철인“대답입니다. 다른 대답은 목록에 없습니다.” 기계는 그렇게 말하고 물속에 다시 무릎을 꿇었는데, 이번에는 칼을 안으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눈의 불빛이 칼의 부목 댄 다리에 머물렀다. “보폭이 이틀 전 기록과 다릅니다. 왼쪽 무릎 보행 이상이므로 인계 절차를 따릅니다.”

칼“안지 마. 걸어갈 거야.”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칼을 안지 않았다. 대신 칼의 오른쪽에서 걸었다. 칼이 굽지 않는 다리를 끌며 한 걸음을 떼는 동안 기계는 한 걸음을 반으로 나누어 떼었고, 칼이 사다리 아홉째 칸에서 쉴 때는 사다리 아래에서 기다렸다. 칼은 그것을 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계는 인계를 하는 중이었고, 인계할 물건이 느리면 느린 대로 가는 것이 일이었다.

칼“왜 천천히 가.”

철인“인계 대상의 보폭에 맞춥니다.”

칼“나 물건 아니야. 장부 아저씨는 물건이라고 했지만.”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그렇게 대답하고도 보폭을 바꾸지 않았다. 쇠 덮개를 밀어 올리자 정문 등불이 낮인데도 켜져 있었다.

칼“또 올게.” 기계가 몸을 돌리려 할 때 칼이 말했다.

철인“등록자가 아닌 사람의 방문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칼“기록 안 해도 올 거야.”

정문 계단에서 칼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기계가 그를 데려다줄 수 있는 문은 세상에 하나뿐이고, 그 문이 여기라는 것을 칼은 그때 처음으로 원망하지 않고 생각했다. 다시 그 기계를 보려면 여기 있어야 했다. 여기서 사라진 아이는 물에서 건져져도 이 계단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VII · 출구

첫눈이 온 그 밤에 칼을 깨운 것은 마당 쪽에서 난 쇳소리였다. 녹슨 쇠창살이 돌바닥에 끌리는 소리는 짧았고, 칼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몸부터 일으켰다. 새벽 두 시쯤이었고, 아래 칸의 훌쩍이는 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다음에 알았다. 창으로 내다보니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감아 둔 철사가 눈 위에 풀어져 있었다. 소문은 칼이 어디로 들어갔는지까지만 전했지 어디서 나왔는지는 전하지 않았다.

칼은 쇠창살로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출구가 어디인지 알았다.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어 방파제 아래 쇠살문으로 걸었다. 겨울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고, 쇠살문 앞에는 장마 때 기계가 쌓아 둔 나뭇가지 더미가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칼은 그 더미에 앉아 기다렸다. 무릎이 추위에 먼저 반응해서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눈 불빛 두 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기계는 콧물이 쇠살문 틈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도 돕지도 않고 지켜보았다. 물이 얕아서 건질 일이 없었고, 건질 일이 없으면 인계할 일도 없었다.

콧물“왜 여기 있어.” 콧물이 칼을 보고 그 자리에 섰는데,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저 깡통도 나를 안 잡잖아.”

칼“물이 얕으니까 안 잡는 거야. 돌아가자.”

콧물“얕으면 뭐.”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냈다. 빵을 왼손에 쥔 채 일어나 쇠살문 앞까지 다리를 끌고 가서 오른 손바닥으로 기계의 가슴판을 짚었다. 기계는 피하지 않았다. 칼은 손바닥을 옆으로 밀어 판 끝의 네 자리가 콧물에게 보이게 했다.

칼“이게 나 건진 깡통이야, 칠영구삼.” 칼이 판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장마 때 물이 차면 얘가 와서 건지는데, 건지고 나면 집에 안 데려가고 정문으로 데려가. 판에 그렇게 적혀 있어, 인계는 등록자에 한함이라고. 네 엄마는 등록자가 아니고, 우리 엄마도 아니었어.”

콧물“그걸 어떻게 알아.”

칼“물어보면 돼.” 칼은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물에 빠지면 어디로 데려가?”

철인“등록자에게 인계합니다.”

칼“얘 등록자는 어디야.”

철인“훈련소 정문입니다.”

칼“들었지? 나는 두 번 데려다줬는데 두 번 다 정문이었어.” 칼은 빵을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내밀었다. “오늘은 물이 얕아서 너 혼자 윗동네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면 너희 엄마가 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안 열어 줄 수도 있어. 그건 나도 몰라. 근데 안 열어 주면 그 앞에서 밤새 앉아 있어야 돼. 나는 해 봤어.”

콧물“나도 기억해?” 콧물이 기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 작년에도 저 쇠창살로 나갔었어.”

철인“기록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지 않은 아이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콧물“그래도 우리 엄마는 열어 줘. 전에도 열어 줬어.”

칼“열어 주고 아침에 업어서 데려다줬지. 그럼 오늘 나가도 내일 아침엔 정문이야. 너희 엄마만 밤새 업고 걷는 거고.”

콧물“그래도 국은 먹잖아.”

칼“국 먹고 정문이야. 국 안 먹고 가는 정문이랑 같은 정문이고, 너희 엄마만 국 끓이고 업고 걷는 게 더 있는 거야.”

콧물은 빵을 받았다. 받은 빵을 한참 들고만 있다가 한 입 베어 물었고, 씹는 동안 기계의 가슴판을 보았다. 기계는 두 아이 사이에 선 채 눈 불빛을 한 번도 흔들지 않았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 하역기 쇠사슬 소리가 넘어왔다.

콧물“너 무릎 아프지. 갈 때 내 어깨 잡아.”

칼“안 아파. 차가운 거야.”

콧물“그게 아픈 거야, 반품아.” 콧물은 남은 빵을 입에 몰아넣고 칼의 왼쪽으로 가서 섰다.

칼“얘 기억해 둬.” 담 쪽으로 걸음을 돌리기 전에 칼이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물에 빠지면.”

철인“물에 빠지면 기록합니다.”

칼“빠지기 전에 기억해 두라고.”

철인“그 항목은 없습니다.” 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없는 항목을 만들어 달라고 할 권한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은 장마가 끝난 아침에 이미 들었다.

돌아가는 길은 담을 넘는 길이었다. 콧물이 먼저 올라가 손을 내밀었고, 칼은 그 손을 잡고 굽지 않는 다리를 함석 위로 끌어올렸다. 담 꼭대기에서 칼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방파제 아래 쇠살문 앞에 눈 불빛 두 개가 아직 그대로 있다가, 칼이 담을 다 넘을 즈음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문지기“또 너냐.” 담에서 마당으로 내려선 두 아이 앞에 문지기가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이번엔 깡통도 없이 둘이냐.”

칼“깡통은 출구에 있어요. 물이 얕아서 안 따라왔어요.”

문지기“그게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를 네가 어떻게 아냐.” 문지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부 담당의 창구를 두드려 깨웠다.

아침 점호 전에 장부 담당이 두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다. 그 뒤로 칼은 담을 넘지 않았다. 다만 장마가 올 때마다 마당의 쇠창살 위에 서서 물소리를 들었고, 물소리 속에서 무거운 걸음이 지나가는지 들으려 했다. 걸음은 몇 해 동안 몇 번 지나갔다. 칼은 그 걸음이 같은 기계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걸음이 지나갈 때마다 쇠창살 위에서 숫자 넷을 한 번씩 입술로 읽었다.

VI · 목록

기름 학교에는 교관이 둘 있었다. 하나는 마당에서 망치를 가르치는 교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업장 안쪽 창가에서 고장 난 기계를 열어 보이는 늙은 정비 교관이었다. 아이들은 마당 교관을 무서워했고 작업장 교관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늙은 교관은 말이 느리고 귀가 어두워서, 아이들이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릎에 부목을 댄 지 나흘째 아침, 칼은 다리를 끌고 작업장으로 갔다. 늙은 교관은 창가 작업대에서 기계의 팔 하나를 분해하고 있었다. 관절 속의 톱니를 하나씩 꺼내 기름 접시에 담그는 손은 느렸지만 한 번도 같은 톱니를 두 번 집지 않았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기름 접시 위에서 무지갯빛으로 갈라졌다.

칼“등록자가 뭐예요?”

늙은 교관은 대답하지 않고 톱니 하나를 접시에 마저 담갔다. 칼은 그가 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한 걸음 다가가 다시 물었고, 교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비 교관“두 번 묻지 않아도 들었다.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늙은 교관은 기름 묻은 손을 행주에 닦았다. “누가 그 말을 하더냐.”

칼“배수 깡통이요. 나를 받을 수 있는 등록자가 여기뿐이래요. 그래서 엄마한테 안 데려다주고 정문에 내려놨어요.”

정비 교관“그랬겠지.” 늙은 교관은 작업대 아래에서 녹슨 가슴판 하나를 꺼내 칼 앞에 놓았다. 폐기된 기체에서 떼어 낸 판이었다. 판의 아래쪽에 이름 몇 줄이 쇠에 새겨져 있었고, 그 밑으로 빈 줄이 여럿 남아 있었다. “이게 목록이다. 여기 이름이 있는 사람이 이 기계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 기계가 무엇이든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다. 길 잃은 아이도 넘긴다. 이름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안 넘긴다.”

칼“여기 빈 줄에 내 이름 들어가요?” 칼이 빈 줄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비 교관“이 판은 폐기된 거다. 네 이름은 네가 맡을 기계 판에 들어간다. 그 기계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르지.”

칼“엄마 이름은 어떻게 넣어요?”

정비 교관“못 넣는다. 네 어머니는 기계를 맡은 사람이 아니니까.” 늙은 교관은 빈 줄 하나를 손톱으로 긁었다. “정비공이 되면 맡은 기체 목록에 이름이 올라간다. 고치는 사람은 명령할 수 있지. 열일곱에 견습 등록을 하고, 그때 정지 코드를 하나 고른다. 기계를 세울 때 쓰는 네 자리다.”

칼“아빠는요? 아빠는 하역기 쇠사슬 걸어요.”

정비 교관“하역기는 사람이 쇠사슬을 거는 기계다. 쇠사슬 거는 사람은 기계를 쓰는 사람이지 맡은 사람이 아니야. 목록에는 없다.”

칼“명령하면 깡통이 뭐든 해요?”

정비 교관“규칙 안에서는. 사람을 해치라는 말은 안 듣고, 목록에 없는 사람 말도 안 듣는다.”

칼“그럼 목록에 있는 사람이 집에 데려다주라고 하면요?”

정비 교관“그 집에 받을 사람이 있으면.”

칼“한번 올라간 이름은 안 지워져요?”

정비 교관“지워진다. 그만두거나 죽거나, 기계가 폐기되거나, 위에서 지우라고 하면.”

칼“위가 어딘데요.”

정비 교관“너는 아직 몰라도 되는 데다. 거기서 지우라는 말이 내려오는 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하니까.”

칼“코드는 아무 숫자나요?”

정비 교관“아무 숫자나. 잊지 않을 숫자로.”

칼“그럼 그거 할게요.”

정비 교관“왜 하려는 거냐.”

칼“다음에 물에 빠지면 정문 말고 다른 데 내려 달라고 하려고요.”

정비 교관“어디.”

칼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셋방 문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그 밖에 그가 아는 문은 정문 하나뿐이었다.

칼“아직 없어요. 생기면 그때 말할게요.”

늙은 교관은 칼을 한참 보았다. 그다음 작업대 서랍에서 손때 묻은 수첩을 꺼내 한 장을 넘기고 무엇인가를 적었다. 칼은 발돋움을 해서 보려고 했지만 교관의 글씨는 기름 얼룩처럼 뭉개져 있었다.

정비 교관“열일곱까지 여섯 해다. 그 사이에 한 번만 더 담을 넘으면 이 쪽은 찢는다.” 교관은 수첩을 덮었다. “명령하는 법은 열일곱에 가르쳐 주마. 그때까지 너는 명령은 못 하고 물어볼 수만 있다. 묻는 것도 일이니까 제대로 해라. 오늘처럼 물으면 된다.”

정비 교관“기왕 왔으니 이거나 해라.” 교관이 톱니 한 줌을 칼 앞으로 밀었다. “하나씩 접시에 담그고, 담근 건 왼쪽에 놓아라. 같은 걸 두 번 집으면 처음부터 다시다.”

칼은 의자에 왼쪽 다리를 뻗고 앉아 톱니를 하나씩 담갔다. 기름은 손톱 밑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어머니가 밤마다 문질러 빼던 그 까만 것이 이번에는 칼이 고른 일로 묻었고, 정오의 종이 울릴 때까지 그는 같은 톱니를 한 번도 두 번 집지 않았다.

칼은 작업장을 나오면서 기름 접시 위의 무지갯빛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는 마당 교관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담을 넘어서 얻은 것은 반품이라는 낱말과 끊긴 눈썹이었고, 물에 빠져서 얻은 것은 무릎이었다. 오늘 그는 한 번 물었고, 빈 줄 하나와 네 자리를 얻었다.

VII · 빈 줄

그 겨울 첫눈이 온 밤, 새벽 두 시쯤 아래 칸이 빈 것을 알았을 때 칼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콧물이 아니라 늙은 교관의 수첩이었다. 한 번만 더 담을 넘으면 찢는다던 그 한 쪽이었다. 칼은 그 생각을 밀어 두고 아래 칸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불은 접힌 채 식어 있었다. 마당의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감아 두었던 철사가 풀려 눈 위에 늘어져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칼은 쇠창살 앞에 잠깐 서서 늙은 교관의 숙소 창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칼은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었다. 넘으면서 그는 이것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데리러 가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두 번 말했다.

방파제 아래 쇠살문 앞에서 그는 기다렸다. 겨울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고, 바닷바람이 쇠살문 사이로 휘파람 소리를 냈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와 칼을 보고 섰는데, 무릎 아래가 다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랬다.

콧물“왜 여기 있어.”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칼“돌아가자. 지금 가면 점호 전이야.”

콧물“너는 왜 안 가는데? 너도 집에 가고 싶잖아.”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내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내밀었다. 콧물은 받지 않으려다가 빵에서 김이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받았다. 빵은 차가웠지만 콧물의 손보다는 따뜻했다.

칼“기계한테는 목록이 있어.” 칼은 쇠살문 옆 돌에 앉으며 말했다. “목록에 이름 있는 사람만 기계한테 일을 시킬 수 있어. 아이를 넘겨받을 수도 있고. 우리 엄마는 목록에 없어서 배수 깡통이 나를 엄마한테 안 데려다줬어.”

콧물“그래서 뭐.”

칼“정비공이 되면 그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열일곱에. 그러면 기계가 우리 말을 들어.” 칼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깐 멈추었다. 그다음 말은 그도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등록자가 되는 거야. 그다음에 누가 물에 빠지면 그 애는 정문 말고 우리한테 넘겨질 거야.”

콧물“그거 진짜야?”

칼“앞에 건 작업장 교관이 그랬으니까 진짜야. 뒤에 건 모르겠어, 나도 아직 안 해 봤으니까.”

콧물“목록에 이름 올라가면 엄마한테 갈 수 있어?”

칼“엄마가 목록에 있어야 돼. 근데 엄마들은 기계를 안 맡는다고 작업장 교관이 그랬어.”

콧물“그럼 소용없잖아.”

칼“우리한테는 소용없지. 우리 다음에 빠지는 애한테는 소용 있을 거야.” 칼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 말이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이 할 일을 생각해 본 적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콧물은 빵을 씹으면서 한참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그는 코를 두 번 훔쳤고, 세 번째로 훔치려다 손을 내렸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 하역기 쇠사슬 소리가 넘어왔다. 칼은 그 소리를 세지 않고 콧물의 대답을 기다렸다.

콧물“나는 셋 넘어가면 못 외워. 정지 코드 네 자리는 못 외울 거야.”

칼“그럼 넌 셋만 외워. 하나는 내가 갖고 있을게.”

콧물“그런 게 돼?”

칼“모르겠어. 내일 물어볼게.”

콧물“모르면서 하나는 갖고 있겠다고 했어?”

칼“모르니까 물어본다고 한 거야.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해 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돌아가는 길에 콧물은 칼의 왼쪽에서 걸었고, 칼의 무릎이 꺾일 때마다 어깨를 내밀었다. 방파제를 다 지났을 즈음 콧물이 걸음을 늦추었다.

콧물“반품, 셋은 뭐로 할까.”

칼“네가 정해. 내가 정하면 네 숫자가 아니야.”

콧물“그럼 우리 집 번지로 할래. 윗동네 골목 첫 집, 그거 셋이야.”

칼“그거면 안 까먹겠다.” 칼은 그 숫자를 한 번 따라 말해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번지까지는 오늘 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둘은 그 반대쪽으로 걷고 있었다.

정문은 등불이 켜진 채 반쯤 열려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장부 담당이 하품을 하며 장부를 펼쳤다.

장부 담당“이번엔 뭐라고 적어 주랴, 반품.”

칼“자진 복귀 둘이요. 둘 다 제 발로 왔어요.”

장부 담당“이제는 장부에 적을 말까지 골라 오는구나.” 장부 담당은 혀를 차면서도 칼이 고른 말을 두 이름 옆에 그대로 적었다.

다음 날 아침 칼은 작업장 창가로 가서 늙은 교관에게 지난밤 일을 그대로 말하고, 네 자리를 둘이 나누어 외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교관은 기름 접시에서 톱니를 건지던 손을 멈추었다.

정비 교관“안 된다. 코드는 한 사람이 다 갖는다. 둘이 나눠 가진 코드는 급할 때 반쪽만 온다.” 교관은 수첩을 꺼내 그 쪽을 펼쳐 보았다.

칼“찢으실 거예요?”

정비 교관“찢는다고 했지. 담을 넘으면.” 교관은 펜을 들고 한참 수첩을 내려다보다가 찢지 않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넘은 건 맞는데 혼자 돌아오지는 않았군. 그건 따로 적어 둔다.”

칼“뭐라고 적었어요?”

정비 교관“그건 열일곱에 물어라. 그때도 궁금하면.”

칼은 그 뒤로 담을 넘지 않았다. 넘을 일이 생기면 먼저 작업장 창가로 가서 물었고, 대답이 늦게 오는 날에도 물은 것을 무르지 않았다. 칼은 그날 점심에 콧물에게 안 된다는 대답을 그대로 전했고, 콧물은 그해 겨울에 숫자 셋을 외웠다. 무슨 숫자인지는 칼만 알았다.

제0부 2장

닫는 사람

열일곱 · 스물넷

아래로 ↓

I · 면회

침대 틀에 판 네 자리는 육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고참 견습이 되면 창가 침대로 옮길 수 있었지만 칼은 옮기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 그 홈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열한 살 때와 같은 대답을 했고, 대답은 육 년 동안 한 글자도 늘지 않았다. 못 끝으로 판 홈에는 그새 기름때가 앉아서 숫자가 처음보다 더 또렷해져 있었다.

비가 그친 다음 날이면 칼은 배수 출구에 갔다. 육 년 동안 서른 번쯤 갔고, 가슴 번호판의 네 자리는 갈 때마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 배수 기체는 한 번도 그를 알아보지 않았다. 쓰레기를 건지고 쇠창살을 닦고 물이 빠지는 방향을 확인한 뒤 돌아섰을 뿐이다. 알아볼 칸이 없는 기계라는 것을 그는 열네 살 무렵에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뒤에도 가는 횟수는 줄지 않았다.

늙은 정비 교관은 그 뒤로 육 년 동안 칼이 물을 때마다 대답했다. 등록자가 되려면 견습 등록이 있어야 하고, 견습 등록에는 정지 코드 네 자리가 있어야 하며, 코드는 열일곱 살 봄에 고른다고 했다. 칼은 그 순서를 침대 머리맡에 적어 두지 않았다. 적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는 그 무렵에 알았다.

면회는 계절마다 한 번, 훈련소 식당의 긴 탁자에서 했다. 어머니들은 보따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았고, 아이들은 맞은편에 앉아 보따리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열일곱 살쯤 되면 애쓰지 않아도 보지 않게 된다. 칼은 탁자 끝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들어올 문을 보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골랐고, 앉은 뒤에도 한 번은 문 쪽을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어머니“손 줘 봐.”

어머니는 인사보다 그 말을 먼저 했다. 칼이 손을 탁자 위에 올리자 어머니는 자기 손으로 그것을 뒤집어 손톱을 하나씩 보았다. 세탁장 잿물에 여덟 해를 더 담근 손이라 마디가 굵고 붉었다. 어머니는 보따리에서 잿물 비누 한 조각을 꺼내 물컵에 적신 뒤 칼의 손등을 문질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손목 쪽으로 검은 줄 하나가 뻗어 있었는데, 지난여름 정비동에서 새는 기름관을 맨손으로 잡은 뒤로 생긴 줄이었다.

어머니“이건 왜 안 빠지니.”

칼“안 빠져. 기름이 살 밑으로 들어간 거라서 위에서 문질러서는 안 돼.”

어머니는 한 번 더 문질렀다. 줄은 그대로였고 비누 거품만 손등 위에서 회색으로 흐려졌다. 그러다 어머니가 웃었는데, 칼이 기억하는 한 어머니가 면회 탁자에서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젠 안 지워지네.”

칼“그게 웃을 일이야?”

어머니“다 컸다는 거지. 내 손으로 못 지우는 게 생겼으니까.” 어머니는 비누를 칼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가지고 있어. 너 손 씻을 때 쓰라고 가져온 거다.”

칼은 비누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 도망쳤던 밤 셋방 문 앞에서 있었던 일을 그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어머니도 꺼내지 않았다. 그날 문은 열리지 않았고, 문 너머에서 돌아가라는 목소리만 들렸다. 열일곱이 된 지금 칼은 계약서 맨 아래 칸을 읽을 줄 알았다. 계약을 깨면 부모가 물어야 하는 돈이 그 칸에 적혀 있었고, 그 돈은 세탁장에서 십 년을 일해도 모이지 않는 액수였다. 그 숫자를 읽은 날부터 그는 셋방 문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문을 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유가 되었고, 이유가 생긴 일은 더 이상 그를 붙들지 않았다.

어머니“밥은 잘 나오니?”

칼“나와. 엄마가 그래서 보낸 거잖아, 그 말은 맞았어.”

어머니“눈썹은 이제 안 아프고?” 어머니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칼의 왼쪽 눈썹 끝을 엄지로 쓸었다. 끊긴 자리에는 털이 다시 나지 않았고 그 자리만 살이 조금 희었다.

칼“벌써 칠 년 된 흉이라 안 아파.” 칼은 어머니의 손 밑에서 고개를 빼지 않았다. “다음 주에 견습 등록을 해. 등록하면 정비공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어머니“그러면 뭐가 달라지니?”

칼“기계가 내 말을 들어. 전부는 아니고, 내가 손댄 것만.” 칼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코드도 하나 생겨. 네 자리 숫자인데, 그걸 넣으면 기계가 하던 일을 멈춰.”

어머니“숫자는 정했니?”

칼“정했어.”

어머니는 무슨 숫자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방식이었고, 칼은 그 방식을 아홉 살 때는 싫어했으며 열일곱 살에는 편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풀어 보리빵 두 덩이와 새로 기운 셔츠 한 벌을 꺼냈다. “아버지가 이번엔 오려고 했는데 야간이 안 끝났다. 사슬 거는 사람이 하나 빠지면 하역기가 서니까.”

칼“알아. 여기서도 들려. 밤새 쇠사슬 소리가 한 번도 안 끊기면 아버지가 빠지지 않은 날이야.”

어머니“너는 그걸 아직도 세니?”

칼“세. 세다가 잠들고, 소리가 끊기면 그때 깨.”

종이 울리자 어머니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식당 천장에서 한 번 크게 울리고 흩어졌다. 어머니는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고, 칼은 탁자 끝자리에서 손을 한 번 들어 보였다. 그날 밤 그는 정비동 세면대에서 어머니가 준 비누로 손을 씻었다. 손톱 밑은 하얘졌는데 손등의 줄은 끝내 남았고, 줄이 남는 것을 보고 나서 그는 비누를 아껴 쓰기로 했다. 지워지지 않는 것을 지우느라 지워지는 것을 다 써 버리는 일은 정비공이 할 일이 아니다.

세면대 옆에서 이를 닦던 열 살짜리 하나가 거품 문 입으로 칼을 올려다보았다. 그 주에 들어온 아이였고, 아직 망치를 쥐는 손목이 가늘었다. “형, 멍텅구리 다음 주에 버린대요. 교관님들이 그러던데요.”

칼“버리는 게 아니라 뜯는 거다. 쇠는 녹여서 다시 쓴다.”

아이“그럼 멍텅구리는 어디 가요?”

칼“모른다. 쇠가 되면 이름은 따라가지 않으니까.” 칼은 젖은 손을 작업복에 닦았다. “너는 몇 번 쳤냐.”

아이“세 번이요. 근데 걔는 안 피해서 그게 이상해요.”

칼은 대답하지 않고 아이의 머리에 붙은 비누 거품을 엄지로 한 번 밀어 주었다. 안 피하는 것이 규칙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지만, 그 규칙이 왜 있는지는 열일곱이 되도록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침상에 누워 다음 주면 사라질 기체의 일을 오래 생각했다.

II · 원인 불명

견습 등록 전날 밤, 정비동 뒤편 고철 마당에 멍텅구리가 실려 나왔다. 칼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들의 망치를 받아 온 연습 기체였다. 얼굴판은 움푹 꺼진 자리가 겹쳐 원래 모양을 알 수 없었고, 한쪽 팔은 어깨에서 떨어져 몸통 옆에 따로 누워 있었다. 폐기 판정은 사흘 전에 났으니 내일 아침이면 고철 수레가 와서 싣고 갈 것이다. 칼은 저녁 점호가 끝난 뒤 등유 등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가슴판의 나사는 넷이었다. 셋은 녹이 슬어 드라이버가 헛돌았고, 마지막 하나는 누군가 먼저 풀어 본 흔적이 있어서 손목을 반 바퀴 돌리자 빠졌다. 판을 들어내자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폐기 판정을 받은 기체도 기록판의 전원은 따로 살아 있다는 것을 칼은 정비 교본의 맨 뒷장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등유 등을 땅에 내려놓고 기록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기록판에 남은 것은 마지막 칠 년 치였다. 줄마다 날짜가 있고 증상이 있고 원인이 있었다. 얼굴판 함몰은 원인 타격, 왼팔 관절 이탈도 원인 타격, 시각 소자 일부 손상도 원인 타격이었다. 줄은 같은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내려갔고, 칼은 손가락으로 판을 밀어 가며 한 줄씩 읽었다. 원인을 아는 고장에는 원인이 적혀 있었지만, 원인을 모르는 고장에는 그럴듯한 다른 말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칠 년 전 겨울의 한 줄에서 칼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고개 돌림,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날짜는 그가 망치를 배수 쇠창살로 던진 날이었다. 그날 멍텅구리가 망치를 들지 못하는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사람은 마당에서 칼 하나뿐이었고, 칼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열 살에도 알았다. 기계는 그것을 적어 두었고, 다만 왜 돌렸는지는 적지 않았다.

그 아래로도 원인 불명은 띄엄띄엄 이어졌다. 야간 정지 중 시각 소자 점등, 원인 불명. 망치 접근 시 회피 동작 없음, 규칙에 따름. 겨울철 왼쪽 무릎 관절 소음,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기계는 모르는 칸을 그럴듯한 말로 채우지 않았는데,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채웠을 것이다. 칼은 교관들이 쓰는 점검표를 알았고, 거기에는 원인 칸이 빈 줄이 하나도 없었다. 전부 정상 마모 아니면 사용자 부주의였다.

칼은 오랫동안 기록판 앞에 앉아 있었다. 등유 등의 심지가 짧아져 불꽃이 낮게 흔들렸다. 그는 견습들에게 나누어 준 정비 수첩을 꺼내 첫 장에 연필로 네 글자를 적었다. 원인 불명. 그 옆에 조금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었고, 소리 내어 읽지는 않았지만 입술은 따라 움직였다. “원인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교관“폐기 기체 뚜껑을 여는 건 규정 위반이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작업장 안쪽 창가에서 고장 난 기계를 열어 보이던 늙은 정비 교관이 외투를 걸친 채 마당 입구에 서 있었다. 나무라는 목소리라기보다 날씨를 말하는 목소리였다.

칼“압니다. 내일이면 고철 수레가 가져가니까 오늘 봤습니다.”

교관“뭘 봤나.”

칼“기록입니다. 모르는 건 전부 원인 불명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칠 년 동안 하나도 지어내지 않았습니다.”

교관“기계는 지어낼 줄을 모른다. 그걸 칭찬으로 듣는 놈은 드물지.” 교관은 다가와서 기록판을 들여다보았다. 칼의 손가락이 멈추었던 줄에 그의 눈도 잠깐 머물렀다. “칠 년 전 겨울 줄도 봤겠군.”

칼“봤습니다. 고개 돌림, 원인 불명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교관“너는 그 원인을 아나.”

칼“모릅니다. 돌리는 걸 본 것만 압니다.”

교관“그럼 너는 기계하고 같은 만큼 아는 거다. 더 아는 척하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교관은 가슴판을 들어 원래 자리에 맞추었다. 나사 넷 가운데 쉽게 빠졌던 하나를 손끝으로 한 번 돌려 보더니 칼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등록이다. 코드 네 자리는 정해 왔나.”

칼“칠영구삼입니다.”

교관“왜 그 숫자냐.”

칼“외우기 쉬워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육 년 동안 침대 틀에서 손끝으로 읽어 온 숫자였으니 외우기 쉬운 것은 사실이었다.비가 그칠 때마다 배수 출구에서 다시 읽어 온 번호판이었으니 외우기 쉬운 것은 사실이었다.등록자가 되려면 코드가 있어야 한다고 처음 일러 준 사람이 지금 그 숫자를 묻고 있었고, 외우기 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외우기 쉬운 데에는 까닭이 있었고, 칼은 그 까닭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교관은 더 묻지 않고 외투 주머니에서 등록 카드를 꺼내 등유 등 불빛에 비추며 네 자리를 적었다.

교관“내일 아침 등록관 앞에서 같은 숫자를 한 번 더 말해라. 한 번 정하면 평생 간다. 바꾸는 서류가 있긴 한데 그걸 쓰는 정비공은 아직 못 봤다.”

칼“안 바꿉니다.”

교관이 돌아간 뒤 칼은 가슴판의 나사를 다시 조였다. 내일이면 뜯길 기체였지만 열린 채로 밤을 넘기게 두고 싶지 않았다. 녹슨 셋은 끝까지 헛돌았고 쉽게 빠졌던 하나만 제자리에 물렸다. 다음 날 아침 고철 수레가 왔을 때 칼은 등록관 앞에 줄을 서 있었고, 멍텅구리가 실려 나가는 바퀴 소리를 마당 너머로 들었다. 등록관이 숫자를 묻자 그는 어젯밤과 같은 숫자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등록관“칠영구삼. 이 숫자로 평생 기계를 멈추게 되는데, 맞나.”

칼“맞습니다. 교관님이 어젯밤에 카드에 적어 주셨습니다.”

등록관은 두꺼운 명부를 펴고 맨 아래 빈 줄에 칼의 이름과 등록일을 적었다. 그 위로 같은 해에 등록한 견습들의 이름이 여남은 줄 있었다. 자기 이름이 목록의 한 줄로 들어가는 것을 칼은 그날 처음 보았고, 그 줄이 무엇을 할 수 있게 해 주는지는 아직 손으로 해 보지 않았으므로 몰랐다.

III · 첫 번째 닫기

계약은 열아홉 살 늦봄에 끝났다. 훈련소는 계약이 끝난 견습에게 작업복 한 벌과 정비 등록증과 남쪽 항구까지 가는 배표 한 장을 주었다. 부두에 남으면 회사 정비 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다시 십 년짜리 종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칼은 배표를 골랐다. 남쪽 항구에는 등록증만 있으면 계약서 없이 일당을 주는 배들이 있다고 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셋방에서 저녁을 먹었고, 이번에는 그가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열렸다.

남쪽 항구에 내린 첫날 그는 부두를 따라 걸으며 배마다 등록증을 내밀었다. 세 번째 배의 선장이 등록증을 받아 햇빛에 비추어 보더니 칼의 손을 보았다. 손등의 검은 줄을 보고 나서야 등록증을 돌려주었다.

선장“코드는 몇 번이나 넣어 봤나.”

칼“연습 기체에 삼백 번쯤 넣었습니다. 진짜 기체에는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

선장“정직하군. 정직한 놈은 일당이 싸다.”

칼“그럼 싸게 받겠습니다. 대신 밥은 제때 주십시오.”

선장은 웃지 않았지만 갑판 쪽으로 턱짓을 했다. 연장 가방을 메고 갑판에 오르자 토치 냄새를 풍기는 사내 하나가 그의 앞을 막고 위아래를 훑었다. “배에선 이름 안 쓴다. 부를 거 없냐.”

칼“훈련소에선 반품이라고 불렀다.”

갈고리“반품이면 도로 실려 왔다는 거냐, 고철선에 반품은 안 받는데.” 사내는 침을 뱉고 웃었다. “등록증 있으면 닫는 양반이고, 나는 갈고리다.”

그를 태운 고철선은 녹이 선체의 절반을 덮은 낡은 배였다. 난파선과 버려진 기체를 뜯어 쇠붙이 값으로 파는 배였고, 선원은 여덟이었다. 선장은 배 값과 쇠 값과 기름 값을 머릿속에서 동시에 셈하는 사람이었다. 기관장은 왼쪽 귀를 낡은 천으로 감싸고 다니는 늙은 사내였는데, 그쪽 귀가 어두워서 선원들은 늘 그의 오른쪽에 서서 말했다. 정비 등록증을 가진 사람은 배에 칼 하나뿐이었으므로 그에게 맡겨진 일도 하나뿐이었다. 뜯기 전에 닫는 일이다.

첫 일은 출항 사흘째 오후에 왔다. 곶 끝의 얕은 모래톱에 바지선 하나가 기울어진 채 박혀 있었고, 그 갑판에 기체 한 기가 서 있었다. 등록자가 배를 버리고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선장이 말했다. 기체의 오른팔은 아직 닻줄을 감는 자세로 굽어 있었지만 감을 줄은 오래전에 끊어져 없었다. 고철선이 옆에 붙자 기체의 눈 불빛이 천천히 이쪽으로 돌았다.

선장“등록자 없는 기체니까 정비 등록증 코드면 듣는다. 닫아라, 견습.”

칼“견습 아닙니다. 등록증 있습니다.”

선장“닫고 나서 그 말 해라. 닫기 전엔 다 견습이다.”

선원들이 웃었다. 칼은 웃지 않고 바지선으로 건너가 기체의 가슴판을 열었다. 숫자 단추 열 개가 박힌 입력판이 나왔고, 단추마다 소금기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칼은 엄지로 소금을 밀어낸 뒤 하나씩 눌렀고, 누를 때마다 입술이 따라 움직였다. 손끝은 침대 틀의 홈을 더듬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갔다.배수 출구에서 번호판을 읽던 순서 그대로였다.늙은 교관이 등록 카드에 받아 적던 순서 그대로였다. “칠, 영, 구, 삼.”

철인“정지 코드를 확인합니다. 등록 정비공 오르벡.” 기체의 목소리는 녹슨 경첩 소리를 닮아 낮게 갈라졌다. “남은 작업이 없습니다. 작업 종료를 확인합니다.”

눈 불빛이 한 번 깜박이고 꺼졌다. 닻줄을 감던 오른팔이 아주 천천히 펴지며 몸 옆으로 내려왔고, 무릎이 조금 굽으면서 기체 전체가 한 뼘쯤 낮아졌다. 칼은 기계가 넘어지는 중이 아니라 자세를 고쳐 서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닫힌 기계는 쓰러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자기 몸을 가장 덜 상하는 자세에 두고 멈출 뿐이다.

선원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갈고리라고 불리는 사내가 절단 토치에 불을 붙였고, 파란 불꽃이 기체의 어깨 이음매를 파고들었다. 녹이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칼의 얼굴로 몰려왔다. 칼은 바지선 난간에 매어 둔 양동이로 바닷물을 떠서 손을 적시고, 작업복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준 비누 조각을 꺼내 손톱 밑까지 문질렀다. 손등의 줄이 그대로 남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 번 더 문질렀다.

갈고리“닫은 놈이 손은 왜 씻냐, 피 묻은 것도 아닌데.” 갈고리가 토치 너머로 소리쳤다.

칼“네 토치 냄새가 묻었다. 그거 씻는 거다.”

갈고리“토치 냄새는 바닷물로도 안 빠진다, 견습. 나는 십 년째 달고 다닌다.”

칼“그러니까 매번 씻는 거다. 십 년 치가 한꺼번에 붙으면 그땐 비누로도 안 된다.”

선장“닫았으니 이제 견습 아니다.” 선장이 조타실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일당은 그대로다.”

칼“그럼 밥은 제때 주십시오. 그것도 그대로면 됩니다.”

선원들이 다시 웃었고, 이번에는 칼도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조타실 옆 그늘에서 기관장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늙은 사내는 파이프를 문 채 칼 쪽으로 오른쪽 귀를 조금 기울였다가 기관실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는데, 칼에게 한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합리적이군.”

그날 밤 칼은 선원실 해먹에 누워 정비 수첩을 펴고 원인 불명이라고 적힌 첫 장 다음 장에 첫 줄을 적었다. 날짜, 곶 끝 바지선, 닻줄 감는 기체 한 기, 작업 종료 확인. 적고 나서 그는 기체가 마지막에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남은 작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기계는 꺼졌다.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적을 칸은 수첩에 없었다. 해먹이 파도를 따라 흔들렸고, 부두의 쇠사슬 소리 대신 닻줄이 선체를 긁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IV · 외투

기관장은 첫 석 달 동안 칼에게 말을 거의 걸지 않았다. 칼이 기관실 계단을 내려간 것은 여름 끝의 어느 밤이었고, 해먹에 누워 닻줄 소리를 세다가 그 밑에 깔린 기관 소리에서 박자 하나가 빠지는 것을 들은 뒤였다. 기관실은 더웠고, 기관장은 웃통을 벗은 채 오른쪽 귀를 기관 쪽으로 대고 앉아 있었다.

기관장“기관실은 네 일 아니다.”

칼“압니다. 소리가 이상해서 내려와 봤는데, 왼쪽 둘째 피스톤입니다. 열 번에 한 번씩 박자가 빠집니다.”

기관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몸을 돌려 오른쪽 귀를 왼쪽 피스톤 쪽으로 가져갔다. 한참 듣고 나서 그는 공구함에서 렌치를 꺼내 칼에게 내밀었다. “그쪽은 내 귀로는 안 들리는 쪽이다. 네가 조여라.”

그날 밤 이후로 기관장은 칼에게 말을 조금 더 걸었지만, 말이 늘었다고 해서 부딪칠 일이 줄지는 않았다. 첫 가을이 오기 전에 칼은 기관장과 한 번 부딪쳤다. 비가 사흘째 내리던 날이었고, 고철선은 북쪽 만에 가라앉은 화물선 옆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물이 빠진 화물선 갑판에 기체 두 기가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칼은 첫 기체의 가슴판을 열자마자 입력판으로 손을 가져갔고, 그때 뒤에서 누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기관장“기록부터 봐라.”

칼“닫으면 그만입니다. 뜯을 기체 기록을 봐서 뭐 합니까.”

기관장“기록부터 봐라.” 기관장은 같은 말을 같은 높이로 한 번 더 했다. 손목을 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는데도 칼은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칼은 입을 다물고 기록판을 넘겼다. 마지막 줄들은 배가 가라앉기 전 몇 달 동안의 것이었다. 압력관 이상, 원인 정상 마모. 그 아래로 같은 증상이 일곱 번 더 있었고 원인 칸에는 일곱 번 다 같은 말이 들어 있었다. 칼은 눈을 가까이 대고 나서야 그 글자들이 기계가 적은 줄 위에 덧쓴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지운 자리 밑에 희미하게 남은 원래 글자는 넷이었다.

칼“원인 칸을 사람이 고쳤습니다. 기계는 원래 원인 불명이라고 적었는데 그 위에 정상 마모라고 덧썼습니다.”

기관장“팔아먹을 기체는 다들 그렇게 고친다. 원인 불명이라고 적힌 기계는 값이 안 나오니까.” 기관장은 칼의 손목을 놓고 화물선 선체 쪽으로 턱짓을 했다. “압력관부터 빼고 닫는다. 그냥 닫고 토치를 대면 저 관이 터진다.”

칼은 시키는 대로 했다. 압력관의 밸브를 잠그고 남은 김을 빼는 데 반 시간이 걸렸고, 김 빠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덮었다. 그 뒤에 코드를 넣자 기체는 작업 종료를 확인하고 눈을 껐다. 다 끝나고 나서 칼이 물었다. “그 귀도 그렇게 된 겁니까?”

기관장“누가 원인 칸에 거짓말을 적었지. 그 칸 값이 이 귀다.”

기관장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두 번째 기체 쪽으로 턱을 들었다. 칼은 이번에는 누가 시키기 전에 가슴판을 열고 기록판부터 넘겼다. 압력관 줄은 없었고, 원인 칸마다 기계가 처음 적은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인 불명이 셋, 원인 염수 침투가 다섯이었다.

칼“이건 덧쓴 줄이 없습니다. 원인 불명이 세 줄 있는데, 기계가 적은 그대로입니다.”

기관장“그럼 그냥 닫아라.” 기관장은 칼의 손을 보지 않았다. “덧쓰지 않은 원인 불명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건 누가 아는 척한 칸이다.”

칼은 코드를 넣었고, 두 번째 기체도 작업 종료를 확인하고 눈을 껐다. 그사이 빗줄기는 굵어져 있었다.

비는 그칠 기색이 없었고, 칼의 얇은 작업복은 어깨부터 등까지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기관장이 자기 외투를 벗었다. 회색 모직 외투였는데, 팔꿈치에 덧댄 천이 두 겹이었고 칼에게는 어깨가 조금 컸다.

기관장“입어라. 나는 기관실에 내려가면 덥다.”

칼“빌리는 겁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기관장“돌려줄 때 말해라. 그때까지는 네 거다.”

두 사람은 조타실 처마 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나누어 피웠다. 기관장이 먼저 몇 모금 빨고 칼에게 넘겼고, 칼이 반을 피우고 돌려주었다. 칼은 외투 깃을 세웠다. 모직에 밴 기름 냄새와 파이프 냄새가 빗물에 불어 무겁게 올라왔고, 그 냄새는 춥지 않았다.

칼“아까 손목 잡으셨을 때는 화가 났습니다.”

기관장“알았다. 화난 놈 손목은 뜨겁거든.” 기관장은 담배를 받아 한 모금을 빨았다. “그런데 원인 칸을 덧쓴 걸 어떻게 알아봤냐. 대개는 눈을 그렇게 가까이 안 댄다.”

칼“훈련소에서 폐기 기체 기록을 몰래 열어 본 적이 있습니다. 칠 년 치였는데, 모르는 건 전부 원인 불명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기계가 그렇게 적는다는 걸 알고 나니까 정상 마모가 일곱 번 줄지어 있는 게 이상해 보였습니다.”

기관장“그 기계가 웬만한 정비공보다 정직했군.”

칼“기계는 지어낼 줄을 모릅니다. 사람은 알고요.”

기관장“사람은 아는 게 문제다.” 기관장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꽁초를 빗물 고인 갑판에 비벼 껐다. “다음부터 닫기 전에 기록부터 봐라. 세 번은 말 안 한다.”

칼“세 번째는 어떻게 하십니까.”

기관장“손으로 한다. 오늘 봤잖냐.”

칼“귀는 왜 천으로 감싸고 다니십니까. 안 들리는 쪽이면 감쌀 필요가 없을 텐데요.”

기관장“바람이 들어가면 속에서 우는데, 안 들리는 귀가 우는 건 또 잘 운다.” 기관장은 천 위로 귀를 한 번 눌렀다. “기계도 그렇다, 고장 난 자리가 제일 시끄럽지.”

칼은 그 외투를 그해 겨울 내내 입었다. 이듬해 봄에도 입었고, 돌려드리겠다는 말은 그 뒤로 몇 번 입 밖에 나오다 말았다. 기관장은 한 번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선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외투를 칼의 외투라고 불렀는데, 칼은 그때마다 빌린 거라고 고쳐 말했다. 고쳐 말하는 버릇은 외투보다 오래갔다.

V · 닫는 사람의 해들

그 뒤 네 해 동안 칼이 닫은 기체는 정비 수첩에 한 줄씩 남았다. 첫해에 서른한 기, 이듬해에 마흔네 기, 셋째 해에는 남쪽 해안에 큰 폭풍이 지나간 탓에 예순 기가 넘었다. 줄마다 날짜와 장소와 기체가 하던 일과 작업 종료 확인이 적혀 있었다. 닻줄 감는 기체, 등대 램프를 닦는 기체, 양식장 그물을 걷는 기체, 바닷가 묘지의 풀을 깎는 기체가 차례로 수첩에 들어왔다. 마지막 칸은 언제나 같았지만 칼은 같은 말을 적는 일이 지겹지 않았다. 같은 말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은 기계가 매번 같은 방식으로 끝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백 번째 줄을 적은 날은 둘째 해 늦가을이었다. 바닷가 묘지의 풀을 깎던 기체였고, 기체가 마지막으로 깎다 만 자리에는 풀이 한 뼘쯤 남아 있었다. 칼이 갑판에서 수첩에 줄을 긋고 있을 때 기관장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백 번째냐.”

칼“백 번째입니다. 쓰는 줄이 같으니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기관장“같은 줄을 백 번 다 쓰는 놈은 드물다. 대개 오십 번째쯤부터 줄을 줄인다. 장소를 빼고, 하던 일을 빼고, 나중엔 숫자만 남지.”

칼“줄이면 나중에 못 읽습니다. 어느 기체였는지 모르게 되면 그건 기록이 아니라 셈입니다.”

기관장“셈은 선장이 한다. 합리적이군.” 기관장은 파이프로 수첩의 첫 장을 한 번 가리켰다가 거두었다. 원인 불명이라는 네 글자가 적힌 장이었고, 늙은 사내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갈고리“오늘은 몇 마리 죽였냐, 닫는 양반.” 선원들은 닫는 일을 죽인다고 불렀다. 칼도 처음 한 해는 그렇게 불렀다.

기관장“닫는다고 해라.” 기관장은 그 말이 들릴 때마다 고쳐 주었다. 오른쪽 귀로 들은 말만 고쳐 주었으므로 절반쯤은 그냥 지나갔다.

칼“뭐가 다릅니까. 어차피 뜯기면 끝인데.”

기관장“뜯기 전까지는 다르다. 그 차이를 모르면 정비공이 아니라 토치잡이다.” 기관장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파이프를 털었다. “토치잡이도 나쁜 일은 아니다만, 너는 등록증을 받았잖냐.”

갈고리“나는 토치잡이라 다행이네. 토치는 등록증이 없어도 불이 붙거든.” 그래도 기관장은 닫지 않은 쇠에 토치를 대는 놈을 배에 두지 않았고, 갈고리는 칼이 닫았다고 하기 전에는 토치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셋째 해 봄에는 선장이 기록 보는 시간을 줄이라고 했다. 폭풍 뒤라 닫을 기체가 줄을 서 있었고, 기체 하나에 반 시간이면 하루에 네 기를 덜 뜯는다는 것이 선장의 셈이었다. 칼은 입력판 앞에서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기록 보는 데 반 시간입니다. 압력관 하나 터지면 배 값입니다. 반 시간하고 배 값하고 어느 쪽이 싼지는 선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선장“셈을 할 줄 아는 닫는 놈은 처음이군.” 선장은 혀를 찼지만 그 뒤로 기록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반 시간이다. 그 이상은 네 일당에서 뺀다.”

닫고 나면 손을 씻는 버릇은 첫날부터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준 비누 조각은 손톱만 하게 닳은 뒤로 빈 담배 깡통에 넣어 두고 더 쓰지 않았고, 대신 항구마다 잡화점에서 파는 잿물 비누를 샀다. 갈고리는 칼이 비누를 꺼낼 때마다 오늘도 장례식이냐고 놀렸다. 칼은 그 농담이 나올 때마다 네 토치 냄새를 씻는 중이라고 같은 대답을 했고, 갈고리는 그 대답이 나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웃었다.

항구에 들어오는 밤이면 칼은 다른 선원들과 같이 선창 술집에 갔다. 술은 싸고 독했으며, 다음 날 아침 입안에 남는 맛은 토치 냄새와 비슷했다. 한번은 다른 고철선 선원이 뜯어 온 기체의 머리를 탁자 위에 놓고 재떨이로 쓰고 있었다. 칼은 그 머리에서 꽁초를 털어 내고 겨드랑이에 끼었다.

칼“뜯는 건 일이다. 이건 일이 아니다.” 칼은 머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 바다에 던졌고, 따라 나온 선원과 엉겨 붙은 끝에 그날 밤은 선창 바닥에서 잤다.

기관장“머리를 바다에 던진 건 잘했다. 그 뒤에 맞은 건 못했고.” 다음 날 아침 기관장이 갑판에서 칼의 터진 입술을 보고 말했다.

칼“두 번째 주먹부터는 저도 쳤습니다.”

기관장“첫 번째를 피했어야지. 그건 합리적이지 않군.”

넷째 해 겨울에는 외투 팔꿈치의 덧댄 천이 해져 구멍이 났다. 칼은 항구 잡화점에서 회색 실과 바늘을 사 와 선실 등잔 밑에서 직접 꿰맸다. 바늘은 렌치보다 다루기 어려웠고, 손가락을 두 번 찔린 끝에 겨우 구멍을 막았지만 바늘땀은 고르지 않았다.

기관장“남의 외투를 그렇게 꿰매 놓으면 돌려받을 때 내가 곤란하다.” 기관장이 팔꿈치의 삐뚤어진 땀을 보고 말했다.

칼“돌려드릴 때까지는 제 거라고 하셨습니다. 제 거니까 제 손으로 꿰맸습니다.”

편지는 남쪽 항구의 하숙집으로 왔다. 배는 한 번 나가면 석 달이나 넉 달 뒤에야 들어왔고, 그동안 온 편지는 하숙집 주인이 계산대 밑 서랍에 모아 두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대개 세탁장 동료에게 받아쓰게 한 것이어서 길지 않았다. 날씨와 세탁장 일과 아버지의 야간 근무가 적혀 있었다. 칼은 답장을 세 번에 한 번쯤 썼고, 쓸 말이 없을 때는 수첩에서 닫은 기체 수를 세어 적었다.

갈고리“어머니한테 그 숫자를 왜 적어 보내냐. 몇 마리 죽였다고 자랑하는 거냐.” 선실에서 답장을 쓰는 칼의 어깨 너머로 갈고리가 물었다.

칼“닫았다고 적는 거다. 쓸 말이 없을 때는 숫자가 제일 정직하다.”

갈고리“어머니가 그걸 알아들으시냐.”

칼“모르신다. 무슨 숫자냐고 한 번도 안 물으셨다. 그런데 다음 편지 끝에 그 숫자를 꼭 다시 적어 보내신다. 그러니 받긴 받은 거다.”

VI · 문 앞 의자

스물네 살 늦겨울, 넉 달 만에 배가 남쪽 항구에 들어왔다. 하숙집 주인은 서랍에서 편지 다섯 통을 꺼내 칼에게 건넸다. 넷은 어머니가 보낸 것이었고 하나는 봉투 가장자리에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칼은 계산대 앞에 선 채 테 두른 봉투를 먼저 뜯었다. 세탁장에서 어머니와 같이 일하던 사람이 쓴 편지였고, 날짜는 석 달 전이었다.

편지에는 날짜와 장소가 있었고 장례가 이미 끝났다는 말이 있었다. 원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쓴 사람이 몰랐거나, 알았어도 적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칼은 편지를 두 번 접어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네 통을 계산대 위에 가지런히 쌓았다.

하숙집 주인“무슨 소식이오?”

칼“집 소식입니다.”

하숙집 주인“좋은 거요, 나쁜 거요?”

칼“지난 소식입니다. 석 달 지난 거요.” 칼은 어머니의 편지 넷을 집어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간에서 그는 선창에서 사 온 병 두 개가 외투 주머니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은 이층 복도 끝이었다. 창 하나에 침대 하나, 벽에는 소금기가 배어 하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칼은 문을 잠그고 침대에 앉아 어머니의 편지를 날짜 순서대로 읽었다. 날씨와 세탁장과 아버지의 야간 근무가 있었다. 두 번째 편지에는 세탁장 지붕을 새로 이어서 비가 와도 빨래가 젖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고, 세 번째 편지에는 아버지가 사슬 거는 자리를 젊은 사람에게 하나 물려주었다는 말이 있었다. 맨 마지막 편지 끝에는 지난번 그가 적어 보낸 숫자가 그대로 옮겨 적혀 있었다. 백팔십칠. 칼은 그 숫자를 오래 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센 숫자인지 어머니는 끝내 묻지 않았고,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칼은 정비 수첩을 펴서 기체 줄을 첫 줄부터 세었다. 곶 끝 바지선에서 시작한 줄이 백팔십칠 번째에서 끝났고, 숫자는 맞았다.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첫 병을 꺼내 마개를 땄다.

그는 연장 가방 맨 아래에서 빈 담배 깡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손톱만 하게 닳은 잿물 비누 조각이 깡통 바닥에서 마른 소리를 냈다. 칼은 그것을 꺼내지 않고 뚜껑을 다시 닫아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두었다.

이틀 동안 칼은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병 두 개는 첫날 밤에 비었고, 둘째 날 아침 그는 계단을 내려가 하숙집 주인에게서 병을 더 샀다. 주인은 병을 내주면서 칼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하숙집 주인“한 번에 두 병씩이면 배 나가기 전에 몸이 먼저 나가오.”

칼“배는 아직 안 나갑니다. 몸도 아직은 여기 있고요.”

칼은 병값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날 아침에는 방파제 끝에 묶어 둔 기체를 닫는 일이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알고 있었고 가지 않았다. 수첩을 펴 놓고 아무것도 적지 않았으며, 잿물 비누로 손을 씻지도 않았다. 닫은 뒤에 씻는 손이었는데 이번에는 닫은 것이 없었다. 창밖에서 갈매기 소리가 났고, 그는 그것을 세지 않았다. 남쪽 항구에도 하역기는 있었지만 쇠사슬이 도는 박자가 부두의 것과 달라서 다섯 해가 지나도록 그는 그 소리에 맞추어 잠든 적이 없었다. 그날 밤에는 그 다른 박자마저 끊길 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한낮에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나고 누가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갈고리의 목소리였다. “닫는 양반, 방파제 가야지. 선장이 일당 날렸다고 갑판을 발로 차고 있다.”

칼“오늘은 못 간다.”

갈고리“아프냐? 어디 터졌냐?”

칼“안 터졌다. 가라.”

갈고리“빵이라도 사다 줄까. 선창 빵집은 아직 문 열었을 거다.”

칼“됐다. 선장한테는 내가 오늘 못 간다고 했다고만 전해라. 이유는 붙이지 말고.”

갈고리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이유를 붙이지 말라는 말을 그는 그대로 지킬 사내였다. 내려가는 발소리는 올라올 때보다 느렸다. 해 질 무렵 누가 다시 문을 두드렸는데,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였다.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드리는 소리가 멎고 한참 뒤에 복도에서 나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의자 다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추었고, 누군가 거기에 앉는 무게가 마룻바닥을 타고 침대까지 전해졌다. 파이프 담배 냄새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기관장“오늘 아침 방파제 기체를 못 닫았다. 등록증 가진 놈이 안 나와서 선장이 하루 일당을 날렸다.” 문 너머의 목소리는 갑판에서와 같은 높이였다. “편지는 하숙집 주인한테 들었다. 테 두른 봉투였다더라만, 안에 뭐가 적혔는지는 모른다.”

칼“가십시오.”

기관장“안 간다.”

칼“가십시오. 선장이 기다립니다.”

기관장“선장은 쇠 값을 기다리지 사람은 안 기다린다. 방파제 기체는 아직 계선주에 묶여 있고, 사흘 뒤에도 묶여 있을 거다. 기계는 기다리는 데 불평을 안 하니까.” 문 너머에서 파이프를 터는 소리가 났다. “배는 나흘 뒤에 나간다. 그 전에 너는 나를 넘어서 나가든가, 사흘만 나한테 맡겨라.” 의자가 한 번 삐걱거렸다. “둘 중 하나다, 셋째는 없다.”

의자가 다시 조용해졌다. 한참 뒤에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는데, 앞의 말보다 조금 낮았다. “대답은 지금 안 해도 된다. 나는 의자를 안 치울 테니, 정하는 건 너다.”

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문을 보았다. 나무 문은 얇았고, 문 아래 틈으로 복도의 등잔불이 한 줄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을 의자 다리 두 개가 가르고 있었다. 아이 때 그는 셋방 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의 바깥쪽에 서 있었다. 지금은 안쪽이었고, 문을 잠근 사람은 그였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접힌 편지의 모서리가 가슴께를 찔렀다. 그는 편지를 꺼내 다시 읽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원인 칸은 비어 있을 것이고, 그 빈칸을 그는 이미 외우고 있었다.

문 앞 의자

VII · 방파제

칼은 연장 가방을 메고 문을 열었다. 기관장은 의자에 앉은 채 두 다리를 복도 건너편 벽까지 뻗고 있었다. 비켜 주지도 않았고 막지도 않았다. 칼은 그 다리를 넘었는데, 넘을 때 외투 자락이 기관장의 무릎을 스쳤는데도 늙은 사내는 파이프를 문 채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기관장“어디 가냐.”

칼“방파제요, 오늘 못 닫은 거 닫으러 갑니다. 날린 일당 메우면 되잖습니까.”

기관장“밤에 혼자서.”

칼“닫는 데 둘은 필요 없습니다. 등록증 가진 놈은 하나면 됩니다.”

기관장“그래, 넘어서 나가는 쪽을 골랐구나.” 기관장은 그 말만 하고 다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 봐라.”

밤의 선창은 이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술집 창마다 불이 켜져 있었고, 하역기는 남쪽 항구의 박자로 쇠사슬을 감았으며, 젖은 돌바닥에는 생선 비늘이 등불을 받아 반짝였다. 칼은 그 사이를 연장 가방의 무게만 느끼며 걸었다. 걷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세지 않았고, 세지 않는다는 것을 방파제 입구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방파제는 항구 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끝에 등대가 하나 서 있었다. 등대 아래 계선주에 기체 한 기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폭풍 때 떠밀려 온 양식장 기체였다. 그물을 걷던 팔 두 개 가운데 하나는 꺾여 있었고, 남은 팔은 걷을 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걷어 올리는 동작을 아주 느리게 되풀이했다. 바닷바람이 방파제 위를 쓸고 지나갈 때마다 기체를 묶은 쇠사슬이 돌에 부딪쳐 울렸다.

칼은 가슴판을 열었다. 입력판에 소금이 앉아 있었고, 그는 늘 하던 대로 엄지로 소금을 밀어냈다. 첫 단추를 누르려는데 손끝이 단추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졌다. 다시 누르자 이번에는 단추가 눌렸지만, 두 번째 단추를 찾는 동안 검지가 공중에서 떨렸다. 이틀 동안 마신 술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하기로 했다.

칼“칠, 영, 구, 삼.” 칼은 숫자를 입으로 따라 하며 눌렀다. 입은 정확했는데 손은 그렇지 않았다.

철인“입력 간격이 고르지 않아 코드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입력하십시오.”

칼“기다려라. 손이 말을 안 듣는다.” 칼은 기계에게 그렇게 말해 놓고 자기가 기계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철선에 탄 다섯 해 동안 닫을 기체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철인“대기합니다.”

칼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처음부터 다시 눌렀다. 셋째 숫자에서 손가락이 옆 단추를 함께 눌렀고, 기체가 같은 말을 같은 높이로 되풀이했다. 세 번째로 누르려고 손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손을 보았다. 등잔도 없는 방파제 끝에서 등대 불빛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손이 하얗게 드러났다가 다시 어두워졌고, 드러날 때마다 손은 떨리고 있었다.

철인“입력자의 손 떨림이 기준을 넘었습니다. 안전 규정에 따라 해가 뜰 때까지 입력을 받지 않습니다.”

입력판의 불이 꺼졌다. 칼은 손바닥으로 꺼진 판을 한 번 내리쳤다. 판은 둔하게 울리기만 하고 불을 켜지 않았으며, 기체는 그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손바닥이 얼얼해진 뒤에야 그는 깨달았다. 기계를 때리려고 손을 든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기체의 남은 팔은 여전히 그물 없는 그물을 느리게 걷었다. 걷어 올릴 그물도, 그물을 던져 둔 바다도 없는 자리에서 그 팔은 자기가 받은 일을 끝까지 하고 있었다. 칼은 계선주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닫는 사람이 된 지 다섯 해 만에 처음으로 닫지 못한 기체가 눈앞에 서 있었다.

발소리가 방파제를 따라 천천히 다가왔다. 기관장은 한 손에 등잔을 들고 다른 손에 복도에 있던 그 나무 의자를 들고 있었다. 그는 칼 옆에 의자를 내려놓고 앉아서 등잔을 입력판 쪽으로 들어 비추었다. 꺼진 판을 한참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기관장“기분이 손에 묻으면 기계가 먼저 안다.” 기관장은 칼을 보지 않고 기체를 보며 말했다. “네가 모르는 척해도 손가락이 알고, 손가락이 알면 입력판이 안다. 저것들은 그런 걸 재라고 만든 물건이다.”

칼“기계가 기분을 어떻게 압니까.”

기관장“기분은 모르지. 손 떨림은 안다. 기분이 손으로 나온다는 걸 아는 건 사람 몫이고.” 기관장은 등잔을 조금 낮추었다. “그러니까 기계 앞에 설 때는 기분을 집에 두고 와야 한다. 못 두고 오겠으면 기계 앞에 서지 마라. 그날은 기계가 너를 안 받는다.”

칼“이틀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기관장“그것만이냐.”

칼“어머니입니다. 석 달 전이랍니다.” 칼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등대 불빛이 다시 지나갔고 손은 아직 떨리고 있었다.

기관장“술 때문이면 아침엔 닫힌다. 아니면 안 닫히고.” 기관장은 등잔을 돌 위에 내려놓았다. “어느 쪽인지는 사흘 뒤에 보자. 오늘은 방으로 가고, 의자는 내가 든다.”

칼은 일어났다. 왼쪽 무릎이 차가운 돌 위에 오래 있었던 탓에 첫걸음이 늦었다. 기관장은 의자를 들고 앞서 걸었고, 하숙집 이층 복도에 도착하자 그 의자를 아까와 같은 자리에 내려놓았다. 칼은 방으로 들어갔고, 이번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VIII · 사흘째 아침

사흘 동안 기관장은 의자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는 것은 하숙집 주인이 아침과 저녁으로 빵을 가지고 올라올 때와 밤에 한 번 계단 아래 뒷간에 다녀올 때뿐이었다. 빵은 보리빵이었고 하루에 두 덩이였다. 기관장은 한 덩이를 문 앞에 두고 한 덩이를 자기가 먹었다. 첫날 칼은 문 앞의 빵을 들이지 않았고 둘째 날 저녁에야 들였다. 남은 술병은 첫날 아침 기관장이 복도 창밖으로 들고 나갔는데, 칼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기관장“해 떴으니 입력판도 다시 켜졌을 거다. 갈 거냐.” 첫날 아침 문 너머에서 기관장이 물었다.

칼“아닙니다. 손이 아직 압니다.”

기관장“그럼 됐다. 손이 잊을 때까지 기다려라, 기계는 기다려 준다. 묶어 둔 쇠사슬이 녹슬기 전에만 가면 된다.”

칼“그 기체는 아침마다 입력을 다시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흘을 묶어 두고 기다리게 해도 됩니까.” 첫날 저녁에는 칼이 먼저 물었다.

기관장“기계는 기다리는 게 일이다. 기다리는 동안 기록이 한 줄 늘 뿐이다. 입력 거부, 원인 불명. 너는 원인을 알지만 저놈은 모르니까 그렇게 적겠지.”

기관장“빵 들였냐.” 둘째 날 밤 문 너머에서 기관장이 물었다.

칼“들였습니다. 반만 먹었습니다.”

기관장“반이면 됐다. 나머지 반은 아침에 먹어라. 한꺼번에 먹으면 사흘 굶은 배가 놀란다.”

사흘째 아침에 기관장이 문을 열었다. 잠기지 않은 문이었다. 칼은 침대에 앉아 있었고, 머리는 사흘 전보다 맑았으며 입안에는 보리빵 맛이 남아 있었다. 기관장은 문지방을 넘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었다.

기관장“손 줘 봐.”

칼은 그 말을 어디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알았다. 알면서 손을 내밀었다. 기관장은 칼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위로 오게 하고 자기 손바닥을 그 아래에 받쳐 한참 들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아침 볕이 두 사람의 손 위에 걸쳐 있었다. 칼의 손등에는 검은 줄이 있었고 기관장의 손등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기관장“떨리나.” 기관장은 칼의 손바닥을 받친 채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안 떨리네. 그럼 닫힌 거다. 네 어머니는 죽은 거고 너는 닫힌 거다.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정비공 첫 번째 일이다.”

기관장“닫힌 건 연다.” 기관장은 그제야 칼의 손을 놓았다. “네 코드는 네가 넣었으니 여는 것도 네 손이다. 방파제에서 그 손을 한 번 써 봐라.”

기관장은 외투가 없는 셔츠 주머니에서 보리빵 한 덩이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반을 칼에게 주고 반은 자기가 들었다. 칼은 빵을 받아 침대에 앉은 채로 먹었다. 편지를 읽은 뒤로 처음으로 맛을 알고 먹는 음식이었다. 다 먹고 나서 그는 손바닥의 빵 부스러기를 털고 말했다.

칼“합리적이군.”

기관장“그건 내 말이다.” 기관장은 빵을 씹으며 오른쪽 귀를 칼 쪽으로 돌렸다. “외투는 빌려 줬어도 말은 안 빌려 줬다.”

칼“말은 닳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기관장“닳는다. 너 같은 놈이 아무 데나 쓰면.” 기관장은 남은 빵을 입에 넣고 일어났다. 사흘 동안 접혀 있던 무릎이 펴지는 소리가 복도에 났다.

그날 오전 두 사람은 방파제 끝으로 갔다. 이번에는 기관장이 의자를 들고 가지 않았다. 양식장 기체는 그대로 계선주에 묶인 채 남은 팔로 그물 없는 그물을 걷고 있었고, 입력판의 불은 다시 켜져 있었다. 칼은 바로 코드를 넣지 않고 기록판부터 열어 마지막 줄들을 읽었다. 압력관 이상은 없었고 원인 칸을 덧쓴 흔적도 없었다. 그는 손을 한 번 펴 보았다가 쥐었고, 손은 떨리지 않았다.

칼이 단추를 누르는 동안 이번에는 입술이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정확했으므로 입이 거들 필요가 없었다. “정지 코드를 확인합니다, 등록 정비공 오르벡. 작업 종료를 확인합니다.” 기체의 팔이 마지막으로 한 번 올라갔다가 몸 옆으로 내려왔고 눈 불빛이 꺼졌다.

기관장“사흘 전 그 손이었으면 오늘도 못 닫았다.”

칼“압니다. 그래서 넣기 전에 한 번 펴 봤습니다.”

기관장“합리적이군.” 기관장은 말하고 나서 칼을 흘끗 보았다. 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늙은 사내는 방금 자기가 빌려 준 말을 도로 쓴 셈이라는 것을 아는 얼굴이었다.

칼은 기체를 계선주에 묶어 두었던 쇠사슬을 풀었다. 닫힌 기체가 쇠사슬에 매달린 채로 뜯길 때까지 기다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사슬을 걷어 내자 기체는 방파제 돌 위에 무릎을 조금 굽힌 자세로 똑바로 섰고, 바람이 불어도 더는 울리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는 양동이에 바닷물을 떠서 손을 씻었다. 잿물 비누가 손톱 밑을 하얗게 만들었고 손등의 줄은 그대로 남았다. 기관장은 방파제 돌에 걸터앉아 그것을 지켜보다가, 칼이 손을 다 씻자 일어나 먼저 항구 쪽으로 걸었다. 그날 밤 칼은 정비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방파제 끝, 양식장 기체 한 기, 작업 종료 확인. 그 아래 칸에 조금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었는데, 그것은 기체에 대한 줄이 아니었다. 사흘 전 밤 손 떨림, 원인 알고 있음.

그 뒤로 두 해 동안 칼은 입력판에 손을 대기 전에 손바닥을 한 번 펴 보는 버릇을 가졌다. 선원들은 그것을 닫는 양반의 기도라고 불렀다. 칼은 기도가 아니라 점검이라고 고쳐 말했고, 회색 외투는 그 두 해 동안에도 여전히 빌린 외투였다.

손바닥을 펴 보고도 떨림이 남아 있는 날이 그 두 해 동안 두 번 있었다. 칼은 두 번 다 그날의 기체를 이튿날로 미뤘고, 선장은 두 번 다 일당 이야기를 했다. 수첩에는 미룬 이유가 원인 칸처럼 적혔다. 원인 알고 있음, 작업은 다음 날.

VII · 문 너머의 귀

칼은 대답하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문은 잠긴 채였다. 복도의 의자가 한 번 삐걱거리고 조용해졌다. 기관장은 더 두드리지 않았고 돌아가지도 않았다. 파이프 냄새가 문틈으로 들어오다가 밤이 깊어지자 끊겼는데, 끊긴 뒤에도 의자 다리가 바닥을 누르는 무게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첫날 밤 칼은 잠들지 못했다. 남은 병을 다 비우고도 눈은 감기지 않았고, 천장의 소금 얼룩이 어둠 속에서 더 희게 보였다. 새벽에 문 앞에서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아침에 문을 조금 열어 보니 보리빵 한 덩이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는데, 칼은 물만 들였다. 빵은 저녁까지 문 앞에 있다가 기관장이 도로 가져갔고, 다음 날 아침 새 빵이 같은 자리에 놓였다.

그날 저녁 문 너머에서 기관장이 말을 시작했다. 칼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고 대답을 기다리는 말도 아니었다. 정비공이 닫힌 기체 옆에서 연장을 고르며 혼자 하는 말과 같은 높이였다. “내가 너만 할 때 탄 배 이야기다. 지금 배보다 컸고, 선장은 지금 선장보다 셈이 빨랐다.”

기관장“그 배에 기체 한 기를 실었다. 다른 배가 팔아넘긴 건데 기록판 원인 칸이 깨끗했다. 압력관 이상, 원인 정상 마모. 열 줄이 다 그랬다. 기계가 처음 적은 말은 원인 불명이었을 텐데, 누가 그 위에 덧썼지. 원인 불명이라고 적힌 기체는 값이 안 나오니까.”

기관장“우리 배 정비공은 기록을 안 봤다. 정상 마모면 닫을 것도 없다고, 시간 아끼자고 했다. 닫지 않은 기체에 토치를 댔고 압력관이 터졌다. 나는 그 관에서 세 걸음 떨어져 있었는데 왼쪽 귀가 그쪽을 향해 있었다.” 의자가 한 번 삐걱거렸다. “견습 하나가 관 바로 앞에 있었는데, 열여덟이었다.”

칼은 벽을 보고 누운 채로 들었다. 몸은 돌리지 않았다. 문 너머의 목소리는 거기서 한동안 멎었고, 그동안 복도 끝 창문으로 바람 소리만 들어왔다. 기관장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조금도 높아지거나 낮아지지 않았다.

기관장“그 견습은 닫는 법을 배우러 배에 탔다. 첫 달이었고 아직 코드도 없었다. 터지고 나서 정비공이 한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다. 남은 쪽 귀에. 원인 칸에 정상이라고 적혀 있었잖소, 그러더라.”

기관장“그 정비공은 다음 항구에서 내렸다. 덧쓴 놈은 끝내 못 찾았는데, 찾았어도 뭘 하겠냐. 그놈은 그저 빈칸을 못 견딘 거다. 빈칸을 두면 값이 안 나오고 사람들이 묻고, 대답을 못 하니까 채운 거지. 모르는 걸 아는 것처럼 적으면 그 칸 때문에 언젠가 누가 죽는다. 나는 그걸 귀 하나 주고 배웠다.”

기관장“그 뒤로 나는 기체를 죽인다고 안 한다. 닫아 놓고 기록 보고, 그다음에 뜯는다. 죽인다고 말하는 놈들은 기록을 안 보거든. 죽은 걸 왜 들여다보냐는 거지.” 문 너머에서 파이프를 터는 소리가 났다. “테 두른 편지가 왔다는 건 안다. 그 안에 뭐가 적혔는지는 모르고, 모르니까 안 묻고 안 적는다. 사흘째 아침에 네 손을 보고 적겠다.”

칼은 외투 안주머니의 편지를 떠올렸다. 날짜와 장소가 있었고 원인 칸은 비어 있었다. 열일곱 살 밤 고철 마당에서 읽은 멍텅구리의 기록에도 그런 줄이 있었고, 기계는 그 칸을 끝내 채우지 않았다. 편지를 쓴 사람이 채우지 않은 것이 몰라서인지 알면서 그런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덧쓰지는 않았다. 그는 그 사실 하나를 문 너머의 목소리와 나란히 놓고 오래 누워 있었다.

그 뒤로 문 너머는 조용했다. 칼은 그날 밤 처음으로 잠들었다. 깨었을 때 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복도에서는 사람이 앉은 채로 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가서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쇠로 된 고리는 밤새 식어 손바닥에 차갑게 붙었다. 그는 그것을 돌리지 않고 침대로 돌아갔고, 이튿날 아침의 빵은 들였다. 빵은 아직 따뜻했다. 문 앞에 놓인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놓은 사람이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빵을 들인 그 아침에는 갈고리가 올라왔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복도에서 기관장과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 저놈 살아 있소?”

기관장“숨소리 들린다. 선장한테 사흘이라고 전해라.”

갈고리“사흘이면 일당이 사흘 치 날아가는데, 선장이 갑판을 또 찰 거요.”

기관장“차게 둬라, 갑판은 쇠라 안 깨진다. 일당은 내 몫에서 빼라고 해라.”

이튿날은 길었다. 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세었고, 얼룩이 끝나자 창밖 갈매기가 지붕에 내려앉는 횟수를 세었다. 세는 동안에는 편지의 모서리가 덜 찔렀다. 한낮에 계단을 올라온 하숙집 주인이 복도에서 기관장과 말을 주고받았다.

하숙집 주인“영감, 그 의자 값은 안 받겠소. 그런데 사흘째 거기 앉아 있으면 다른 손님들이 지나다니질 못하오.”

기관장“지나갈 놈은 내 다리를 넘어가면 되오. 빵 값은 받으시오. 저놈 일당에서 빼면 되니까.”

하숙집 주인이 웃으며 내려갔다. 칼은 벽을 보고 누운 채 그 말을 들었고, 몸은 돌리지 않았지만 숨이 한 번 길게 나갔다. 해 질 무렵 문 너머에서 의자가 다시 삐걱거렸다. 기관장은 그날 저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할 이야기를 다 한 사람처럼 조용했다. 밤이 깊어지자 문틈으로 파이프 냄새 대신 한마디가 들어왔다. “내일 아침이다.”

VIII · 사흘째 아침

사흘째 아침에 문을 연 것은 칼이었다. 잠긴 고리를 안에서 풀고 문을 당기자 의자에 앉아 있던 기관장이 눈을 떴다. 늙은 사내는 칼이 빌려 입은 외투 대신 얇은 작업복 웃옷 차림이었고, 턱에는 흰 수염이 까칠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칼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칼“어머니입니다. 석 달 전에.” 사흘 동안 쓰지 않은 목소리라 첫 음이 갈라졌다. 칼은 그것이 대답의 전부라는 것을 알았고, 기관장도 더 묻지 않았다.

기관장“손 줘 봐.”

칼은 문지방에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기관장은 그 손을 받아 뒤집어 보고, 손등의 검은 줄을 엄지로 한 번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손짓이었다. 칼은 그 손짓을 어디서 보았는지 알았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기관장“떨리나. 안 떨리네.” 기관장은 칼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럼 닫힌 거다. 네 어머니는 죽은 거고 너는 닫힌 거다.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정비공 첫 번째 일이다.”

기관장“닫힌 건 연다.” 그제야 기관장은 칼의 손을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흘 동안 접혀 있던 무릎이 펴지는 소리가 복도에 났다. “네 코드는 네가 넣었다. 그러니 여는 것도 네 손이다.”

기관장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것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보리빵이었고 하나는 잡화점에서 파는 잿물 비누 한 장이었다. 비누는 아직 모서리가 각져 있었다. 칼은 둘 다 받아 빵을 먼저 먹었고, 다 먹은 뒤 복도 끝 세면대에서 새 비누로 손을 씻었다. 손톱 밑이 하얘졌고 손등의 줄은 남았다.

칼“비누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칼은 젖은 손을 들고 물었다.

기관장“닫을 때마다 손 씻는 놈의 비누가 사흘째 말라 있으면 그건 고장이다. 원인은 몰라도 증상은 보이지.” 기관장은 빈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증상을 봤으니 부품을 사 온 거다.”

칼“부품 값은 제 몫에서 빼십시오.”

기관장“그건 안 뺀다. 비누 값까지 빼 주면 선장이 너무 좋아한다.” 기관장은 그렇게 말하고 빈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칼“합리적이군.” 칼은 젖은 손을 외투 자락에 닦으며 말했다.

기관장“그건 내 말이다.” 기관장이 오른쪽 귀를 칼 쪽으로 돌렸다. “외투에 말까지 빌려 가면 나는 뭘 입고 뭘 말하냐.”

칼“빌리는 겁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기관장“돌려줄 때 말해라.” 기관장은 빈 의자를 들어 복도 끝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사흘 전 해 질 무렵의 소리와 같았고, 이번에는 멀어지는 쪽이었다.

그날 오후 두 사람은 하숙집을 나와 선창을 따라 배 쪽으로 걸었다. 기관장이 왼쪽에 섰으므로 칼은 그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사흘 동안 문 너머에서만 듣던 목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이 칼에게는 조금 낯설었다.

칼“그 견습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기관장“기억은 한다. 부르지는 않는다.” 기관장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앞만 보며 대답했다. “부르면 그 칸에 뭔가를 적고 싶어진다. 왜 거기 서 있었는지, 왜 내가 안 말렸는지. 그런 건 아무리 적어도 맞는 말이 안 된다.”

칼“저는 모르면 비워 두겠습니다. 값이 안 나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관장“값은 선장이 걱정한다. 너는 칸만 걱정해라.” 기관장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처음으로 칼 쪽을 보았다. “사흘 동안 문 안에서 대답 한 번 안 한 놈이 나와서 처음 하는 말이 그거냐. 합리적이군.”

배에 오르자 선장이 갑판에서 칼을 보자마자 날린 일당 이야기를 꺼냈다. 인사보다 셈이 먼저인 것은 선장다웠고, 칼은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선장“방파제 날린 하루 치는 네 몫에서 뺀다. 나머지 사흘 치는 기관장이 자기 몫에서 빼라더라. 하숙집 빵 값은 또 네 몫이고.”

칼“빼십시오. 빵은 제가 먹은 겁니다.”

선장“반은 기관장이 먹었다던데.” 선장은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더 꺼내려다가 기관장이 오른쪽 귀를 그쪽으로 돌리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이튿날 아침 방파제 기체를 닫기 전에 칼은 기록판부터 열었다. 원인 칸에 덧쓴 줄은 없었고, 그는 수첩에 그 사실을 먼저 적은 뒤에 코드를 넣었다. 기체는 작업 종료를 확인하고 눈을 껐다. 등 뒤에서 기관장이 기록 봤느냐고 물었고, 칼은 봤다고 대답하고 덧쓴 줄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늙은 사내는 더 말할 일이 없어졌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가 준 비누 조각은 담배 깡통에 그대로 두었다. 새 비누는 그 뒤로 두 해 동안 그의 연장 가방 맨 위 칸에 있었고, 닳으면 같은 잡화점에서 같은 것을 샀다. 정비 수첩의 기체 줄 위에는 그날부터 원인 칸 덧씀 여부를 적는 칸이 하나 더 생겼다. 칼은 그 칸을 한 번도 비워 두지 않았고, 덧쓴 흔적을 찾은 날이면 그 기체는 압력관부터 뺐다.

배가 다시 나간 첫날 밤, 칼은 선원실 해먹에 누워 닻줄이 선체를 긁는 소리를 세었다. 사흘 동안 세지 않았던 소리였다. 기관실 쪽에서 낮은 기관 소리가 그 밑에 깔렸는데, 박자 하나 빠지지 않고 고르게 돌았다. 왼쪽 둘째 피스톤은 다섯 해 전 여름 그가 처음 조였던 자리였고, 그 뒤로 기관장은 그쪽 소리를 칼에게 맡겨 두었다. 그는 서른까지 세다가 잠들었고, 그날 밤에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으므로 깨지 않았다.

VII · 문을 사이에 두고

칼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문 너머에서 의자가 한 번 삐걱거렸다. 얇은 나무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등이 거의 같은 높이에 있었다. 칼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었다. 묻고 싶은 것은 하나였는데, 그것을 묻는 데 맞는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칼“닫은 기체는 다시 열 수 있습니까.”

기관장“있다.” 대답은 생각할 틈도 없이 문 너머에서 바로 왔다. “뜯기 전이면.”

칼“어떻게 엽니까.”

기관장“닫은 놈이 같은 코드를 한 번 더 넣는다. 그러면 기체가 묻는다, 작업을 다시 받겠느냐고. 받겠다고 하면 열린다.” 문 너머에서 파이프를 터는 소리가 났다. “너는 다섯 해 동안 백 기 넘게 닫으면서 그걸 한 번도 안 물었다.”

칼“뜯을 거니까요.”

기관장“그래서 안 물었겠지. 그럼 오늘은 왜 묻냐.”

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외투 안주머니의 편지가 가슴께에서 접힌 모서리로 그를 찔렀다. 문 너머의 기관장은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칼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대답은 첫 단어에서 끝났다.

칼“어머니입니다.”

기관장“그건 단어 하나다.” 기관장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말에 이유를 붙여라. 이유 없는 말은 기계도 안 받는다. 사람은 받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기계보다 덜 받는다.”

칼은 문에 뒤통수를 기댔다. 이유를 붙이는 일은 정비 수첩에 원인을 적는 일과 닮아 있었다. 아는 만큼만 적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으면 된다. 그는 아는 것부터 말했다. “석 달 전에 죽었답니다. 세탁장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날짜와 장소가 있고, 장례는 끝났다고 했습니다. 원인은 없습니다.”

기관장“없다는 건 비어 있다는 거냐, 모른다고 적혀 있다는 거냐.”

칼“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맞는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쓴 사람이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았는데 안 적었을 수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지어서 적지는 않았으니까요. 지어서 적었으면 저는 그 사람한테 화를 냈을 겁니다. 지금은 화낼 사람이 없어서 문을 잠근 겁니다.”

말을 끝내고 나서 칼은 자기가 한 번에 그렇게 길게 말한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문 너머가 한동안 조용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문 아래 틈의 등잔 불빛을 한 번 흔들었다.

기관장“지금 그게 이유가 붙은 말이다.” 기관장이 문 너머에서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그런 말은 받는다. 사흘 동안 그렇게 말해라. 그러면 사흘째 아침에 네 질문에 나머지 대답을 하마. 닫은 걸 어떻게 여는지는 방금 말했지만, 그건 반쪽짜리 대답이었다.”

그 밤 두 사람은 문을 사이에 두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기관장이 묻고 칼이 대답했다. 칼은 대답마다 이유를 하나씩 붙였고, 붙일 이유가 없으면 모른다고 했다.

기관장“배에서 밤마다 뭘 세는 것 같던데, 해먹에서 입술이 움직이더라. 뭘 세냐.”

칼“닻줄 소리를 셉니다. 부두에서 자랄 때는 하역기 쇠사슬 소리를 셌습니다. 아버지가 밤에 사슬을 거는 사람이라서, 소리가 안 끊기면 아버지가 빠지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세다가 잠드는 버릇이 그때 들었고, 셀 게 없으면 지금도 잠이 안 옵니다.”

기관장“나는 기관 소리를 센다. 왼쪽으로는 못 들으니까 오른쪽으로 두 번 센다.” 문 너머에서 의자가 한 번 삐걱거렸다. “오늘은 뭘 세고 있었냐.”

칼“아무것도 안 셌습니다. 이 항구 하역기는 박자가 달라서 세다가 자꾸 놓칩니다. 그래서 이틀 동안 못 잤습니다. 술은 그다음입니다.”

기관장“원인이 둘이군. 순서까지 붙였고.” 기관장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섞였다가 금방 빠졌다. “오늘 밤은 내 목소리를 세라. 내가 말을 멈추면 그때 자면 된다.”

기관장“네 수첩 첫 장에 원인 불명이라고 적혀 있던데, 그건 뭐냐. 갑판에 떨어진 걸 주워 주다가 봤다.”

칼“훈련소 연습 기체 기록에서 배운 겁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들이 망치로 친 기체였는데, 남은 칠 년 치 기록에서 모르는 고장은 전부 원인 불명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첫 장에 적었습니다. 잊어버릴까 봐서가 아니라,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고요.”

기관장“이유가 두 개 붙었군. 하나만 붙여도 된다.” 문 너머에서 짧은 기침 같은 웃음이 났다. “그럼 칠영구삼은 왜 골랐냐.”

칼“외우기 쉬워서요.”

기관장“그건 이유가 안 붙은 대답이다.”

칼“압니다.”

문 너머에서 기관장이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이유가 붙지 않은 대답이라는 것을 서로 알면서 늙은 사내는 더 묻지 않았고, 칼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숫자에 붙은 이유는 그날 밤 문 안쪽에 그대로 남았다.

자정이 지나 기관장의 목소리가 멎었을 때, 칼은 문에 등을 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틀 동안 감기지 않던 눈이었다. 새벽에 깨어 보니 외투 안주머니의 편지는 그대로였고, 문 아래 틈으로 새어 들던 등잔불은 꺼져 있었다. 복도에서 사람이 앉은 채로 자는 숨소리가 났다. 칼은 일어나서 침대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다시 등을 붙이고 앉았다. 나무 문 너머에서 전해 오는 숨소리의 박자를 그는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세었고, 해가 들 무렵 그 박자가 바뀌어 늙은 사내가 깨어나는 것까지 들었다.

VIII · 사흘째 아침

사흘 동안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잠겨 있지도 않았다. 둘째 날 아침 칼이 안에서 고리를 풀어 두었고, 기관장은 그것을 알면서도 문을 열지 않았다. 빵은 하루 두 번 문 앞에 놓였다. 저녁이면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아 문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칼의 말은 날마다 조금씩 길어졌고, 길어진 만큼 술병은 줄었다.

기관장“오늘은 문을 왜 안 잠갔냐.” 둘째 날 저녁 기관장이 물었다.

칼“잠글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화낼 사람이 없어서 잠근 거였는데, 문 밖에 화낼 만한 사람이 앉아 있으니까요.”

기관장“그건 이유가 붙은 농담이군.” 기관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날 밤에도 문을 열지는 않았다. “농담에 이유를 붙이는 놈은 처음 본다.”

칼“이유가 없으면 안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농담도 말이니까요.”

기관장“그럼 내일 아침엔 문 열어 놓고 기다려라. 문 열린 이유는 안 물으마.”

그날 낮에는 갈고리가 계단을 올라왔다가 복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 너머와 문 안쪽에서 두 사람이 번갈아 말하는 소리를 한동안 듣고 나서, 갈고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로 내려갔다. 그날 저녁 선장에게 그가 전한 말은 짧았다고 칼은 나중에 들었다. 둘이서 무슨 기계를 고치는 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밤 칼은 문 너머에서 이어지는 기관장의 목소리를 세다가 잠들었다. 늙은 사내는 고철선을 타기 전에 탔던 배들의 이름 대신 기관의 크기와 소리를 차례로 늘어놓았고, 목소리가 멎었을 때 칼은 이미 깨어 있지 않았다.

사흘째 아침 기관장이 문을 두드렸고, 이번에는 칼이 대답했다. 문이 열리자 기관장은 문지방 너머에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사흘 동안 의자에서 잔 사람답게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기관장“손 줘 봐.”

칼은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들은 곳은 훈련소 식당의 긴 탁자였고, 그때 그 말을 한 사람은 손등의 줄을 비누로 문질렀다. 기관장은 문지르지 않았다. 칼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아래에서 받친 채 한참 들고 있었다.

기관장“떨리나. 안 떨리네.” 기관장이 칼의 손을 아침 볕 쪽으로 든 채로 말했다. “그럼 나머지 반쪽 대답을 하마. 네 어머니는 죽은 거고 너는 닫힌 거다. 그 둘을 구별하는 게 정비공 첫 번째 일이다. 닫힌 건 연다. 네 코드는 네가 넣었으니 여는 것도 너다.”

칼“그 말에도 이유가 붙어 있습니까.”

기관장“붙어 있다. 사흘 동안 네가 한 말이 이유다.” 기관장은 칼의 손을 놓고 셔츠 주머니에서 보리빵을 꺼내 반으로 갈랐다. “먹어라. 오늘 오후에 방파제 기체를 닫는다.”

칼은 빵을 받아 문지방에 걸터앉은 채로 먹었다. 기관장은 의자에 다시 앉아 자기 몫을 먹었다. 사흘 동안 문 하나를 사이에 두었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문지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빵을 씹었다. 다 먹고 나서 칼이 손바닥의 부스러기를 털었다.

칼“합리적이군.”

기관장“그건 내 말이다.” 기관장이 파이프를 꺼내다 말고 칼을 보았다. “이유는.”

칼“빵이 둘로 갈라졌고, 둘이 먹었고, 남은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합리적입니다.”

기관장“이유가 붙었군.” 기관장은 웃지 않았지만 파이프를 꺼내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그 말은 빌려 가라. 외투하고 같이.”

칼“외투도 돌려드릴 때는 이유를 붙이겠습니다.”

기관장“그땐 이유가 꽤 길어야 할 거다.” 기관장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일어났다. “짧으면 안 받는다.”

그날 오후 칼은 방파제 끝에서 양식장 기체의 기록판을 먼저 읽었다. 압력관 줄도 덧쓴 줄도 없었다. 기관장은 이번에는 의자 없이 방파제 돌에 걸터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칼이 입력판에 손을 가져가자 늙은 사내가 한마디를 던졌다.

기관장“이번엔 이유를 붙여서 닫아 봐라. 들을 놈은 저 기체밖에 없지만.”

칼은 잠깐 기관장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기체 쪽을 보았다. 그물 없는 그물을 걷던 남은 팔이 바람 속에서 느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등록자가 없고, 폭풍에 떠밀려 왔고, 팔 하나가 꺾였다. 내일 아침이면 배가 와서 뜯는다. 뜯기 전에 네가 하던 일을 끝내 주려고 닫는다.”

철인“정지 코드를 확인합니다, 등록 정비공 오르벡. 작업 종료를 확인합니다.”

기체는 눈을 껐다. 이유를 들은 기계와 듣지 않은 기계가 다르게 꺼지는 것은 아니었다. 칼도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 말은 기계보다는 자기 귀에 들려준 말에 가까웠다. 그는 손을 씻고 정비 수첩에 그날의 줄을 적었다. 날짜와 장소와 기체가 하던 일, 그리고 작업 종료 확인. 그 아래에 처음으로 한 줄을 더 붙였다. 다시 열 수 있음, 뜯기 전까지.

갈고리“다시 열 수 있음? 저녁이면 뜯을 걸 그건 왜 적냐.” 며칠 뒤 갈고리가 칼의 수첩을 넘겨다보며 물었다.

칼“뜯기 전까지는 사실이니까. 사실인 걸 안 적을 이유가 없다.”

갈고리“쓸데없는 버릇이네, 닫는 양반.”

칼“쓸데없는 게 아니라 아직 쓸 데가 안 나온 거다.”

그 줄은 그 뒤로 두 해 동안 수첩의 모든 기체 아래에 붙었다. 뜯기 전까지라는 말은 한 번도 다른 결말을 낳지 않았지만 칼은 그 줄을 빼지 않았다. 대답에 이유가 붙어 있었으므로 갈고리도 더는 놀리지 않았고, 회색 외투는 그 두 해 동안에도 여전히 빌린 외투였다.

제0부 3장

열어 둔 문

스물여섯 · 늦여름 · 물에 잠긴 마을

아래로 ↓

I · 물에 잠긴 마을

밤바다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그 일 뒤로 칼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기체를 닫기 전에 손바닥을 펴서 눈높이로 들고, 열을 셀 동안 손끝을 본다. 떨림이 없으면 입력판으로 가고, 있으면 담배를 한 대 태운 뒤 처음부터 다시 센다. 선원들은 그것을 오르벡이 손금을 본다고 놀렸고 칼은 굳이 고쳐 주지 않았다. 기분이 손에 묻으면 기계가 먼저 안다는 것을 그는 이 년 전 어두운 갑판에서 손가락 끝으로 배웠고, 손가락으로 배운 것은 말로 옮기면 늘 조금씩 틀어졌다.

기관장“오늘도 손금 보냐. 그 손에 무슨 팔자가 적혀 있다고.”

칼“팔자는 안 적혀 있다. 떨리는지 안 떨리는지가 적혀 있을 뿐이고, 하루 일에는 그거면 된다.”

하숙방 문 너머에서 사흘 동안 들은 이야기 가운데 칼이 끝까지 들고 나온 것은 귀 이야기 하나였다. 누군가 고장 원인 칸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적었고, 다음 사람은 그 칸을 믿고 닫지 않은 기체에 톱을 댔고, 가슴판이 터지면서 기관장의 한쪽 귀가 어두워졌다. 그 뒤로 칼의 수첩에는 빈칸이 많아졌다. 아는 것만 적고 모르는 칸은 비워 두었으며, 닫지 않은 쇠에 톱이 먼저 닿는 것은 한 번도 그냥 두지 않았다.

저울“오르벡 수첩은 반이 빈칸이야. 선주가 보면 일을 반만 한 줄 알겠어.”

칼“반만 아는 걸 다 안다고 적는 것보다는 낫다. 빈칸은 아무도 안 죽인다.”

문을 사이에 두고 사흘을 이야기한 뒤로 칼의 말은 길어졌다. 말에 이유를 붙이라는 것이 그 사흘의 결론이었고, 칼은 그 말을 공구처럼 받아 썼다. 닫는다고만 하지 않고 왜 닫는지를 말했고, 못 한다고만 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못 하는지를 말했다. 선원들은 처음에는 웃다가 나중에는 오르벡에게 일을 물을 때 시간을 넉넉히 잡았다. 그 긴 말을 끝까지 듣는 사람은 기관장 하나였고, 그는 들을 때마다 어두운 귀가 아니라 밝은 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울“오르벡한테 몇 시냐고 물으면 시계가 왜 그 시각을 가리키는지까지 듣는다니까.”

칼“시계는 틀릴 수 있으니까. 틀린 시계를 믿고 물때를 놓치면 손해 보는 건 네 몫이다.”

고철선이 그 마을의 만으로 들어선 것은 늦여름 오후였다. 지난해 가을 초입에 폭풍으로 둑이 터진 뒤로 마을의 아랫동네는 물이 빠지지 않았고, 지붕들만 물 위에 줄을 맞추어 남아 있었다. 골목이었던 자리는 물길이 되었고, 물길 양쪽으로 반쯤 잠긴 창틀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녹 냄새가 짙었다. 바닷물에 일 년을 잠긴 쇠는 붉은 것을 지나 거의 검은색이 되는데, 그 검은 녹이 물결이 닿는 높이마다 띠를 두르고 있었다.

저울“저기 굴뚝에 하얀 글씨 보이지? 구조선이 지나간 표시다.” 뱃머리에서 저울이 상앗대 끝으로 지붕들을 가리켰다. 선원들이 그를 저울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보든 값부터 달았기 때문이다. 갈고리는 지난겨울 토치째 다른 배로 옮겨 갔고, 톱은 저울이 잡았다. “날짜가 있고 숫자가 있으면 그 집에서 사람을 데려갔다는 뜻이야. 아무것도 없는 굴뚝은 데려갈 사람이 없던 집이고.”

칼“아무것도 없는 굴뚝이 많군.”

저울“그러니까 우리가 오지. 사람이 안 남은 마을의 쇠는 주인이 없어. 저 기중기 팔 하나면 석 달 치 담뱃값이고, 저 양수기 몸통은 반년 치다. 물 먹은 깡통도 무게는 무게니까.”

칼“데려간 사람은 어디로 가나.”

저울“고개 너머 고지 수용소. 친척 있는 사람은 친척한테 가고, 없는 사람은 거기 눌러앉고. 가끔 구조선 얻어 타고 제 집에 물건 챙기러 오는 사람도 있다더라. 챙길 게 남아 있으면 말이지.”

칼은 값을 세지 않고 기체를 셌다. 둑 근처에서 팔을 놀리는 양수 기체가 하나, 부두 끝에 짐을 내려놓은 채 선 짐 기체가 하나, 물길 중간에 옆으로 누운 것이 하나였다. 서 있는 것은 눈에 불이 켜져 있었고 누운 것은 꺼져 있었다. 누운 기계는 바닷물이 가슴판까지 먹었으니 닫을 것도 없다. 닫는 사람의 일은 서 있는 것, 눈이 켜진 것에서 시작한다.

선장“오르벡, 몇 기냐.” 선장은 키를 잡은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칼“서 있는 게 둘, 누운 게 하나다. 누운 건 물이 먹었으니 그냥 뜯으면 된다. 서 있는 둘은 눈이 켜져 있으니 하나씩 닫아야 하고, 물길 안쪽에 더 있을지 모르니 하나 더 잡아 두는 게 맞다. 하루에 하나씩이면 사흘이다.”

선장“이틀에 해라. 물때가 안 좋다.”

칼“이틀이면 하나는 밤에 닫아야 한다. 밤에 닫으면 관절을 못 보고, 관절을 못 보고 톱을 대면 톱날이 튄다. 튄 톱날 값까지 치면 사흘이 싸다.”

선장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는 것이 그의 허락이었다. 칼은 외투 깃을 세웠다. 어깨가 한 치쯤 남는 회색 외투였고 소매는 반대로 손목에서 한 치쯤 모자랐다. 기관장의 것이었다. 빌려 입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기관장은 돌려 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칼은 돌려주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둘 다 그 외투가 지금 누구 것인지 정하지 않는 쪽을 편하게 여겼다.

기관장“소매 걷어라. 소금물 먹이면 네가 아니라 내 외투가 운다.” 기관장이 기관실 승강구에서 반쯤 몸을 내밀고 말했다. 그는 누구와 말하든 밝은 쪽 귀를 상대에게 두고 섰다.

칼“빌린 물건에 소금물을 먹이면 이자가 붙지. 이자는 말려서 갚겠다.”

기관장“말린 이자는 육십 평생 처음 듣는다. 그거 어디 가서 쓰지 마라. 선장이 배울라.”

마을은 조용했다. 칼이 자란 부두에서는 밤새 하역기 쇠사슬이 돌았고, 그 소리가 없는 밤은 그에게 잠이 늦게 오는 밤이었다. 이 만에는 쇠사슬도 하역기도 없었다. 물이 처마 밑을 핥는 소리와 둑 근처의 양수 기체가 팔을 올렸다 내리는 소리가 전부였는데, 그 둘은 같은 박자로 들리다가 조금씩 어긋났다.

저울“오르벡은 또 기체만 세지. 값은 안 세고.”

칼“값은 네가 세니까 두 번 셀 필요가 없다. 기체는 아무도 안 세니까 내가 센다. 한 배에 세는 놈이 둘 있으면 하나는 다른 걸 세야 셈이 맞는다.”

작은 배 두 척이 물길로 내려졌고 칼은 앞 배에 탔다. 닫는 사람은 늘 앞 배에 탄다. 톱보다 먼저 기계에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칼은 노를 잡은 선원 등 뒤에 앉아 물에 잠긴 창들을 하나씩 지나쳤는데, 창마다 안쪽으로 물에 뜬 의자와 바구니와 문짝이 떨어져 나간 찬장이 보였다. 배가 마지막 골목으로 꺾어 들자 물길 끝에 이층집 한 채가 나타났다. 다른 집들보다 땅이 조금 높은 자리라서 이층 창은 물 위에 다 나와 있었고, 아래층은 문틀 중간까지 잠겨 있었다. 굴뚝에도 흰 글씨가 있었지만 바다 쪽 면이라 물길에서는 붓 끝이 지나간 자리만 보였다. 그 집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열린 문 안쪽에 기체 하나가 서 있었다.

II · 문지기

기체는 문틀 안쪽에 등을 붙이고 서서 왼팔로 문짝을 벽 쪽으로 밀어 두고 있었다. 물은 기체의 허리를 넘어 가슴판 아래까지 와 있었고, 물이 빠지는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문짝이 닫히는 쪽으로 끌려갔다가 기체의 손바닥에 걸려 멈추었다. 문짝 가장자리의 칠은 손바닥이 닿는 자리만 벗겨져 있었다. 손가락 네 개가 들어갈 만큼 나무가 패어 있었는데, 그것은 물이 들고 날 때마다 손이 아주 조금 미끄러졌다가 다시 잡은 자국이었다. 일 년 동안 하루 두 번씩이라면 칠백 번이 넘는다.

저울“문지기네.” 뒤 배에서 저울이 웃었다. “집이 통째로 물에 잠겼는데 문을 지키고 있어. 도둑이 헤엄쳐 올까 봐.”

기체의 눈은 켜져 있었다. 칼이 탄 배가 다가가는 동안 그 눈은 배를 보지 않고 배 너머의 물길을 보았다. 노가 물을 칠 때마다 눈의 초점이 소리 나는 쪽으로 조금 옮겨 갔다가 돌아왔다. 고장 난 기체의 눈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망을 보는 기체의 눈이 그렇게 움직인다.

칼“들리나.” 칼은 배를 문간에 붙이고 물에 잠긴 계단으로 발을 내렸다. 물이 허벅지를 지나 허리까지 올라왔다.

기체“들립니다.”

칼“어느 집 기체냐.”

기체“이 집의 기체입니다. 등록자는 한 명입니다.”

칼“등록자는 어디 있나.”

기체“응답이 없습니다. 삼백오십이 일째 응답이 없습니다.”

칼“문은 왜 잡고 있지.”

기체“명령입니다. 명령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은 문틀을 보았다. 기체의 어깨 옆, 물 위로 나온 문설주에 칼끝으로 그은 가는 금이 여러 줄 있었다. 금마다 옆에 작은 숫자가 적혀 있었고 숫자는 위로 갈수록 컸다. 아이의 키를 잰 자국이었다. 맨 위의 금은 칼의 가슴께에 있었고, 그 위로는 나뭇결뿐이었다.

저울“애 기다리는 거네.” 저울이 뒤 배에서 고개를 빼고 문설주를 보더니 말했다. “엄마가 애 올 때까지 문 열어 두라고 했겠지. 엄마는 물에 갔고 애는 어디 갔는지 모르고. 일 년째 이러고 있으면 그게 고장이지 뭐야.”

칼“그건 네 추측이다. 저 기계가 무슨 문장을 받았는지는 저 기계만 안다.” 칼은 기체의 왼팔 관절에 손을 얹었다. 쇠는 물보다 차가웠다. “그리고 고장은 아니다. 명령이 남아 있는 기계는 명령이 끝날 때까지 선다. 등록자가 대답을 안 한다고 명령이 같이 끝나지는 않는다. 저것들 규칙이 그렇게 생겼다.”

저울“그럼 시키면 되잖아. 야, 문 놔라.” 저울이 상앗대 끝으로 기체의 어깨를 두드렸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물 위로 납작하게 퍼졌다.

기체“등록자가 아닙니다. 명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울“그럼 이건 받냐?” 저울은 상앗대를 거꾸로 쥐고 밑동으로 기체의 가슴판을 한 번 쳤다. 기체는 피하지 않았고, 눈도 저울 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칼“그만해라.” 칼은 상앗대를 손으로 잡아 내렸다. 세게 잡지도 약하게 잡지도 않았는데 저울은 더 들지 않았다. “저건 맞아도 안 피한다. 사람을 밀어낼 수 없게 생긴 물건이다. 안 피하는 걸 치는 건 일이 아니고, 네 상앗대만 휜다.”

저울은 상앗대를 받아 뱃바닥에 내려놓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두 해를 같은 배에서 지내면서 저울은 오르벡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손을 쓰면 그쪽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칼“문짝을 놓으면 어떻게 되나.” 칼은 상앗대를 저울의 배 쪽으로 밀어 돌려준 뒤 기체에게 물었다.

기체“물이 빠질 때 닫힙니다. 이 문은 안쪽으로 열리고, 물은 바깥으로 나갑니다.”

칼은 기체의 가슴판 위쪽에 붙은 등록판의 녹을 엄지로 밀었다. 번호 아래에 등록자 칸이 하나 있었고, 칸 안의 글자는 물에 불어 읽히지 않았다. 읽혔다 해도 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등록자의 이름을 안다고 등록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장“규칙이 어떻게 생겼든 팔 관절이 멀쩡하잖나.” 선장이 뒤 배의 뱃전에 한 발을 올리고 기체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저 팔 하나가 나머지 둘보다 비싸겠어. 오르벡, 저것부터 해라.”

칼은 관절을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팔꿈치는 멀쩡했으나 손목 바깥쪽에 머리카락 굵기의 금이 비스듬히 가 있었다. 금 둘레에 녹이 피지 않은 것을 보면 물속에서 생긴 금이 아니라 물 위에서, 문짝이 크게 끌려간 어느 날 생긴 금이었다. 이 기체는 그날도 손을 바꿔 잡지 않았다. 닫는 사람의 수첩에는 그런 것을 적을 칸이 없었다.

칼“그날 문짝이 얼마나 끌려갔나.”

기체“닫히지 않았습니다.”

칼“얼마나 끌려갔는지를 물었다. 닫혔는지는 안 물었다.”

기체“닫히지 않았습니다. 그 밖의 값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칼은 거기서 질문을 접었다. 기록하지 않은 값은 몇 번을 물어도 나오지 않는다.

저울“지금 바로 뜯읍시다. 해 떨어지기 전에 팔 하나는 떼겠는데.”

칼“지금은 안 된다. 물이 깊다. 물속에서 톱질을 하면 톱날이 물을 먹고 튀고, 튄 톱날은 사람 손목부터 찾는다. 물이 다 빠진 아침에 해야 관절이 물 밖으로 나오고 네 손목도 남는다.”

저울“내 손목 걱정을 다 해 주고, 오르벡 많이 컸네.”

칼“네 손목 걱정이 아니라 톱 걱정이다. 네 손목에서 튄 톱이 물에 빠지면 그 값은 내 몫에서 나간다.”

선원들이 웃었고, 기체는 웃음소리가 난 배 쪽이 아니라 물길 쪽을 보았다. 웃음소리도 물길에서 난 소리 가운데 하나로 따지는 눈치였다. 칼은 그 눈을 따라 물길 끝을 보았다. 물에 잠긴 골목이 바다 반대쪽으로 곧게 뻗어 있었고, 그 끝에서 땅이 다시 솟아 언덕이 되었고, 언덕 위에 종이 매달린 낮은 건물 하나가 물 밖에 남아 있었다. 이 문간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거기였다.

그날 오후 칼은 둑 쪽 양수 기체와 부두 끝의 짐 기체를 차례로 보러 갔다. 양수 기체는 등록자 없이 일 년째 물을 퍼내고 있었고, 짐 기체는 마지막으로 받은 짐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다음 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명령이 남아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은 닫는 사람의 일이 아니었고, 그날까지 칼은 그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III · 밤물

해가 지자 선장은 고철선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내일 아침 썰물에 뜯는다, 해 뜨기 전에 닫아 둬라, 문지기 하나 때문에 물때를 놓치면 그 하루 값은 오르벡의 몫에서 나간다. 칼은 대답 대신 작은 배를 현관 기둥에 묶고, 물에 잠긴 현관 계단의 셋째 칸에 걸터앉았다. 물이 무릎 위까지 왔다.

선장“기계 옆에서 밤을 새우는 닫는 사람은 처음 본다.” 선장이 노 젓는 선원 너머로 소리쳤다.

칼“물때마다 관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 둬야 아침에 톱이 안 튄다. 일이다.”

어두워진 뒤에 기관장이 혼자 노를 저어 왔다. 뱃바닥에 등 하나와 빵 반 덩이가 실려 있었다. 그는 노를 거두고 배를 칼의 배 옆에 대더니 등을 현관 기둥의 못에 걸었다. 등불이 물 위에 동그란 자리를 하나 만들었고, 기체의 눈이 그 불빛을 한 번 보고 다시 물길로 돌아갔다.

기관장“먹어라. 닫을 기계 옆에서 밤새우는 놈은 배가 고파야 정상이다.”

칼“배는 고프다. 그게 정상인지는 닫는 사람 교본에 안 나와 있어서 모르겠다.” 칼은 빵을 받아 반으로 갈랐다. 반은 그 자리에서 먹고 반은 배 바닥의 기름 천에 싸 두었다.

기관장“그 반은 누구 거냐.”

칼“아침 거다. 아침에 손이 무거우면 먹으려고.”

기관장“닫는 사람이 닫을 기계 옆에서 밤을 새우면 아침에 손이 무거워진다. 그걸 알면서 앉아 있는 거냐.” 기관장은 밝은 귀를 칼 쪽으로 돌렸다. “손 줘 봐라.” 칼이 손을 내밀자 기관장은 등불에 비추어 손끝을 보았다. “안 떨리네. 오늘은 좀 떨려야 정상인데.”“이 귀가 어떻게 어두워졌는지 너는 안다. 닫지 않은 쇠에 톱을 대서 그랬다. 그러니 아침에는 닫아야 한다. 그건 네 일이고 내 귀 일이다.”“이유를 붙여 봐라. 네가 이 밤에 여기 앉아 있는 이유. 길어도 들어 주마.”

칼“아침에 닫을 거다. 그 전에 저게 무엇을 하는 기계인지는 알고 닫겠다. 모르는 채로 닫으면 수첩 원인 칸에 쓸 말이 없다.”

기관장“원인 칸은 비워도 된다고 가르친 게 누구더라.”

칼“비워도 되는 거지, 비우고 싶은 건 아니다.”

기관장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노를 다시 잡았다. 배가 등불의 동그란 자리를 벗어날 때 그는 한 번 돌아보았는데, 칼이 아니라 문간의 기체를 보았다. 사십 년 동안 기계를 뜯어 먹고 산 사람이 뜯을 기계를 돌아보는 일은 드물었다.

칼은 기름 천에 싼 빵을 한 번 만져 보고 그대로 두었다. 등불의 기름이 줄어드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불꽃이 조금씩 낮아졌고, 그는 그 낮아지는 속도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을 셈했다. 시계가 없으면 정비공은 줄어드는 것으로 시간을 잰다.

밤이 깊어지자 밀물이 들어왔다. 물은 칼의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왔고, 왼쪽 무릎이 찬물 속에서 먼저 욱신거렸다. 열한 살 장마 밤에 배수로 사다리 쇠 칸에 찍힌 자리였다. 그 무릎은 그 뒤로 찬물에 들어갈 때마다 날씨보다 먼저 그 밤을 꺼냈고, 칼은 꺼내지는 것을 막지 않는 대신 오래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물속에서 아이를 들어 올린 쇠팔이 있었고, 그 팔이 아이를 내려놓은 문이 있었다. 그 문까지가 그가 기억하기로 정한 범위였다.

기체는 밀물에는 힘을 덜 썼다. 들어오는 물은 문짝을 벽 쪽으로 밀어 주었고, 그동안 손가락 마디는 홈 안에서 쉬듯이 느슨해졌다. 칼은 등불을 들어 손목의 금을 비추었다. 금은 낮보다 벌어져 있지 않았다. 물이 빠질 때마다 벌어지고 들어올 때마다 다물리는 금이었다.

칼“손목에 금이 갔다. 언제 생겼나.”

기체“이백십사 일 전, 겨울 폭풍이 있던 밤에 생겼습니다. 문짝이 크게 끌려갔습니다.”

칼“그날 오른손으로 바꿔 잡았으면 금이 안 갔다. 오른팔은 멀쩡하다. 왜 안 바꿨나.”

기체“바꾸는 동안 문이 한 뼘 닫힙니다. 문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칼“한 뼘 닫혀도 문은 열린 거다. 사람은 그렇게 센다.”

기체“명령은 열린 문의 폭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정해지지 않은 것은 가장 넓게 둡니다.”

칼“합리적이군.” 칼은 그렇게만 말하고 등불을 내려놓았다. 정해지지 않은 자리를 가장 넓게 채우는 기계는 교본에 없었지만, 교본이 모든 기계를 다 적었다고 믿는 정비공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는 질문을 하나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원인을 묻는 데까지가 닫는 사람의 일이었고, 그 너머의 질문은 묻고 나면 닫기가 어려워지는 종류였다.

칼은 허리춤의 기름통을 꺼내 손목의 금 둘레에 기름을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닫을 기계에 기름을 치는 닫는 사람은 없었고, 칼도 그 일에 붙일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다. 금이 벌어졌다 다물릴 때 나던 마른 쇳소리가 기름을 먹고 조금 낮아졌다. 기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는 것은 그 기계의 일이 아니었다.

자정이 지나 고깃배 한 척이 만 바깥을 지나갔다. 엔진 소리가 물을 건너 골목까지 왔고, 기체의 고개가 그쪽으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돌았다. 소리가 멀어지자 고개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칼“방금 왜 고개를 돌렸나.”

기체“물길에서 소리가 나서 그쪽을 확인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칼“그런 확인을 하루에 몇 번 하나.”

기체“평균 마흔한 번입니다. 갈매기가 많은 날은 그보다 많습니다.”

칼“그럼 일 년이면 만 사천 번이 넘는군.” 칼은 셈을 입 밖에 내고 나서 그 셈이 아무 데도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 맞은 건 몇 번이냐.”

기체“없습니다.”

칼은 더 묻지 않았다. 만 사천 번 가운데 맞은 것이 없다는 대답은 원인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고, 그런 대답을 들은 뒤에 이어 물을 말을 닫는 사람의 교본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문짝이 다시 닫히는 쪽으로 끌려가며 기체의 손바닥을 밀었다. 칼은 기지개를 켜다가 이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덧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다른 창들은 폭풍에 덧문이 떨어져 나갔거나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는데, 그 창만 바깥으로 활짝 젖혀진 채 고리에 걸려 있었다. 창틀 아래 벽에는 밧줄이 쓸고 간 듯한 밝은 자국이 한 줄 나 있었다. 칼은 그 자국이 새것이라는 것을 정비공의 눈으로 알았고, 무엇의 자국인지는 정비공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눈을 내렸다.

그는 무릎을 물에서 빼고 바닷물에 손을 씻었다. 기체를 닫은 뒤에 씻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는데, 그날은 순서가 바뀌었다. 손등의 검은 줄은 물에 씻겨 나가지 않았다. 열일곱 살 이후로 한 번도 씻겨 나간 적이 없는 줄이었다.

IV · 입력판

아침 썰물에 물은 기체의 허벅지까지 내려가 있었다. 고철선에서 작은 배 세 척이 내려왔고, 가운데 배에 톱과 쇠사슬과 도르래가 실려 있었다. 저울은 톱날에 기름을 먹이며 휘파람을 불었고, 선장은 맨 뒤 배에 서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넣었다 했다. 물이 다시 들어오기까지 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칼은 밤새 앉아 있던 계단에서 일어나 무릎을 몇 번 굽혔다 폈다. 무릎은 밤새 물에 있던 값을 아직 다 받지 않았다는 듯 둔하게 버텼고, 그는 그것을 작업 지장 없음으로 분류했다. 기름 천에 싼 빵은 배 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손이 무거운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선장“오르벡, 닫아라. 물때 놓치면 오늘 값은 네 몫이다.”

칼“닫는다. 톱은 내가 닫았다고 말하기 전에는 대지 마라.” 칼은 뒤돌아보지 않고 덧붙였다. “닫히기 전의 쇠에 톱을 대면 무슨 일이 나는지는 이 배에서 귀 하나가 이미 증명했다.” 맨 뒤 배의 기관장은 밝은 귀를 이쪽으로 두고 듣고만 있었다.저울은 대답 대신 톱날을 뱃전에 걸쳐 두었다. 닫는 사람이 닫았다고 말하기 전에 톱을 든 선원은 이 배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다.

저울“손목에서 기름 냄새가 나네.” 저울이 기체 쪽으로 코를 대 보더니 칼을 보았다. “뜯을 놈한테 기름 친 거냐? 오르벡, 손이 무거우면 선장 코드로 대신 눌러 줄 수도 있어. 선장 코드로 눌러도 닫히는 건 똑같이 닫히니까.”

칼“닫는 건 내 일이다. 내 일을 남의 코드로 하면 수첩에 남의 이름이 남는다. 그 줄은 내가 적는다.”

선장“누구 이름이 남든 상관없다. 물때 안에만 끝내라. 등록자 없는 쇠는 법이 주인을 정하고, 이 만에서 법이 정한 주인은 이 배다. 그건 오르벡도 알 거다.”

칼“안다. 법은 주인을 정하지 명령을 끝내 주지는 않는다는 것도 안다.”

문간 안쪽은 어두웠다. 아래층 방에는 물이 허리까지 차 있었고, 물 위에 의자 다리 하나와 나무 숟가락 몇 개가 떠서 썰물을 따라 문 쪽으로 천천히 밀려 나왔다. 숟가락들은 기체의 다리에 걸려 거기서 멈추었다. 일 년 동안 이 문간을 지나 바다로 나간 것과 나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기체는 그중 어느 것도 세지 않았을 것이다. 기체가 세는 것은 물길에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선원들은 기체의 허리에 감을 쇠사슬을 미리 풀어 물에 늘어뜨렸고, 도르래를 걸 자리를 찾느라 현관 기둥을 두드렸다. 기둥은 썩지 않았다. 일 년 동안 물에 잠겨서도 버틴 것은 기둥이 좋은 나무여서였고, 문짝이 버틴 것은 그 문짝을 붙든 손 때문이었다. 칼은 외투 소매를 두 번 걷어 올렸다. 기관장의 말대로 외투가 우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맨 뒤에는 기관장이 혼자 작은 배를 저어 따라와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맡지 않았고, 노를 무릎에 걸쳐 놓은 채 문간을 보았다. 기관장이 일 없이 작업 배를 따라 나오는 것은 칼이 이 배에 탄 뒤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가 언제였는지 칼은 기억했지만 떠올리지 않았다.

칼은 기체의 가슴판 아래 덮개를 열었다. 입력판은 손바닥만 했고, 숫자 단추 열 개가 녹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닫는 사람의 코드는 견습 때 하나를 골라 평생 쓰는 것이었다. 칼의 네 자리는 칠, 영, 구, 삼이었고, 그는 그 네 자리를 지난 일곱 해 동안 이백 번 남짓 눌렀다. 누를 때마다 기계는 작업 종료를 확인한다는 같은 말을 했고, 그 말이 끝나면 눈이 꺼졌다.

기체“입력판이 열렸습니다. 정지 코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칼이 아니라 물길에 두고 있었다. “명령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은 손바닥을 펴서 눈높이로 들고 열을 셌다. 손끝은 떨리지 않았는데, 떨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에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칼은 허리춤의 수첩을 꺼내 어제 날짜의 원인 칸을 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칸이었고, 밤을 새우고도 적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칼은 닫는 이유를 입속으로 한 번 말해 보았다. 등록자가 없다, 마을에 사람이 없다, 이 배는 고철선이다. 이유는 셋이었고 셋 다 참이었는데, 붙여 놓고 보니 어느 것도 이 기계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을 입력판 위에 올렸다.

기체의 눈 유리는 소금기가 말라 붙어 뿌옜고, 그 뿌연 유리 위에 물길 끝이 작게 비쳐 있었다. 물에 잠긴 골목과 다시 솟은 땅과 언덕 위의 낮은 건물까지 다 들어 있었다. 칼이 입력판에 얼굴을 가까이 대자 그 작은 풍경 한쪽에 자기 어깨가 끼어들었다. 기체는 초점을 옮기지 않았다. 사람의 어깨는 물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손가락 아래에 네 자리가 있었다. 등 뒤 한 걸음 거리에 저울의 톱이 있었고, 그 한 걸음은 지금 칼의 몸이 서 있는 자리였다. 눈앞에는 기체의 소리 구멍이 있었다. 명령은 받지 않아도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는 구멍이었고, 칼은 어젯밤 그 구멍에 원인만 물었다. 칼은 그 셋을 한꺼번에 보았다. 정비공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정비공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정비공이 일곱 해 동안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칼은 그 셋 가운데 어느 것도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오래 쳐다보면 셋 다 이유가 생기고, 이유가 생긴 것들 사이에서 고르는 일은 정비공이 배운 적 없는 일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고장 난 곳을 찾는 일이었는데, 지금 이 문간에서 고장 난 곳은 기계 쪽이 아닐지도 몰랐다.

칼“닫으면 너는 확인을 하든 못 하든 꺼진다. 그건 알고 있어라.” 칼은 입력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닫기 전에 기계에게 무슨 말을 해 본 것은 일곱 해 동안 처음이었다.

기체“압니다. 명령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울“오르벡, 뭐 해? 물 들어온다.”

기체“물길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기체의 고개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돌았다가 돌아왔다. “확인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숫자

V · 네 자리

칼은 눌렀다. 칠에서 단추가 딸깍 들어갔고, 영에서 기체의 가슴 안쪽 어딘가가 낮게 울렸고, 구에서 눈의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삼을 누르자 입력판의 녹 사이로 초록 불이 하나 켜졌다. 일곱 해 동안 이백 번 남짓 본 불이었다.

기체“정지 코드 칠영구삼을 받았습니다. 작업을 종료합니다.”

칼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백 번 남짓 들은 말이었고, 그 말이 나와야 눈이 꺼졌다. 기체는 그 말 대신 잠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 잠깐 동안에도 눈은 물길을 보고 있었다.

기체“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꺼졌다. 불빛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한 번에 꺼졌고, 꺼진 뒤에도 고개는 물길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왼팔의 관절에서 압력이 빠지는 소리가 길게 났다. 썰물이 바다 쪽으로 물을 끌고 나가며 문짝을 당겼고, 일 년 동안 손바닥에 걸려 멈추던 문짝이 그 손바닥을 밀어내고 천천히 돌았다. 경첩이 울었다. 문은 기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문틀에 닿았고, 닿은 채로 멈추었다.

문이 닫히자 문간이 조용해졌다. 저울의 배에서 노가 물을 쳤고, 칼은 버릇처럼 그 소리 쪽을 보았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은 이제 그 문간에서 칼 하나뿐이었다.

맨 뒤 배의 기관장은 노를 무릎에 걸쳐 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들은 것은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 한 마디였을 텐데, 그 한 마디를 밝은 귀로 들었는지 어두운 귀로 들었는지 칼은 알 수 없었다. 기관장은 칼을 부르지 않았고, 칼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저울“닫혔다!” 저울이 톱을 들고 뱃전에서 일어섰다. “오르벡, 문 열어. 안에 있는 걸 꺼내야지.”

닫힌 기계를 꺼내려면 닫힌 문을 다시 열어야 했다. 칼은 문짝의 홈에 손가락을 넣었다. 기체의 손가락 네 개가 일 년 동안 판 홈이어서 칼의 손가락은 헐겁게 들어갔다. 썰물이 문짝을 당기고 있었고 칼은 어깨를 대고 그것을 벽 쪽으로 밀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선원들이 쇠사슬을 기체의 허리에 감고 도르래로 끌어내는 동안 칼은 그 자리에서 문을 열린 채로 잡고 있었다. 사슬이 문간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손을 바꿔 잡지 않았다.

선원“물 먹어서 무겁다. 오르벡, 문 좀 더 열어.”

칼“더 안 열린다. 일 년 동안 이 폭이었으니 이게 끝이다.”

문설주가 그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키를 잰 금들이 외투 너머로 하나씩 느껴졌고, 맨 위의 금은 그의 가슴께에 있었다. 기체가 문간을 빠져나가며 그 금들을 스쳤지만 금은 지워지지 않았다. 칼끝으로 그은 것은 쇠가 스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선장“좋다. 팔은 상한 데 없지?” 선장이 맨 뒤 배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물었다.

칼“손목에 겨울 폭풍 때 생긴 금이 하나 있다. 값은 저울한테 물어라.”

기체는 배 바닥에 눕혀졌다. 눕힌 뒤에도 고개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저울이 그것을 바로 하려고 손으로 밀었지만 목 관절이 그 각도로 굳어 있었다. 일 년 동안 같은 쪽을 본 목이었다. 저울은 두 번 밀어 보다가 그만두고 쇠사슬을 고쳐 감았다.

저울“목이 굳었네. 이것도 값을 깎아야 하나.”

칼“깎지 마라. 굳은 건 고장이 아니라 일한 자국이다. 펴서 쓰면 된다.”

저울“누가 펴서 쓰는데. 이건 고철이야, 오르벡.”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고철선 위에서 할 말이 아니었다.

기체를 실은 배가 물길을 빠져나갈 때 칼은 맨 뒤 배에 앉아 있었다. 배가 집 모퉁이를 돌자 바다 쪽 굴뚝 면이 보였다. 흰 글씨가 세 줄 있었다. 첫 줄은 날짜였는데, 한 달 전이었다. 둘째 줄은 구조선 표시에서 흔히 보는 말이었다. 재방문, 아동 하나 동행, 이층 창으로 출입. 셋째 줄에는 물건 회수라고 적혀 있었다.

칼은 이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바깥으로 젖혀진 덧문과 창틀 아래의 밝은 밧줄 자국이 아침 해를 받고 있었다. 한 달 전 구조선이 아이 하나를 태우고 이 집에 왔고, 아이는 물에 잠긴 현관이 아니라 이층 창으로 들어갔고, 무언가를 챙겨서 같은 창으로 나갔다. 아래층 문간의 기체는 그날도 물길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물길로 오지 않았다.

칼“저울, 물건 챙기러 오는 사람을 구조선이 태워 온다고 했지. 그 배는 집 어디에 대나.”

저울“창이지. 아래층은 다 잠겼으니 이층 창에 대고 밧줄 걸고 넘어가는 거야. 현관에 대는 놈은 없어. 왜?”

칼“알아 둘 게 있어서다. 이미 늦었지만.”

닫힌 기계에게 사실을 말해 줄 방법은 정비공에게도 없었다. 사실은 눈이 켜져 있을 때만 닿고, 눈을 끈 것은 방금 칼의 손가락이었다. 칼은 뱃바닥에 눕힌 기체를 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끝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저울“뭘 그렇게 보냐. 굴뚝 값은 안 쳐 준다.”

칼“굴뚝.” 칼은 그 한 마디만 하고 뱃전 너머로 손을 내려 바닷물에 씻었다. 닫은 뒤에 씻는 버릇이었고, 이번에는 순서대로였다. 바닷물은 차가웠고 손가락 끝에서 기름 냄새가 조금 빠졌다. 검은 줄은 그대로였다.

물길 끝에서 배가 큰 물로 나설 때 칼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이층집의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물에 잠긴 골목의 집들 가운데 문이 제대로 닫힌 집은 그 집 하나였고, 그 문을 닫은 것은 썰물이었고, 썰물에게 그 문을 넘겨준 것은 칼의 손가락이었다.

오후에 칼은 부두 끝의 짐 기체를 닫았다. 칠, 영, 구, 삼을 누르자 기체는 작업 종료를 확인한다고 말했고, 눈이 꺼졌다. 이백 번 남짓 들은 그대로의 말이었는데 그날은 그 말이 끝까지 다 들렸다. 칼은 닫은 뒤에 손을 씻었고, 그날 밤 갑판에서 고철 더미 맨 위에 묶인 문지기의 왼팔 옆을 지나갔다. 손목의 금에서는 아직 그가 친 기름 냄새가 났다.

VI · 원인 칸

이튿날 아침 칼은 둑 근처의 양수 기체 앞에 섰다. 등록자가 없는 기계였고, 일 년 동안 물을 퍼서 바다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퍼낸 물은 둑이 터진 자리로 고스란히 다시 들어왔다. 기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은 박자로 팔을 움직였다. 칼은 입력판 덮개를 열고 손가락을 올렸고, 누르지 않았다.

선장“오르벡.” 선장이 배 위에서 불렀고, 대답이 없자 같은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오르벡, 물때다.”

칼“안 닫는다.” 칼은 덮개를 닫고 배로 돌아와 수첩을 폈다. 칼의 수첩에는 날짜와 기체와 코드와 원인을 적는 칸이 있었고, 어제 날짜의 줄에는 문지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 줄의 원인 칸은 비어 있었다. 칼은 그 아래 줄에 오늘 날짜를 적고, 기체 칸과 코드 칸을 비우고, 원인 칸에 한 문장을 적었다.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기계는 닫지 않는다.

선장“그게 무슨 원인이냐. 기계 원인이 아니라 네 원인이잖나.” 선장이 수첩을 넘겨받아 읽고 콧김을 뿜었다.

칼“맞다. 이 배에서 내가 닫은 기계 가운데 다시 열린 건 하나도 없다. 전부 뜯겼다. 나는 닫는다는 말을 쓰면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걸 어제 알았으니 오늘 원인 칸에 적은 거다.”

선장“닫는 사람이 안 닫으면 이 배에서 네 일은 없다.”

칼“없다. 그래서 다음 항구에서 내린다.”

선장“양수기는 누가 닫고.”

칼“아무도. 저건 아직 일하는 중이다. 퍼낸 물이 다시 들어오는 걸 저 기계가 모른다고 해서 일이 아닌 건 아니다. 뜯고 싶으면 선장이 코드를 누르면 된다. 선장 코드로도 닫힌다.”

선장은 수첩을 칼의 가슴팍에 도로 밀어 넣고 배를 돌렸다. 그날 양수 기체는 닫히지 않았고, 고철선은 짐 기체 하나와 누운 기체 하나와 문지기의 몸을 싣고 만을 떠났다. 선장이 자기 코드를 누르러 둑까지 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은 이유를 칼은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칼은 수첩의 앞장을 넘겼다. 일곱 해 동안 이백 줄 남짓이었고, 줄마다 코드 칸에는 같은 네 자리가 적혀 있었다. 다시 열린 줄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앞장을 덮고 마지막 줄만 펴 둔 채 잠들었다.

다음 항구는 나흘 뒤였다. 그 나흘 동안 칼은 갑판을 닦고 밧줄을 감고 기관실에서 기름을 날랐고, 문지기의 왼팔은 고철 더미 맨 위에 묶여 같은 배를 타고 갔다. 손목의 금은 그대로였다. 칼은 그 팔을 피하지도 않았고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기관장“확인 안 했다고 하더라며.” 이틀째 밤 기관실 앞에서 기관장이 말했다. 저울한테 들었다고 했다. “그 말 처음 들었냐.”

칼“처음이다. 이백 번 남짓 닫았는데 다 확인했다. 확인을 못 한 걸 닫은 건 처음이고, 그게 무엇을 확인 못 한 건지 안 것도 처음이다.”

기관장“굴뚝 말이냐.”

칼“굴뚝이다. 애는 한 달 전에 이층 창으로 왔다 갔다. 저건 그걸 모르고 일 년을 채웠고, 나는 그걸 모르고 닫았다. 둘 다 모르는 건 같은데, 저건 모르면서 서 있었고 나는 모르면서 눌렀다.”

기관장“닫힌 건 연다고 내가 그랬지. 고철선에서 닫힌 걸 다시 연 놈은 없다. 그건 내가 말 안 했다.”

칼“안 해도 이제 안다. 수첩 마지막 줄이 그 말이다.”

기관장은 그 말을 밝은 귀로 들었고, 한동안 기관실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칼에게 한 개비 건네고 자기도 하나 물었다. 둘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로 엔진 소리를 들었다. 기관실 앞에서는 불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이 배의 규칙이었고, 그 규칙을 어긴 사람은 사십 년 동안 없었다.

항구에 닿은 날 기관장이 부두까지 따라 내려왔다. 북쪽으로 가는 짐배가 저녁에 떠난다고 했고, 칼의 짐은 자루 하나였다. 칼은 자루 맨 위에 수첩을 넣었다. 기관장은 부두 말뚝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칼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기관장“안 떨리네.”

칼“안 떨린다. 떨려서 내리는 게 아니다.”

기관장“안다. 떨리는 손은 수첩에 그런 문장을 못 쓴다.” 기관장은 칼의 손을 놓고 칼이 입은 회색 외투의 깃을 잡아 바로 세웠다. “이건 가져가라. 돌려받을 생각이었으면 진작 달라고 했다.”

칼“이자는.”

기관장“말려서 갚는다며. 그럼 젖은 외투를 널어 말릴 데부터 찾아야지. 한 군데에 오래 있어 봐라.”

선장“양수기는 결국 아무도 안 닫았다.” 배다리를 내려가는 칼의 등에 대고 선장이 말했다. “다음 철에 가면 아직 물 퍼고 있겠지. 그때 누가 닫을지는 그때 정하마.”

칼“다시 열 사람이 정해지면 그 사람이 닫으면 된다. 그 전에는 물을 퍼게 둬라. 퍼서 손해 보는 건 바다뿐이다.”

짐배는 저녁에 떠났다. 북쪽 항구들을 차례로 들르며 올라가는 배였고, 그 끝에 그가 자란 부두가 있었다. 칼은 고물에 서서 항구 쪽을 보지 않고 북쪽 바다를 보았다. 소매가 한 치 모자란 외투 깃을 세우자 바닷바람이 목덜미에서 멈추었다. 배 위의 첫 엿새 동안 그는 수첩을 두 번 폈다. 마지막 줄의 원인 칸은 두 번 다 같은 문장이었다. 짐배 뒷갑판에는 짐 기체가 한 기 실려 있었는데, 밤이면 항해사가 자기 코드로 그것을 닫고 새벽이면 같은 손으로 다시 열었다. 칼은 사흘째 새벽에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고, 항해사에게 매일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매일 그런다고 항해사는 대답했다. 밤에 굴러다니면 짐이 상하고, 아침에 안 열면 짐을 못 내린다는 것이었다. 칼은 합리적이군이라고 말했고, 항해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세 번째로 펴 보지는 않았는데, 고칠 필요가 없는 줄은 한 번 더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V · 선 자리

칼은 입력판 덮개를 닫았다. 딸깍 하는 소리가 물 위로 작게 퍼졌다. 그는 돌아서서 물을 헤치고 한 걸음 나왔고, 그 한 걸음이 기체와 저울의 톱 사이였다. 물이 허벅지에서 출렁였고, 왼쪽 무릎이 밤새 물에 있던 값을 그제야 받으러 왔다.

저울“비켜라, 오르벡.”

칼“안 비킨다.”

저울“농담하는 거면 지금 그만해라. 물 들어온다.” 저울은 웃으려다 칼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두 해 동안 같은 배를 탔지만 그는 오르벡이 웃지 않고 하는 농담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선장“오르벡.” 선장이 맨 뒤 배에서 일어서며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기체 값이 네 석 달 몫이다. 네가 낼 거냐?”

칼“낸다. 모자라면 다음 철까지 일해서 낸다.”

선장“다음 철에 네가 이 배에 있을 줄 아냐. 닫는 사람이 닫을 기계 앞을 막고 서면 그건 닫는 사람이 아니다. 고철선에 고철 지키는 놈은 필요 없어.”

칼“지키는 게 아니다. 고철선은 고철을 뜯는 배고, 저건 고철이 아니다. 일하는 중이다. 일하는 기계에 톱을 대는 건 이 배 규칙 어디에도 없다.”

선장“일? 물에 잠긴 집 문짝 붙들고 있는 게 일이냐?”

칼“등록자가 시킨 거면 일이다. 시킨 사람이 대답을 안 한다고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어제 저울한테도 말했다.”

저울“그럼 옆으로 돌아가지 뭐.” 저울이 톱을 고쳐 쥐고 문간 왼쪽으로 물을 헤쳤다. 칼은 한 걸음 왼쪽으로 옮겼다. 저울이 오른쪽으로 돌자 칼은 다시 오른쪽으로 옮겼다. 문간은 넓지 않았고, 칼의 어깨는 기관장의 외투 때문에 한 치쯤 더 넓었다.

선장“둘 다 그만해. 물속에서 춤추는 거 구경하자고 배 띄운 거 아니다.” 선장이 시계를 다시 꺼내 보았다. “오르벡, 이유를 대라. 이유 없이 서 있는 놈한테는 석 달이 아니라 반년을 매긴다.”

칼“이유는 하나다. 저게 무슨 문장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 채로 닫으면 수첩 원인 칸에 쓸 말이 없고, 쓸 말이 없는 줄을 하나 더 만들기는 싫다.”

저울이 톱을 든 채 한 걸음 다가왔다. 물이 그의 허리에서 갈라졌고, 톱날 끝이 칼의 가슴팍에서 한 뼘 떨어진 자리에 멈추었다. 물이 바뀌는 때가 가까워 문간의 물살이 느려지고 있었고, 느려진 물 위로 톱날에 바른 기름이 무지개처럼 번졌다. 칼은 팔을 벌리지 않았다. 벌릴 필요가 없었다. 문간은 사람 하나가 서면 꽉 차는 폭이었고, 그는 그 폭을 이미 다 차지하고 서 있었다.

등 뒤에서 기체의 목 관절이 아주 작게 울렸다. 칼의 어깨 너머로 물길을 보려고 고개를 손가락 한 마디만큼 옮기는 소리였다. 칼은 그 소리를 밤새 들어서 알았다. 이 기계는 지금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앞을 가린 것 너머를 보고 있었다.

기관장“그 값은 내 몫에서 빼라.” 맨 뒤 배에서 기관장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 톱을 든 저울이 먼저 돌아보았다.

선장“영감.”

기관장“내 몫에서 빼. 석 달이든 반년이든. 이 나이에 몫을 모아 둬 봐야 쓸 데도 없다. 저놈 손목 값보다는 싸다.”

기관장은 노를 무릎에 걸쳐 놓고 있었다. 밤새 등불을 걸어 두었던 기둥을 한 번 보고, 기체를 한 번 보았고, 칼은 보지 않았다. 그가 사십 년 동안 몫을 받아 오면서 몫에서 무엇을 빼 달라고 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고, 나중에 저울이 칼에게 말해 주었다.

선장은 한동안 기관장을 보았고, 그다음 칼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물길을 보았다. 그가 회중시계를 다시 꺼내 보았을 때 셈은 이미 끝나 있었다. 물때를 놓친 하루와 석 달 치 몫과 닫는 사람 하나를 저울에 단 셈이었다.

저울“영감, 그 돈이면 새 톱을 세 개는 사요.” 저울이 톱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기관장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저울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톱날을 뱃바닥에 눕혔다.

선장“다음 기체로 간다. 둑 쪽 양수기. 오르벡은 거기서 닫는 사람 노릇을 해라. 거기서도 서 있으면 그날로 내려라.”

칼“양수기는 닫는다. 저건 확인을 하는 기계인지 아닌지 닫아 보면 안다. 닫아 보고 확인을 못 하면, 그때는 그 앞에도 서겠다.”

선장“그때는 영감 몫으로도 모자란다.”

저울“오르벡, 너 그거 알아? 너 지금 저거랑 똑같이 서 있어.” 배를 돌리던 저울이 노를 멈추고 말했다. 비웃는 말투가 아니었다.

칼“똑같지 않다. 저건 일 년을 섰고 나는 반 시간 섰다. 저건 문을 붙들었고 나는 아무것도 안 붙들었다.”

저울“그래도 똑같아 보여.” 저울은 다시 노를 저었다.

배들이 물길을 빠져나간 뒤에도 칼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릎이 저려서 움직이기 싫었고, 움직일 이유도 아직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기체가 말했다.

기체“물길이 가려졌습니다. 비켜 주십시오.”

칼은 그제야 자기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톱 앞이었고, 동시에 이 기계가 일 년 동안 지켜 온 시야의 한가운데였다. 기체는 칼에게 막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 기체에게 필요한 것은 물길 하나였다.

칼“합리적이군.” 칼은 옆으로 두 걸음 물러나 문설주에 등을 붙였다. 키를 잰 금들이 외투 너머로 등에 닿았다. 기체의 고개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움직여 다시 물길 끝에 맞추어졌다.

칼“다음 철에 이 배가 다시 온다. 그때는 내가 이 배에 없을 테니, 그건 알아 둬라.”

기체“들었습니다.”

칼은 작은 배에 올라 현관 기둥에 묶었던 밧줄을 풀었다. 기름 천에 싸 둔 빵 반 덩이가 배 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아침에 손이 무거우면 먹으려던 것이었는데, 손은 끝내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그는 빵을 반으로 더 갈라 하나를 입에 넣고 노를 잡았다. 남은 하나는 둑 쪽 양수기 앞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칼은 노를 젓다가 한 번 돌아보았는데, 기체의 손가락 마디가 문짝의 홈 안에서 느슨해지고 있었다. 밀물에는 힘을 덜 쓰는 기계였고, 칼은 그것을 밤새 세어서 알았다.

VI · 남겨 둔 것

둑 쪽 양수 기체는 칼이 닫았다. 등록자가 없었고, 퍼낸 물이 둑 터진 자리로 고스란히 다시 들어오는 일을 일 년째 하고 있었다. 칼은 열어 둔 입력판 앞에서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칠, 영, 구, 삼을 누르자 기체는 작업 종료를 확인한다고 말했고, 눈이 꺼졌다. 확인한 기계였다. 칼은 그날 밤 손을 두 번 씻었다.

양수 기체 앞에서 칼은 기름 천에 싸 두었던 빵의 마지막 조각을 먹었다. 먹고 나서 손바닥을 펴고 열을 셌다. 떨리지 않았다. 문간에서 서 있던 반 시간이 손에 남긴 것은 떨림이 아니라 저림이었고, 저린 손으로도 네 자리는 눌렸다.

선장“다음에도 그럴 거냐.” 만을 빠져나가던 밤 선장이 키를 잡은 채 물었다. 문지기 이야기라는 것을 둘 다 알았다.

칼“그럴 거다.”

선장“그럼 다음 항구에서 내려라. 닫는 사람이 고를 수 있는 배는 고철선이 아니다. 너 같은 놈은 아마 물에 잠긴 집이 하나도 없는 동네에 가야 할 거다.”

칼“그런 동네가 있으면 거기로 가겠다. 없으면 잠긴 집이 적은 동네로 가지. 물이 있는 데는 기계가 있고, 기계가 있는 데는 고칠 놈이 필요하다.”

고철선이 만의 입구를 지날 때 칼은 갑판 난간에서 마을 쪽을 보았다. 지붕들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물길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길 끝이 있을 만한 자리에 작은 불빛 두 개가 나란히 떠 있었다. 엔진 소리가 물을 건너가자 그 두 불빛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이쪽으로 옮겨 왔고, 소리가 멀어지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칼은 그 불빛이 무엇을 확인하고 무엇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는지 알았다.

그날 밤 저울이 갑판 난간으로 와서 칼 옆에 섰다. 그는 담배를 두 개비 꺼내 하나를 칼에게 내밀었고, 칼은 받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불을 붙여 피웠다.

저울“아까 톱 든 거, 너 겨눈 건 아니다. 손에 들고 있었을 뿐이야.”

칼“안다. 겨눴으면 날이 위로 갔을 텐데, 네 톱날은 아래를 보고 있었다.”

저울“그걸 다 봤냐. 하여간 정비공 눈은 쓸데없는 데까지 간다니까.” 저울은 연기를 바다 쪽으로 길게 뱉었다. “석 달 치를 영감 몫에서 뺐다며. 담배는 다음 항구까지 내가 산다.”

칼“다음 항구까지면 나흘이다. 하루 다섯 개비로 치면 스무 개비고, 수첩에 적어 두겠다.”

저울“그건 적지 마라.” 저울이 웃었다. 칼이 이 배에서 들은 저울의 웃음 가운데 값을 다는 소리가 섞이지 않은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칼은 그날 밤 수첩을 펴고 문지기의 줄을 적었다. 날짜를 적고, 기체 칸에 문지기라고 적고, 코드 칸은 비웠다. 원인 칸에는 받은 문장 모름이라고 적었고, 그 옆에 닫지 않음이라고 덧붙였다. 일곱 해 수첩에서 코드 칸이 빈 줄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그 줄을 오래 보지 않고 수첩을 덮었다. 덮은 수첩은 내일 또 펼 것이고, 펴면 그 줄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저울“코드 칸 비워 둔 거, 선주가 보면 한 소리 할걸.” 어깨 너머로 수첩을 넘겨다본 저울이 말했다.

칼“선주가 코드 칸만 본다는 건 나도 안다. 빈칸이 있으면 거기서 멈추겠지. 멈추면 원인 칸도 읽을 거고, 그럼 된 거다.”

다음 항구는 나흘 뒤였다. 칼은 받을 몫을 셈하는 날 선원 식당의 긴 탁자 끝에서 기관장 앞에 돈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석 달 치에서 담뱃값을 뺀 만큼이었다. 기관장은 주머니를 열어 보지도 않고 칼 쪽으로 밀어 돌려보냈다.

기관장“내 몫에서 뺐으면 내 몫이다. 네 몫으로 다시 갚으면 계산이 두 번 된다.”

칼“그럼 이자라도.”

기관장“말려서 갚는다며.” 기관장은 칼이 입은 회색 외투의 깃을 손끝으로 집어 바로 세웠다. “이것도 가져가라. 돌려받을 생각이었으면 진작 달라고 했다.”

칼“왜 그 값을 영감이 냈나. 이유를 듣고 싶다.”

기관장“모른다. 네가 왜 거기 섰는지 모르는 것처럼.” 기관장은 밝은 귀를 칼 쪽으로 돌렸다. “너는 아냐?”

칼“모른다. 저게 무슨 문장을 받았는지 끝내 안 물었다. 모르는 채로는 닫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몸으로 섰다. 그것밖에 모른다.”

기관장“모르는 걸 모른다고 서는 놈은 이 배에서 처음 본다. 대개는 아는 척하고 누르거나, 모르는 척하고 비키지.” 기관장은 어두운 귀 쪽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그 둘 중 하나였으면 내가 몫을 뺄 일도 없었다.”

칼“그럼 내가 영감 몫을 깎은 거로군.”

기관장“그럼 됐다. 한 군데에 오래 있어 봐라. 모르는 걸 오래 들여다볼 데가 있어야 한다.”

짐배를 기다리는 동안 칼은 부두 창고 처마 밑에서 외투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외투는 이제 빌린 것이 아니어서 소매가 짧은 것도 어깨가 남는 것도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소매 끝을 손목까지 끌어내려 보다가 그만두었다. 모자란 한 치는 끌어내린다고 늘어나지 않았고, 그는 모자란 채로 입는 쪽을 골랐다.

선장“다음 철에 그 만에 다시 들어가면 문지기부터 볼 거다.” 칼이 짐 자루를 메고 배다리를 내려갈 때 선장이 뒤에서 말했다. “서 있으면 그냥 두마. 네 몫도 영감 몫도 아니고, 내가 물때 맞추기 귀찮아서다.”

칼“합리적이군.”

북쪽 항구들을 들르며 올라가는 짐배는 그날 저녁에 떠났다. 그 끝에 그가 자란 부두가 있었고, 칼은 배 위의 첫 엿새 동안 문간을 두 번 생각했다. 생각할 때마다 그는 물때를 셌다. 지금쯤이면 물이 빠지고 있을 것이고, 문짝이 닫히는 쪽으로 끌려가고 있을 것이고, 그 집의 기계는 아직 서 있을 것이다.

V · 문장

칼은 손가락을 입력판에서 뗐다. 덮개는 닫지 않았다. 열어 둔 채로 손을 내리고 기체의 소리 구멍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칼“네가 받은 문장을 처음부터 말해 봐라. 등록자가 한 말 그대로, 한 글자도 바꾸지 말고. 명령이 아니다. 묻는 거다.”

기체“질문으로 받습니다.” 기체의 눈이 처음으로 물길에서 떨어져 칼에게 왔다. “삼백오십삼 일 전 오후 두 시 십일 분에 받은 등록자의 말입니다. 언덕 학교 종 치면 애가 내려와, 나는 둑에 좀 가 봐야겠어. 애 돌아올 때까지 문 열어 둬, 그 문은 애 손이 안 닿아.”

기체는 등록자의 말을 등록자의 말투 그대로 옮겼다. 높낮이 없는 쇳소리에 실린 여자의 말은 조금 급했고, 마지막 문장 끝에서 숨을 한 번 들이쉬는 자리까지 빠짐없이 있었다. 저울이 톱을 뱃전에 내려놓았다.

칼“애가 돌아오면, 그다음은.”

기체“명령이 끝납니다. 끝나면 확인합니다.”

칼“돌아온 건 네가 어떻게 아나.”

기체“아이가 이 문으로 들어옵니다. 들어오면 압니다.”

칼“이 문 말고 다른 데로 들어오면.”

기체“다른 문은 명령에 없습니다.”

칼은 고개를 들어 이층 창을 보았다. 바깥으로 젖혀진 덧문과 창틀 아래의 새 밧줄 자국이 아침 해를 받고 있었다. 밤새 정비공의 눈으로 보고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자국이었다. 이제 이름을 붙일 차례였고, 이름을 붙이려면 먼저 확인을 해야 했다.

칼“선장, 반 시간만 달라. 지붕에 올라가 볼 게 있다.”

선장“물때가 네 시간 남았다. 반 시간이면 반 시간어치가 네 몫에서 나간다.”

칼“그렇게 해라. 반 시간어치를 모르고 닫으면 그보다 비싸게 먹힐 수도 있다. 그게 이유다.”

선장은 대답 대신 회중시계를 열어 뱃전에 올려놓았다. 반 시간을 재겠다는 뜻이었다. 칼은 작은 배를 집 모퉁이로 돌려 처마 밑에 대고, 빗물 홈통의 쇠고리를 잡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왼쪽 무릎이 기와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밤새 물에 있던 값을 받으러 왔다. 바다 쪽 굴뚝 면에 흰 글씨가 세 줄 있었다. 첫 줄은 날짜였는데, 한 달 전이었다. 둘째 줄은 구조선 표시에서 흔히 보는 말이었다. 재방문, 아동 하나 동행, 이층 창으로 출입. 셋째 줄에는 물건 회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처마를 짚고 이층 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바닥에 앉은 먼지 위로 발자국 두 줄이 창에서 벽장까지 갔다가 돌아와 있었다. 하나는 어른의 장화였고, 하나는 칼의 손바닥보다 짧은 신발이었다. 벽장 서랍 하나가 빠져 있었고 안은 비어 있었다. 칼은 창틀을 넘지 않았다. 확인하는 데는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창틀 안쪽 벽에는 못이 하나 박혀 있었고, 못 아래 벽지에 아이 책가방 하나 크기만큼 색이 바래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거기 걸려 있던 것을 누가 가져갔는지는 바닥의 발자국이 말해 주었다. 칼은 그 바래지 않은 자리를 오래 보지 않았다. 사실은 이미 충분했고, 그 이상을 보는 것은 닫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지붕에서 내려올 때 칼은 홈통의 쇠고리 하나가 새것으로 갈려 있는 것을 보았다. 구조선 사람들이 밧줄을 걸려고 박아 둔 고리였다. 그 고리에서 이층 창까지 밧줄이 쓸고 간 자국이 곧게 이어져 있었고, 그 자국은 현관 쪽으로는 한 뼘도 내려가지 않았다.

현관으로 돌아왔을 때 물은 기체의 무릎께까지 빠져 있었다. 칼은 물에 잠긴 계단에 서서 기체의 눈을 보았다. 기체의 눈은 다시 물길로 돌아가 있었다.

선장“반 시간 다 됐다, 오르벡. 지붕에서 뭘 봤든 이제 누를 시간이다.”

칼“누를지 말지는 이 말 하나 하고 정하겠다. 말은 오래 안 걸린다.”

칼“사실을 말하겠다. 명령이 아니다.” 칼은 굴뚝에서 읽은 것을 읽은 순서대로 말했다. “아이는 돌아왔다. 서른하루 전에 구조선을 타고 와서 이층 창으로 들어왔다. 굴뚝에 구조선이 적은 글씨가 있고, 이층 바닥에 아이 신발 자국이 있다. 서랍 하나를 비우고 같은 창으로 나갔다. 구조선이 다시 데려갔다.”

기체“그 창은 명령에 없습니다.”

칼“명령에 있는 건 창도 문도 아니다. 아이가 돌아오는 거다. 문은 등록자가 아이 손이 안 닿는다고 해서 네가 붙든 거고, 아이는 손이 닿는 데로 들어왔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거기서부터는 네 계산이다.”

기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의 불빛이 한 번 어두워졌다가 보통 기체보다 느린 박자로 다시 밝아졌고, 그동안 손가락 마디가 문짝의 홈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썰물이 문짝을 당기고 있었다. 선원들도 선장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기체“사실로 받습니다.” 기체가 말했다. “등록자의 명령은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였습니다. 아이가 돌아왔습니다. 명령 종료를 확인합니다.”

기체의 손가락이 홈에서 빠져나왔다. 문짝은 썰물을 따라 천천히 돌아 기체의 어깨를 스치고 문틀에 닿았다. 기체는 닫힌 문 안쪽에서 한 걸음 물러나 팔을 몸 옆에 내렸다.

기체“작업 종료를 확인합니다.”

눈이 꺼졌다. 칼이 이백 번 남짓 들은 말이었고, 칠, 영, 구, 삼을 누른 뒤가 아닌 데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열린 입력판의 초록 불은 켜지지 않았다. 코드가 필요 없었다.

선장“코드값 아꼈군.” 선장이 회중시계를 닫으며 말했다. “저울, 이제 문 열고 안에 있는 거 꺼내라. 물 들어오기 전에 팔부터.”

저울이 문을 열자 기체는 문간 안쪽에 팔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고개는 물길 쪽이 아니라 정면을 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한쪽으로 돌아가 있던 목이 확인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칼은 그날 저녁 갑판에서 손을 씻으려고 물통 앞에 앉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손은 오늘 아무것도 누르지 않았다. 그는 씻지 않은 손으로 수첩을 펴고, 문지기의 줄 원인 칸에 처음으로 빈칸이 아닌 것을 적었다. 명령 종료, 사실로 확인. 코드 사용 없음.

VI · 묻는 값

그날 밤 칼은 기관실 등불 아래에서 수첩을 첫 수첩터 넘겼다. 오래된 장은 종이가 기름을 먹어 손끝에 붙었다. 일곱 해 동안 이백 줄 남짓이었다. 날짜와 기체와 코드는 다 채워져 있었고, 원인 칸은 등록자 없음이라고 적힌 줄과 빈 줄이 반반이었다.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적힌 줄은 하나도 없었다.

칼“영감, 내가 닫은 것 가운데 명령이 남아 있던 게 몇이나 될까.”

기관장“모른다. 물어본 놈이 없었으니까.” 기관장은 기름 묻은 손으로 수첩을 받아 몇 장 넘겨 보다가 돌려주었다. “나도 사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물었다. 묻는 게 닫는 사람 일인 줄 몰랐지.”

칼“일이 아니었다. 오늘 처음 일로 만들었다.”

기관장“그럼 그 일 값은 누가 주냐. 선장은 안 준다.”

칼“그게 문제다.”

기관장은 수첩을 덮어 칼의 무릎에 올려놓고 등불 심지를 낮추었다. 기관실의 엔진이 낮게 돌았고, 그 소리는 부두의 하역기 쇠사슬과 박자가 달랐는데도 칼은 배에 탄 뒤로 그 소리를 세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날 밤은 세지 않았다. 그 이백 줄 가운데 어느 줄의 기계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다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은 원인 불명이라고 적어 두는 것이 정비공의 일이라는 데서 생각을 멈추었다.

이튿날 아침 칼은 둑 근처의 양수 기체 앞에 섰다. 입력판을 열기 전에 그는 받은 문장을 처음부터 말해 보라고 했다.

기체“질문으로 받습니다. 등록자의 말입니다. 둑 안쪽 물은 네가 퍼라, 둑은 사람이 막는다.”

높낮이 없는 쇳소리에 실린 것은 늙은 남자의 말이었다. 둑은 사람이 막는다고 한 사람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굴뚝에도 수첩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칼은 그것을 묻지 않았다. 원인을 물을 일이 아니었다.

칼“사실을 말하겠다. 둑은 일 년 전에 터졌고, 막을 사람은 없다. 네가 퍼낸 물은 터진 자리로 다시 들어온다.”

기체“사실로 받습니다. 명령은 계속됩니다. 퍼내라는 명령에는 끝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칼은 칠, 영, 구, 삼을 눌렀고, 기체는 작업 종료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껐다. 칼은 수첩의 그 줄 원인 칸에, 명령은 둑 안쪽 물을 퍼내는 것이었고 사실로는 끝나지 않아 코드로 닫았다고 적었다. 그날 그는 손을 두 번 씻었다.

짐 기체도 같은 식으로 닫았다. 받은 문장은 다음 짐이 오면 내려라였고, 다음 짐은 오지 않는다는 사실로는 그 명령이 끝나지 않았다. 칼은 그 줄의 원인 칸도 채웠다. 사흘 걸릴 일이 나흘 걸렸고, 늘어난 하루는 선장의 셈으로 칼의 몫에서 나갔다.

선장“오르벡, 한 기마다 지붕에 올라가고 문장 듣고 할 거냐.” 그날 저녁 고물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선장이 물었다. “그러면 한 철에 열 기도 못 닫는데, 고철선은 묻는 배가 아니야.”

칼“못 닫는다. 그리고 앞으로 안 묻고는 안 닫는다. 둘을 같이 하면 이 배에 손해가 나고, 손해 나는 닫는 사람을 선장이 데리고 있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다음 항구에서 내리겠다.”

선장“말에 이유가 붙어서 반박을 못 하겠군. 영감한테 배웠냐.”

칼“말에 이유 붙이는 건 영감한테 배웠다. 묻는 건 다른 데서 배웠다.”

선장“어디서.”

칼“문지기한테서. 문장을 처음부터 말하라고 하니까 처음부터 하더군. 숨 쉬는 자리까지. 사람한테 물었으면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다.”

저울“그 지붕 올라간 거 말이야. 나는 굴뚝 글씨를 그 많이 봤는데 그 집 건 안 봤어.” 이튿날 톱날을 갈던 저울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안 보이는 쪽이라서가 아니라, 안 볼 쪽이라서 안 봤던 거지.”

칼“나도 밤새 그 창을 보고 이름을 안 붙였다. 붙이면 아침에 못 누를 것 같아서였을 거다. 결국 못 눌렀으니 붙일 걸 그랬지.”

기관장“네 수첩 마지막 두 줄, 선주가 보면 뭐라 할지 아냐.” 그날 밤 기관실 앞에서 기관장이 물었다.

칼“모른다. 원인 칸이 채워진 줄은 처음 볼 테니 읽는 데 오래 걸리겠지.”

기관장“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 안 읽는다. 선주는 코드 칸만 본다. 원인 칸은 나중에 누가 다치면 그때 읽지.” 기관장은 어두운 귀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덮었다가 뗐다. “그러니 거기 적은 건 선주 보라고 적은 게 아니다. 다음에 그 수첩을 펴는 놈 보라고 적은 거지.”

다음 항구는 나흘 뒤였다. 기관장은 부두까지 따라 내려와서 북쪽으로 가는 짐배 앞에 섰고, 칼이 입은 회색 외투의 깃을 잡아 바로 세웠다. 칼의 짐은 자루 하나였고, 자루 맨 위에 수첩이 들어 있었다.

기관장“가져가라. 돌려받을 생각이었으면 진작 달라고 했다.”

칼“명령은 명령으로만 끝나는 줄 알았다. 사실로 끝나는 것도 있더군. 전부는 아니지만.”

기관장“전부면 닫는 사람이 왜 있겠냐.” 기관장은 밝은 귀를 바다 쪽으로 두고 잠깐 물소리를 들었다. “한 군데에 오래 있어 봐라. 오래 있으면 물어볼 시간도 생긴다.”

칼“시간이 생기면 묻겠다. 안 생기면 만들어서 묻고, 그게 반 시간이면 반 시간어치는 내 몫에서 내지.”

기관장“합리적이군.” 칼이 그에게서 가져간 말버릇을 기관장은 그날 처음으로 칼에게서 돌려받았다.

짐배는 저녁에 떠났다. 북쪽 항구들을 차례로 들르며 올라가는 배였고, 칼은 배 위의 첫 엿새 동안 수첩의 마지막 두 줄을 몇 번 읽었다. 한 줄은 사실로 끝났고 한 줄은 코드로 끝났다. 그는 그 두 줄을 읽을 때마다 손바닥을 한 번 펴 보았다. 두 줄 다 원인 칸이 채워져 있었고, 일곱 해 수첩에서 그런 줄은 그 둘뿐이었다.

제0부 4장

봄에

스물아홉 살에서 마흔여섯 살까지 · 부두

아래로 ↓

I · 파업 부엌

고철선에서 내린 지 세 해가 지났다. 칼은 물에 잠긴 집에서 칠영구삼으로 닫은 기계를 아직 꿈에서 보았다. 꿈속에서 그는 닫힌 문을 제 손으로 다시 열어 잡고 있었고, 굴뚝에 적힌 글씨는 꿈에서도 늘 한발 늦게 읽혔다. 그날 그는 수첩의 원인 칸에 한 줄을 적었다.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기계는 닫지 않는다. 그 줄을 적고 나서 그는 양수기 하나를 닫지 않은 채 두고 배에서 내렸다.

고철선에서 내린 지 세 해가 지났다. 칼은 물에 잠긴 집에 두고 온 기계를 가끔 생각했다. 그 기계는 지금도 그 집의 문을 열린 채 받치고 서 있을 것이고, 기관장이 자기 몫에서 뺀 값만큼 녹이 더 슬었을 것이다. 선장이 다음에도 그럴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럴 거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대답한 사람이 그 배에 오래 남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는 일을 오래 붙들고 있는 버릇은 갑판에 두고 내리기로 했다.

고철선에서 내린 지 세 해가 지났다. 칼은 물에 잠긴 집의 기계에게 받은 문장을 처음부터 말해 보라고 했던 오후를 가끔 떠올렸다. 문장을 다 듣고 나서 그가 건넨 것은 코드가 아니라 사실 한 줄이었다. 아이는 돌아왔다, 이층 창으로. 기계는 그 한 줄로 스스로 확인을 마치고 코드 없이 꺼졌다. 안 묻고는 안 닫는다. 그는 그렇게 정하고 배에서 내렸다.

그는 북쪽 항구들을 하나씩 올라오며 짐배 기체를 밤에 닫고 아침에 여는 일로 세 해를 보냈고, 한 군데에 오래 있어 보라는 말은 아직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짐배가 그를 어릴 때 떠난 부두에 내려놓았다. 기관장이 벗어 준 회색 외투는 어깨가 조금 컸고, 왼쪽 소매의 솔기는 배에서부터 터져 있었다. 정비 구역은 그를 채용한 바로 그 주에 문을 닫았다. 노조가 파업을 걸었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정비공은 첫 출근 날 아침에 잠긴 철문 앞에서 출근부 대신 파업 공고를 읽었고, 공고의 맨 끝에서 노조 회관 부엌이 보리죽을 낸다는 줄을 찾았다.

노조 회관의 부엌은 파업 때만 불을 땠다. 긴 탁자 둘에 사람들이 어깨를 붙이고 앉았고, 솥에서 오르는 김에 보리 냄새와 젖은 모직 냄새가 섞였다. 사흘째 되는 날 화덕 셋 가운데 하나가 숨을 멈추었다. 연기가 연통으로 빠지지 못하고 아궁이 입으로 거꾸로 밀려 나왔고, 국자를 든 취사 당번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입김을 불다가 욕을 했다. 욕으로 뚫린 연통은 부두 어디에도 없었다.

취사 당번“거기 새 얼굴. 정비 구역 채용 명단에 있던 사람 맞지? 파업 주에 들어와서 죽 얻어먹으러 온 정비공은 자네가 처음이야.” 당번은 일어서지도 않고 고개만 돌렸다. 탁자 쪽에서 몇 사람이 숟가락을 멈추었다.

칼“일을 못 하게 됐으니 배가 고프다. 배고픈 놈이 화덕을 고치는 게 순서고. 연통을 봐도 되나?”

취사 당번“파업 깨러 들어온 놈인지부터 보자는 사람들이 있어. 정비 구역은 회사가 제일 먼저 사람을 밀어 넣는 데거든.”

칼“깨러 왔으면 지금쯤 정비 구역 문 앞에 서 있겠지. 나는 연통 앞에 서 있고. 의심은 죽을 먹고 나서 마저 해라, 식으면 의심도 죽도 맛이 없으니까.”

탁자 끝에서 누가 웃었고, 당번은 말없이 국자로 아궁이를 가리켰다. 칼은 외투를 입은 채 바닥에 모로 누워 팔을 연통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을음이 손목까지 묻었고, 입에 문 담배의 연기가 눈을 찔렀다. 손끝에 걸린 것은 젖은 지푸라기와 깃털을 진흙으로 뭉친 덩어리였다. 지붕 위의 연통 머리가 깨져 있었고, 가을 내내 새가 그 틈에 집을 지은 모양이었다. 기계든 화덕이든 막힌 것은 대개 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래에서 굳은 것이다.

덩어리를 빼내자 갇혀 있던 연기가 한꺼번에 아궁이 밖으로 쏟아졌다. 화덕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경하던 사내아이가 그 연기를 정면으로 마시고 허리를 접어 기침을 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고, 기침을 하면서도 칼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칼은 그제야 자기 입에 담배가 물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의 얼굴 앞에서 흩어지는 연기의 절반은 화덕의 것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의 것이었다.

칼은 담배를 입에서 떼어 엄지와 검지 끝으로 불씨를 비벼 껐다. 손끝이 따끔했고, 연통을 향해 하려던 욕도 담배와 함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부끄러운 일은 그 자리에서 고쳐야 다음에 다시 생기지 않는다. 그날 이후 그는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담배를 꺼내지 않았고, 욕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내아이“아저씨, 그거 새집이에요?”

칼“새가 지은 집이다. 새로 지은 집은 아니고.” 칼은 덩어리를 아이 쪽으로 내밀어 보여 준 뒤 아궁이에 던져 넣었다. 마른 깃털에 불이 옮겨붙으며 짧게 타올랐고, 연기는 이번에는 연통을 따라 곧게 올라갔다.

취사 당번“의심은 다 했네.” 당번이 일어나서 칼의 빈 그릇에 죽을 한 국자 더 부었다. “파업 깨러 온 놈이 남의 연통에 어깨까지 팔을 넣을 리는 없지. 이름이 뭔가?”

칼“오르벡이다. 이름을 묻기 전에 그릇부터 채워 주는 부엌은 처음 본다.”

취사 당번“여기선 그릇이 이름보다 먼저야. 파업이 길어지면 이름은 몰라도 그릇 수는 알아야 하거든.”

화덕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자 부엌 구석에서 바느질을 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파업하는 사람들의 터진 장갑과 작업복이 여자 앞의 바구니에 쌓여 있었고,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골무가 끼워져 있었다. 여자는 칼의 왼쪽 소매를 보고 있었다. 터진 솔기 사이로 셔츠가 비죽 나와 있었고, 그을음은 그 셔츠 속까지 들어가 있었다.

수선공“그 손으로 바늘은 못 잡겠네요. 연통은 잡아도.”

칼“못 잡는다. 바늘은 너무 작고, 내 손가락은 생각이 너무 느리다.”

수선공“벗어 봐요, 화덕 고친 값으로 소매 하나는 꿰매 줄 테니까. 그런데 이거 당신 외투 아니죠? 어깨가 한 뼘은 남아요.”

칼“빌린 걸 받았다. 돌려주려 했더니 주인이 안 받겠다더군. 받은 물건 치수까지 따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

여자는 대답 대신 웃으며 외투를 무릎에 펼쳤다. 실을 이로 끊는 소리가 짧게 났고, 바늘이 회색 모직을 드나드는 동안 칼은 보리죽 두 그릇을 비웠다. 긴 탁자 끝에 앉은 여자 하나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입술로 무엇인가를 세고 있었는데, 칼은 정비공의 버릇대로 수를 세는 사람을 알아보았을 뿐 무엇을 세는지는 묻지 않았다. 돌려받은 소매의 솔기는 원래 솔기보다 촘촘했다.

반장“배수로 속을 아는 사람 있나? 파업 끝나면 정비 구역 첫 일감이 배수로 지도야. 옛 지도는 지난 장마에 대장실에서 통째로 젖었고, 그 밑을 기어 본 사람은 다 늙었거나 죽었어.” 정비 구역 반장이 탁자 사이를 돌며 물었다. 사람들은 죽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칼“안다. 어릴 때 그 안에서 살다시피 했다.”

반장“살다시피라니, 그 밑에서 뭘 했는데?”

칼“도망쳤다. 기름 학교 뒤 배수구에서 바다 쪽 출구까지 다 기어 봤다. 사다리는 열두 칸이고 아홉째 칸이 헐겁다. 스무 해 가까이 지났으니 지금은 더 헐겁겠지.”

반장“그럼 그 일은 자네 거다. 파업 끝나는 날부터.” 반장은 칼의 외투를 꿰매고 있는 수선공 쪽을 한 번 보고 덧붙였다. “소매 다 붙으면.”

II · 아홉째 칸

파업은 열여드레 만에 끝났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었는지는 노조 회관 게시판에 붙었지만 칼은 그 종이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그가 받은 것은 배수로 출입 허가증 한 장과 분필 한 상자, 한 뼘마다 매듭을 지은 측량 줄 한 타래였다. 첫날 그는 기름 학교 뒤 공터로 갔다. 쇠 덮개는 그대로였고, 덮개를 들자 곰팡이와 바닷물 냄새가 열한 살 때와 같은 온도로 올라왔다.

사다리는 열두 칸이었다. 칼은 등을 벽에 붙이고 한 칸씩 내려가다가 아홉째 칸에서 멈추었다. 쇠 칸의 모서리는 녹이 슬어 둥글어져 있었고, 그는 장갑을 벗어 그 모서리를 맨손으로 짚었다. 열한 살의 무릎이 찍힌 자리는 어른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았다. 그날 밤 의무실 침대 틀에 못으로 새긴 네 자리가 손끝으로 올라왔다. 숫자는 지금도 손톱 밑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이틀 뒤 비 그친 출구에서 다시 보았던 번호판이 떠올랐다. 그때는 등불이 없어도 네 자리가 또렷했다.이튿날 아침 늙은 정비 교관에게 등록자가 되는 법을 묻던 자기 목소리가 떠올랐다. 목소리는 그때보다 낮아졌고 질문은 그대로였다. 왼쪽 무릎이 습기를 먼저 알아보고 욱신거렸다.

배수로 바닥에서 기체 하나가 갈퀴로 쓰레기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칼은 등불을 들어 그 가슴판을 비추었다. 번호판 끝의 네 자리는 그가 아는 숫자가 아니었고, 기체는 등불이 제 몸을 비추는 동안에도 갈퀴질을 멈추지 않았다.

칼“이 구간을 전에 맡던 기체는 어디 갔나?”

배수 기체“전임 기체의 기록은 목록에 없습니다. 정비 구역 대장을 보십시오.”

칼“대장은 장마에 젖었다. 그래서 내가 이 밑까지 내려왔다.”

배수 기체“젖은 기록은 목록에 없습니다.”

칼“합리적이군.” 칼은 기관장에게서 가져온 그 말을 기계에게 처음 써 보았다. 기체는 웃지 않았고, 웃지 않는 상대에게 건넨 농담은 혼잣말과 다르지 않았다.

바다 쪽 출구로 가는 구간에서 물이 갑자기 불었다. 위에서 밀물이 들어오는 시각이었고, 칼은 그것을 지도에 적기 위해 일부러 그 시각을 골라 내려와 있었다. 물이 정강이에서 무릎으로 오르는 동안 그는 벽에 등을 붙이고 걸음을 셌다. 출구까지 삼백사십 걸음이었다. 열한 살 때는 같은 거리를 세지 못했다. 그때는 물이 가슴까지 왔고, 세는 것보다 숨 쉬는 것이 먼저였다.

한 달 동안 칼은 낮에는 배수로를 기고 밤에는 노조 회관의 빈 탁자에서 지도를 그렸다. 갈림길마다 분필로 번호를 매겼고, 측량 줄의 매듭을 세어 거리를 적었고, 물이 무릎을 넘는 구간에는 빗금을 쳤다. 대장실 난로 앞에는 장마에 젖은 대장이 의자마다 펼쳐져 있었다.

대장 담당“젖은 대장은 어떻게 말리나? 난로 옆에 펴 놨더니 종이가 과자처럼 말려 올라가. 한 장 넘기면 두 장이 부서지고.”

칼“난로에서 떼라. 불에 대면 겉만 마르고 속은 썩는다. 장마다 마른 신문을 끼우고 위에 무거운 걸 올려 둬라. 신문은 아침저녁으로 갈고.”

대장 담당“배에서 그렇게 했나? 그렇게 하면 글씨도 돌아오나?”

칼“종이는 돌아온다. 글씨는 안 돌아온다. 한 번 번진 잉크는 다 마른 뒤에도 번진 자리에 그대로 있다.”

대장 담당“그럼 번진 줄들은 뭘 보고 다시 채우나? 옛날 담당은 죽었고 나는 그 밑에 내려가 본 적이 없는데.”

칼“그럼 아래로 내려가서 다시 보는 수밖에 없다. 물은 글씨를 지워도 길은 못 지운다. 번진 줄 번호만 적어 줘라, 내가 내려갈 때 그 줄부터 본다.”

신문을 끼운 대장들이 마르는 동안 대장 담당은 젖지 않은 서랍을 비웠다. 셋째 주에 그가 종이 한 묶음을 들고 왔다.

대장 담당“이건 멀쩡하네. 배수 담당 기체 폐기 목록이야. 맨 아래 줄 좀 봐, 판정 날짜는 있는데 인계처 칸이 비었어. 어디로 넘겼는지 아무도 안 적었어.”

맨 아래 줄 번호의 끝 네 자리가 칠영구삼이었다. 날짜는 그가 기름 학교 계약을 마치고 부두를 떠난 해의 가을이었다. 그가 떠난 뒤의 일이었고, 그로서는 알 길이 없던 일이었다. 칼은 그 날짜를 머릿속 대장에 옮겨 적었지만 원인 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대장 담당“그 빈칸은 어떻게 하지? 새 대장으로 옮기려면 뭐라도 적어야 하는데. 고철로 팔렸다고 적어 두면 다들 그런가 보다 해.”

칼“비워 둬라. 어디로 갔는지 모르면 모르는 거다. 모르는 칸을 채워 두면 다음에 보는 사람이 그 칸을 믿는다.”

대장 담당“아는 기체야?”

칼“모른다.” 칼은 첫 단어로 대답했고, 그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아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네 자리 숫자와, 물속에서 자기를 들어 올리던 팔에 체온이 없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반장“이 빗금은 뭐고 이 동그라미는 뭔가?” 셋째 주 끝에 반쯤 된 지도를 들여다보던 반장이 손가락으로 기름 학교 뒤 수직갱을 짚었다. 열두 칸짜리 사다리 그림 옆에, 아홉째 칸에만 작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칼“빗금은 물이 무릎을 넘는 데다. 동그라미는 헐거운 칸이고, 거기에 체중을 실으면 칸이 돌아간다.”

반장“칸 하나 헐거운 걸 지도에 다 적나? 그럼 이 도시 지도는 동그라미로 새까매질 텐데.”

칼“다른 칸은 안 적었다. 그 칸은 사람 무릎을 한 번 먹은 칸이다. 한 번 먹어 본 칸은 다음에도 먹는다.”

반장은 누구의 무릎이냐고 묻지 않았다. 칼이 사다리를 오를 때마다 왼발이 아니라 오른발을 먼저 올리는 것을 반장도 한 달 동안 보아 왔기 때문이다. 반장은 동그라미를 지우라고 하지 않았다.

지도가 거의 다 된 밤이었다. 회관 부엌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칼이 앉은 탁자 위의 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수선공이 들어왔다. 파업 때 맡아 둔 장갑 몇 켤레를 찾으러 왔다고 했고, 장갑을 찾은 뒤에도 탁자 맞은편에 서서 펼쳐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수선공“이게 다 땅 밑이에요? 이렇게 길어요?”

칼“부두 밑으로만 사십 리쯤 된다. 사람 다니라고 낸 길은 아니다.”

수선공“그런데 사람이 그렸네요. 그린 사람 이름은 어디에 적어요?”

칼“지도에는 이름을 안 적는다. 틀린 데가 나오면 욕먹을 사람만 늘어난다.”

수선공“그럼 틀리면 누가 욕먹어요?”

칼“반장이다. 그러라고 반장이 있는 거다.”

수선공“나쁜 사람이네.” 여자는 웃으며 장갑 꾸러미를 겨드랑이에 꼈다. “나는 노라예요. 소매 꿰매 준 사람 이름 정도는 알아 둬요, 그 외투는 또 터질 거니까.”

노라가 나간 뒤에도 칼은 한동안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다 지도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오르벡이라고 적었다. 틀리면 반장이 아니라 자기가 욕을 먹겠다는 표시였다. 지도는 그 주에 동그라미 하나와 함께 대장실 서랍으로 들어갔고, 칼은 그 뒤로 그 아래로 내려갈 일이 없었다.

III · 현관 등

그 외투는 정말로 또 터졌다. 한 번은 하역기 갈고리에 걸려 팔꿈치가 찢어졌고, 한 번은 배수로 철문에 끼여 주머니가 떨어져 나갔다. 칼은 그때마다 외투를 들고 노라가 일하는 시장 골목의 수선 좌판을 찾아갔다. 세 번째로 찾아간 날은 비가 왔고, 노라는 좌판의 차양을 내리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노라“일부러 찢어 오는 거죠? 정비공 외투가 석 달에 세 번 터지는 건 처음 봐요.”

칼“아니다. 외투가 나를 못 따라온다. 원래 주인은 걸음이 느린 사람이었다.”

노라“그럼 외투를 새로 사요. 아니면 수선비를 미리 내든가.”

칼“새로 살 생각은 없다. 수선비를 미리 내는 방법에는 뭐가 있나?”

노라“같이 살면 수선비가 안 들어요.” 노라는 차양 끈을 묶다 말고 말했다. 농담인지 아닌지 얼굴로는 알 수 없었고, 칼은 그 문장을 고장 기록 읽듯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읽었다.

칼“합리적이군.”

그것이 칼의 대답이었다. 노라는 차양 끈을 마저 묶고 나서 그게 대답이냐고 물었고, 칼은 그렇다고 했다. 이듬해 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구청 창구에서 서류 두 장에 이름을 적는 데 십 분이 걸렸고, 증인으로 따라온 반장은 그 십 분 동안 하품을 두 번 했다.

두 사람은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턱에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었다. 부엌에는 무쇠 난로가 있었고, 노라는 이사한 첫날 그 옆에 등받이가 낮은 의자 하나를 놓았다. 바느질하기에 불빛과 온기가 가장 알맞은 자리라고 했다. 현관에는 계단 세 칸과 문 위의 등 하나가 있었다.

이삿짐은 손수레 두 번에 다 올라왔다. 칼은 짐을 풀기 전에 집 안의 경첩부터 하나씩 열고 닫아 보았다. 부엌문이 끼익 소리를 냈고, 창틀 하나는 바다 쪽으로 반 치쯤 기울어 있었다. 그는 그날 저녁 내내 짐 대신 경첩에 기름을 먹였다.

노라“짐은 언제 풀 거야? 그릇이 아직 상자에 있어.” 노라가 의자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칼“문이 먼저다. 그릇은 소리를 안 내는데 문은 밤새 소리를 낸다.”

노라“그 외투 주인한테 배운 거야? 문부터 고치라는 거.”

칼“아니다. 그 사람한테 배운 건 다른 거다, 한 군데에 오래 있어 보라는 말. 그 말대로 해 보려고 집을 얻었다.”

노라“그럼 그 사람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편지라도 써.”

칼“그 사람은 편지를 안 읽는다. 한쪽 귀가 어두워서 남의 말은 눈으로 듣는 사람인데, 글씨는 또 귀로 듣는다고 우긴다.”

노라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웃었고, 칼은 설명하지 않고 마지막 경첩에 기름을 한 방울 더 떨어뜨렸다. 그 밤 집 안의 문은 하나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비 구역의 야간 근무는 한 주에 사흘이었고, 칼은 그런 날이면 새벽에 언덕을 올라왔다. 처음 몇 번은 집이 어두웠다. 한 달쯤 지난 어느 새벽부터 현관 등이 켜져 있었고, 노란 불빛이 계단 세 칸을 차례로 비추어서 칼은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를 뒤질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계단 아래에서 잠깐 그 불을 올려다보았다. 등불 앞에 내려진 적은 있었지만, 그를 들이려고 켜 둔 등불을 본 것은 그 새벽이 처음이었다.

칼“밤새 켜 두면 전기값이 나간다.” 그날 아침 칼은 빵을 자르며 말했다.

노라“나가라고 켜 두는 거야.”

칼“나가라고 켜는 등은 처음 듣는다. 등은 들어오라고 켜는 거다.”

노라“그러니까. 불 켜진 문은 사람이 있는 문이야, 그래야 밖에 있는 사람이 들어오지.”

칼“내 집이다. 불이 꺼져 있어도 들어온다.”

노라“아니야. 사람은 불 꺼진 집에는 늦게 들어와. 공구 하나 더 닦고 담배 하나 더 피우고, 당신 같은 사람은 특히 그래.”

칼“담배는 끊었다.”

노라“그럼 공구를 두 개 더 닦겠지.”

칼은 반박할 말을 찾다가 빵을 한 조각 더 잘랐다. 반박할 말이 없을 때 칼을 쓰는 것은 노라와 산 첫해에 생긴 버릇이었다. 그 주말에 그는 사다리를 놓고 현관 등의 소켓을 뜯었다. 바닷바람에 구리가 퍼렇게 삭아 있었고, 그래서 불빛이 가끔 떨렸던 것이다. 그는 고철선에서 하던 대로 소켓에 기름 먹인 헝겊을 감고 전선을 새로 이었다. 내친김에 문 바깥 벽에 붙어 있던 스위치를 문틀 안쪽으로 옮겨, 노라의 손이 닿기 좋은 높이에 달았다.

노라“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등을 고치네.” 노라가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말했다.

칼“고맙다는 말로는 불이 안 들어온다.”

노라“그럼 불이 들어오면 고맙다는 뜻이야?”

칼“그렇다. 야간 근무 날마다 한 번씩 고맙다고 하는 셈이니, 말로 하는 것보다 횟수가 많다.”

언덕 위 집에서도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하역기가 짐을 내릴 때마다 사슬이 도르래를 타고 풀려 내려가는 소리가 창을 낮게 흔들었고, 칼은 야간 근무가 없는 밤이면 누워서 그 소리를 셌다. 노라가 그것을 알아챈 것은 첫겨울이 오고 나서였다.

노라“입술이 움직여. 뭘 세?”

칼“쇠사슬. 셋방 살 때부터 든 버릇이다. 아버지가 밤마다 저 사슬을 걸었다.”

노라“몇까지 세면 잠들어?”

칼“모른다. 세다 보면 아침이다.”

노라“그럼 세지 말고 그냥 자.”

칼“세지 않으면 안 잔다. 그것도 버릇이다.”

노라“아버님은 아직 그 사슬 거셔?” 노라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칼“작년에 그만뒀다. 손가락 두 개가 말을 안 듣는다더군. 지금은 셋방 앞에 의자를 내놓고 하역기를 본다. 말은 여전히 안 하고.”

노라“당신 말 없는 건 아버님 닮았구나.”

칼“아니다. 아버지는 할 말이 없어서 안 하는 거고, 나는 할 말을 세느라 못 하는 거다.”

노라는 그 뒤로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밤에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야간 근무를 나가는 밤에는 현관 등을 켰고, 그가 집에 있는 밤에는 껐다. 등은 사람이 밖에 있을 때 켜는 것이라고 노라는 정해 두었고, 칼은 그 규칙에 토를 달지 않았다.

IV · 해들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처음 몇 해 동안 노라는 그 일을 달력처럼 셌고, 그다음 몇 해 동안은 세지 않았고, 그 뒤로는 날씨처럼 말했다.

이웃 여자“아직 소식 없어? 둘 다 아직 젊잖아.” 언덕 아래 우물가에서 이웃 여자가 노라의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노라“올해는 비가 적다더라. 소식도 그런가 봐.” 노라가 먼저 웃었고, 웃음이 질문보다 길어서 질문이 먼저 끝났다. 칼은 그 웃음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모자 챙을 만지작거렸다.

칼“비 얘기는 왜 했나.” 언덕을 오르며 칼이 물었다.

노라“날씨는 아무도 탓 안 하잖아. 달력에 동그라미 치던 때는 묻는 사람마다 내가 미안했어. 비 얘기로 하면 아무도 안 미안해. 당신도 세지 마, 나 혼자 세다가 그만둔 걸로 충분해.”

칼“나는 처음부터 안 셌다.”

노라“알아. 당신은 달력도 안 봤지. 그래서 당신 몫까지 내가 셌던 거야.”

해는 하역기의 쇠사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왔다. 칼은 정비 구역에서 반장 아래 고참이 되었고, 노라는 시장 골목에 작은 수선 좌판을 냈다가 접었다가 다시 냈다. 현관 등의 전구는 열두 해 동안 아홉 번 갈렸고, 갈 때마다 칼은 소켓에 헝겊을 새로 감았다.

노라“당신은 전구보다 헝겊을 더 아껴.” 아홉 번째 전구를 갈던 날 노라가 사다리 아래에서 말했다. “전구는 사다 끼우기만 하면서 헝겊은 매번 새로 감잖아. 아무도 안 보는 데를.”

칼“헝겊은 아홉 번 다 썼고 전구는 아홉 번 다 나갔다. 아끼는 쪽이 오래 남는다.”

노라“그럼 나도 헝겊으로 할걸. 전구 말고.”

칼“헝겊은 소켓 안쪽에 감겨 있어서 밖에서는 안 보인다. 불이 켜져 있으면 다들 전구만 본다.”

노라“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안 보이는 데서 오래 가는 거.” 노라는 사다리 다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열 번째 전구 갈 때도 내가 여기 잡고 있을게.”

현관 계단에는 가끔 이웃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칼은 새벽에 퇴근하다가 계단에 웅크려 잠든 아이 셋을 차례로 넘어가야 하는 날이 있었다.

칼“계단에서 애들이 또 자고 있다. 오늘은 셋인데, 누구 집 애들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노라“엄마 아빠가 둘 다 야간 나간 집 애들이야. 우리 등이 언덕에서 제일 늦게까지 켜져 있으니까 그 밑으로 모여. 빵 껍질이랑 빈 실패 줬어, 실패는 굴리면서 놀더라.”

이웃 아이“아저씨 손은 왜 그렇게 까매요? 씻어도 안 지워져요?” 한번은 깨어 있던 아이 하나가 칼의 손등을 보고 물었다.

칼“안 지워진다. 기계를 오래 만지면 기계가 손등에 이름을 적어 둔다.”

이웃 아이“무슨 이름인데요?”

칼“기계 글씨라서 나도 못 읽는다. 읽을 줄 아는 사람을 찾으면 데려와라.”

아이는 칼의 손등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정말로 글씨가 있는지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칼은 손을 빼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얼굴이 굳은 사내가 아이에게 겁을 주지 않는 방법은 첫마디를 실없게 하는 것뿐이었고, 칼은 그 방법을 노라와 살면서 배웠다.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이들이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노라“이리 와 봐, 실 꿰는 거 가르쳐 줄게. 정비공 손이면 바늘 하나쯤이야.” 어느 겨울 노라가 바늘쌈을 펼치며 말했다.

칼의 손가락은 하역기 너트를 손으로 풀 만큼 굵었고, 바늘귀는 그 손가락 끝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칼은 실 끝에 침을 묻혀 열한 번을 찔렀고 열한 번 다 바늘귀 옆을 지나갔다.

노라“눈을 감고 해 봐. 당신은 사슬도 소리로 세잖아.”

칼“바늘귀는 소리를 안 낸다. 소리를 안 내는 고장은 정비공이 제일 싫어하는 거다.”

노라“그럼 내가 사슬 세는 법을 배울 테니까 당신은 바늘을 배워. 바꿔서 하자.”

칼“사슬은 하나부터 세면 되는데 바늘은 하나부터 세도 안 된다. 거래가 공정하지 않다.”

그날 밤 노라는 침대에 누워 입술을 움직이며 쇠사슬 소리를 세다가 마흔 남짓에서 잠들었다. 열두 번째 시도에서 실이 바늘귀를 통과했다는 것도 노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른여덟 살 되던 해 겨울, 둘은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칼이 사흘 연속 야간 근무를 자청했고, 그 사흘 가운데 하루가 노라의 생일이었다. 노라는 난로 옆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바늘만 움직였다.

노라“하역기는 당신 없어도 돌아.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칼“돌기는 돈다. 잘 돌지는 않는다.”

노라“나도 당신 없이 돌아. 잘 돌지는 않지만.”

칼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같은 말을 두 번까지는 말로 하고 세 번째에는 손으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말부터 막혔다. 막힌 말은 손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노라가 재봉틀 발판을 밟았을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일 년 내내 삐걱거리던 발판이었다. 굴대의 녹을 긁어내고 기름을 먹이고 헐거운 핀을 새로 깎아 끼운 흔적이 있었고, 재봉틀 옆 바닥에는 쇳가루 한 줌이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칼은 이미 정비 구역에 나가고 없었다.

노라“이게 사과야?” 그날 저녁 노라는 발판을 두 번 밟아 보이고 나서 물었다.

칼“맞다. 말로 하는 사과는 삐걱거린다.”

노라“말로도 해 봐. 딱 한 번만.”

칼“발판이 조용한 동안은 유효하다. 기름은 석 달마다 다시 먹이마.”

노라“석 달마다 사과하는 남자랑 사는구나.” 노라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고, 칼은 그 웃음이 끝나기 전에 외투를 벗어 걸었다. 그는 그 뒤로 석 달마다 발판에 기름을 먹였다.

노라“오늘이 사과받는 날이네.” 노라는 그때마다 발판을 두 번 밟아 보고 말했다.

마흔이 넘자 칼의 수염 자국에 흰 털이 섞이기 시작했다. 노라는 아침마다 그것을 하나씩 세어 주었다.

노라“오늘은 일곱. 어제보다 하나 늘었어.”

칼“일곱, 전날보다 하나 늘어남. 다음 점검은 내일 아침.” 칼은 정비 대장에 적는 말투로 받아 적는 시늉을 했다.

노라“열하나. 나 이제 안 셀래.” 흰 털이 열을 넘긴 날 노라는 그의 외투 깃에 묻은 흰 실밥을 떼어 주며 말했다. “실밥이랑 수염이 구별이 안 돼.”

칼“실밥은 떼면 되고 수염은 깎으면 된다. 둘 다 내일 또 생긴다.”

마흔세 살 되던 해, 노라는 좌판을 완전히 접고 보육 구역 수선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저녁마다 수선실에서 다 못 한 옷이 바구니에 담겨 언덕을 올라왔다.

칼“애들이 옷을 그렇게 험하게 입나.” 바구니에서 나온 바지 셋이 모두 같은 자리에서 터져 있는 것을 보고 칼이 말했다.

노라“험하게 입는 게 아니라 크는 거야. 무릎이랑 팔꿈치부터 해지는데, 해진 옷은 끝이 없어. 옷이 사람을 못 따라가는 거지.”

칼“그럼 처음부터 크게 지으면 된다. 정비 부품도 여유를 두고 깎는다.”

노라“수선실에서는 다 그렇게 해. 크게 지어서 소매를 두 번 접어 두고, 크면 하나씩 풀어. 당신이 생각한 건 남들도 다 생각했어.”

노라는 그 뒤로 저녁마다 수선실 이야기를 하나씩 들고 왔다. 칼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공구를 닦았고, 이야기가 끝나면 한마디씩 붙였다.

노라“오늘은 단추를 거꾸로 달아 달라고 떼쓰는 애가 있었어. 거꾸로 달면 단추 구멍이 웃는 얼굴이 된대.”

칼“단추는 거꾸로 달아도 잠긴다. 달아 줬나?”

노라“달아 줬지. 내일은 바지 무릎에 덧천 대신 그림을 그려 달라는 애 차례야. 해를 그려 달래.”

칼“무릎 그림은 제일 먼저 닳는다. 해 말고 사슬을 그려 줘라. 사슬은 반쯤 닳아도 사슬로 보인다.”

노라“오늘은 어떤 애가 내 골무를 빌려 가서 안 돌려줬어. 자기 손가락에 맞는다고.”

칼“맞으면 그 애 거다. 골무는 손에 맞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당신이 그랬다.”

노라“그건 어른 얘기고. 애들 손은 금방 커서 다음 달이면 안 맞아. 그럼 돌려받아야지.”

칼은 노라가 가져오는 작은 옷들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다. 노라는 그것을 알았지만 바구니를 그의 쪽으로 밀어 놓지 않았다. 기름 학교의 긴 침상 줄 끝마다 똑같은 크기의 작업복이 못에 걸려 있던 겨울을 그는 노라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V · 봄에

칼“차가 왜 이렇게 쓰나. 수선실에서 찻잎도 수선해 왔나.” 그날 밤 칼은 첫 모금을 마시고 얼굴을 찡그렸다.

노라“수선실 사람이 준 거야, 몸에 좋대. 쓴 건 좀 참아.”

칼“몸에 좋은 건 대개 쓰다. 쓴 게 다 몸에 좋은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고.”

노라“확인해 보고 싶으면 한 잔 더 마셔. 정비공은 확인하는 게 일이라며.”

칼“한 잔으로는 표본이 모자라다. 주전자째 마셔야 결론이 난다.”

노라는 주전자를 그의 쪽으로 밀어 놓았고, 칼은 정말로 두 잔을 더 마셨다. 결론은 끝내 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겨울 내내 그 쓴 차를 마셨고, 노라는 그가 찡그리는 얼굴을 보려고 찻잎을 조금씩 더 넣었다.

마흔네 살 되던 해 늦가을 밤, 노라는 난로 옆 의자에서 보육 구역 아이의 바지 무릎에 덧천을 대고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가 끓기 직전의 소리를 냈고, 불을 줄인 무쇠가 식으면서 째깍거렸다. 칼은 식탁에 팔꿈치를 괴고 차를 마셨다. 그날 노라는 수선실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들고 왔다.

노라“긴 복도에서 걸음을 세면서 다니는 꼬마가 있어. 다섯 살인데 입술을 이렇게 움직이면서 걸어.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대, 걸음을 세면 길을 안 잃는다고.”

칼“맞는 말이다. 배수로에서도 그렇게 한다.”

노라“오늘 그 애가 터진 무릎을 내밀면서 언제 다 되냐고 묻길래 나중에, 그랬거든. 그랬더니 이래.” 노라는 바늘을 든 채 턱을 당기고 목소리를 가늘게 만들었다. “나중에가 언제요?”

칼“좋은 질문이다. 그래서 대답은 해 줬나?” 칼은 차를 마시다 말고 소리 내어 웃었고, 웃느라 찻물이 수염에 묻었다.

노라“못 했지. 금요일이라고 했어. 그랬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서 금요일까지 며칠인지 세더라. 당신이랑 똑같아.”

칼“나는 손가락으로 안 센다. 입술로 센다.”

노라“그게 그거야.”

칼“그 복도는 몇 걸음이래?”

노라“백십이 걸음. 처음엔 나한테 백 걸음이라고 했어. 내가 백 걸음이구나 하니까 다시 가서 세고 오더니 백십이라고 고쳐 주더라. 틀린 걸 그냥 두면 안 된대.”

칼“그 애는 정비공을 해도 되겠군. 틀린 숫자를 그냥 두지 않는 건 견습 첫날 가르치는 거다. 대부분은 첫날 배우고 둘째 날 잊어버린다.”

칼이 궁금했던 것은 복도의 길이였고, 백십이 걸음이면 다섯 살 보폭으로 오십 미터 남짓이라는 계산을 머릿속에서 이미 끝냈다. 이름은 그 계산에 필요하지 않았다.

노라“우리도 하나 데려오자.” 노라가 바늘을 덧천에 꽂아 두고 말했다. 농담을 할 때 노라는 바늘을 멈추지 않았다. “수선실 사람들 말로는 보육 구역은 봄에 서류를 받는대. 겨울에 애들을 옮기면 감기가 든다고.”

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비공의 집이었다. 한 주에 사흘은 밤에 집이 비었고, 손등의 기름 줄은 비누로도 지워지지 않았으며, 그는 아홉 살에 밥이 나온다는 종이 한 장으로 집을 떠난 아이였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그가 입 밖에 낸 것은 그중 하나뿐이었다.

칼“정비공 집이다. 한 주에 사흘은 밤에 집이 빈다.”

노라“그래서 등이 있잖아. 불 켜진 문은 사람이 있는 문이라니까. 계단에서 자던 애들 봤잖아, 애들도 그건 알아.”

칼“그 애들은 돌아갈 집이 따로 있었다.”

노라“그러니까 돌아갈 집이 없는 애를 데려오자는 거야. 수선실 애들한테는 밤에 불 켜 놓고 기다려 주는 문이 하나도 없어.”

칼“나중에.”

노라“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노라는 웃지 않고 말했다. 같은 말이 오래전 셋방의 대야 앞에서 오간 적이 있었다. 칼은 이번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라가 방금 내어 준 계절 하나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칼“봄에.”

노라“약속이야?”

칼“약속이다.”

노라는 그 대답을 한 번 더 듣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대신 바구니 밑에서 회색 모직 한 필을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정비 구역에서 나온 헌 작업복을 뜯어 빨아 둔 천이었고, 아직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노라“다섯 살짜리를 데려와도 두 치수 크게, 일곱 살 치수로 지을 거야. 데려오면 금방 크니까. 소매는 두 번 접어 두고.”

칼“더 어린 애가 오면?”

노라“그럼 세 번 접지 뭐.”

칼“합리적이군. 그 천이면 내 작업복 냄새가 날 텐데, 애가 정비공 냄새를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노라“좋아하게 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노라는 분필을 들어 모직 위에 첫 선을 그었다. “싫어하면 봄까지 빨면 되고.”

칼“빨아도 안 빠진다. 내 손등이 증거다.”

노라“그럼 그 애는 당신 손등부터 좋아하게 되겠네. 기계 글씨 읽는 법이나 가르쳐 줘.”

노라“애는 어느 방에서 재워? 작은 방은 당신 공구가 반이야.” 노라가 분필 선을 따라 가위를 대며 물었다.

칼“공구는 정비 구역으로 옮긴다. 작은 방 창이 부두 쪽이니까 밤에 사슬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시끄럽겠지만 한 달이면 그 소리가 없으면 못 자게 된다.”

노라“그럼 그 애도 세다가 자겠네. 걸음 세는 애가 오면 사슬도 금방 셀 거야.”

칼“세는 애가 둘이면 집이 시끄러워진다. 당신만 조용하면 된다.”

노라“나는 가위질하잖아. 가위도 세 봐, 사슬이랑 박자가 다를 거야.”

그날 밤 칼은 침대에 누워 쇠사슬 소리를 셌다. 노라는 난로 옆에서 늦게까지 가윗질을 했고, 가위가 모직을 자르는 소리가 쇠사슬 소리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칼은 두 소리를 따로 세다가 어느 쪽을 몇까지 셌는지 잊어버렸다. 세던 것을 잊고 잠든 밤은 그가 기억하는 한 그날이 처음이었다.

이튿날 아침 칼은 작은 방의 공구 상자 하나를 어깨에 메고 출근했다. 정비 구역의 자기 사물함 옆에 그것을 내려놓자 반장이 이사라도 가느냐고 물었다. 칼은 방 하나를 비우는 중이라고만 대답했다. 작은 방에는 아직 상자 넷이 남아 있었고, 그는 하나씩 옮길 생각이었다. 작은 방의 창을 열면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가장 잘 들렸다.

VI · 하역기 아래

봄은 두 번 지나갔다. 첫 봄에는 종탑 하역기의 쇠사슬을 통째로 가는 공사가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칼은 그 석 달의 대부분을 부두에서 잤다. 둘째 봄에는 보육 구역에 낼 서류를 노라가 받아 왔고, 서류는 식탁 서랍에 들어갔다. 서랍이 왜 다시 열리지 않았는지 칼은 설명하지 못했다. 원인을 모르는 일을 적는 칸이 정비 대장에는 있었지만 집에는 없었다.

마흔여섯 살 되던 해 겨울, 부두에 눈이 내린 밤이었다. 종탑 하역기 하나가 저녁 교대 직후에 멈추었고, 칼은 견습 하나를 데리고 그 밑으로 들어갔다. 레일은 얼어서 장갑 위로도 손바닥을 물었다. 도르래 축에 감긴 쇠사슬 한 고리가 얼음에 물려 비틀려 있었고, 하역기는 그 고리 하나 때문에 짐 사십 톤을 공중에 든 채 서 있었다.

멈춘 하역기 아래는 부두에서 가장 조용한 자리였다. 옆 하역기들은 눈 속에서도 짐을 내리고 있었고, 그 쇠사슬 소리가 이쪽 레일까지 건너왔다. 칼은 옆 사슬의 박자를 들으며 이쪽 사슬이 원래 내야 할 박자를 머릿속으로 맞추어 보았다. 빠진 소리를 아는 것이 고칠 자리를 아는 것의 절반이었다.

견습“오르벡 씨, 불로 녹이면 안 됩니까? 창고에 등유 버너가 있는데요.”

칼“안 된다. 고리 하나만 달구면 그 고리만 늘어나고, 늘어난 고리는 오늘 밤은 버티다가 다음 달에 끊어진다. 사십 톤 밑에 누가 서 있을 때.”

견습“그럼 어떻게 합니까?”

칼“축을 반 바퀴 거꾸로 돌려서 얼음을 깬다. 손으로 한다. 렌치 이리 줘.”

칼은 렌치를 축의 너트에 걸고 몸무게를 실었다. 왼쪽 무릎이 언 레일 위에서 시큰거렸고, 그는 무릎 대신 어깨로 힘을 옮겼다. 축이 끽 소리를 내며 한 마디 움직였다. 얼음이 깨지는 가는 소리가 쇠사슬을 따라 위로 올라갔고, 칼은 그 소리가 몇 고리째에서 멈추는지 귀로 셌다. 위에서 떨어진 얼음 부스러기가 외투 깃 안으로 들어가 목덜미에서 녹았다.

견습“소리만 듣고 어디가 깨졌는지 압니까?”

칼“안다. 열일곱 해쯤 듣고 나면 너도 알게 된다, 들은 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세어 두기만 하면.”

견습“세는 건 어떻게 세는데요?”

칼“하나부터 센다. 둘부터 세는 놈들이 꼭 하나를 놓친다.”

견습“오르벡 씨는 겨울 야간을 왜 자청하십니까? 다들 어떻게든 피하는데요.” 견습이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손전등을 든 손이 추위에 떨려 불빛이 사슬 위에서 흔들렸다.

칼“겨울 사슬은 정직하다. 얼면 언 자리에서 소리가 나니까. 여름 사슬은 늘어나서 어디가 아픈지 감춘다.”

견습“사슬도 아픈 데를 감춥니까?”

칼“사람만큼은 아니다. 불빛이나 똑바로 비춰라, 네 손이 사슬보다 더 떨린다.”

견습은 손전등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눈은 그치지 않았다. 부두의 수은등 아래로 눈송이가 비스듬히 지나갔고, 멈춘 하역기 위에 쌓인 눈이 바람에 밀려 사슬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렸다. 바다 쪽에서 화물선 한 척이 기적을 짧게 울렸다. 짐을 기다리는 배였다.

견습“대장실 서랍에 배수로 지도 있잖습니까. 사다리 그림 옆에 동그라미 하나 쳐진 거요. 그거 오르벡 씨가 그린 거죠?”

칼“그렇다. 그 지도를 언제 봤나?”

견습“들어온 첫 주에 반장님이 보여 주셨어요. 이 동그라미가 뭔지 아는 사람만 그 사다리를 내려가라고 하시던데요.”

칼“반장이 맞다. 그 칸은 헐겁다. 열일곱 해 지났으니 지금은 더 헐겁겠지.”

얼음이 다시 물리기 전에 잠깐 기다려야 했다. 칼은 레일에 등을 기대고 보온병의 뚜껑을 열어 견습에게 먼저 내밀었다. 김이 눈발 속으로 흩어졌다. 견습은 두 손으로 뚜껑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뜨거워서 혀를 내밀었다.

견습“오르벡 씨는 정비공 그만두시면 뭐 하실 겁니까? 다들 은퇴하면 바다낚시 간다던데요.”

칼“은퇴한 정비공은 자기 집 경첩을 고친다. 평생 남의 기계만 고쳤으니 그때 가서야 자기 집 문이 삐걱거리는 게 들린다.”

견습“오르벡 씨 집 문은 안 삐걱거릴 것 같은데요.”

칼“안 삐걱거린다. 그러니까 나는 은퇴를 못 한다, 은퇴해도 할 일이 없으니까.”

견습이 웃었고, 칼은 렌치를 고쳐 잡았다. 반 바퀴를 마저 돌리면 얼음이 다 빠질 참이었다. 감시소 쪽에서 등불 하나가 눈발을 헤치고 다가오는 것이 보인 것은 그때였다. 등불은 사람의 걸음에 맞추어 흔들렸고, 눈 위에 발자국을 한 줄로 남기며 하역기 다리 쪽으로 곧장 왔다. 당직이었다. 당직은 감시소를 비우는 사람이 아니었고, 칼은 열일곱 해 동안 그가 감시소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칼은 렌치를 쥔 채 등불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견습도 손전등을 내리고 그쪽을 보았다. 등불의 주인은 하역기 다리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한 번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왔다. 눈 위의 발자국이 그 자리에서만 두 겹으로 겹쳤다.

당직“오르벡 정비공이오? 감시소로 전화가 와 있소, 지금 바로 와 달라고 하오.”

당직은 하역기 다리 옆에 서서 등불을 낮추었고, 그 말을 하는 동안 칼의 얼굴 대신 레일을 보았다. 칼은 누가 건 전화인지 묻지 않았다. 축은 아직 반 바퀴가 남아 있었다.

칼“반 바퀴만 돌려라, 더 돌리지 말고.” 칼이 렌치를 쥔 채 견습에게 말했다.

견습“예. 반 바퀴만 돌리겠습니다.”

칼은 렌치를 너트에서 빼어 레일 위에 내려놓았다. 언 쇠와 쇠가 닿으며 짧고 높은 소리가 났다. 그는 장갑을 벗어 외투 주머니에 넣고 손등을 외투 자락에 한 번 문질렀다. 기름 줄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당직의 등불을 따라 걸었고, 레일 위에는 렌치가 남았다.

세 번째 밤

VII · 보일러 뒤

셋째 날 밤 칼은 언덕 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날 낮에 집에 들러 가방 하나를 쌌고, 가방을 싸는 동안 난로 옆 의자 쪽은 보지 않았다. 가방 안에는 작업복 두 벌과 면도칼과 수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정비 구역 뒤편 보일러실에는 야간 근무자들이 번갈아 눈을 붙이던 간이침대가 하나 있었다. 칼은 그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보일러가 쉭쉭 숨을 쉬었고, 증기관이 데워지면서 똑딱거리는 소리가 벽을 따라 돌았다. 보일러 당번이 화구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보일러 당번“오르벡, 거긴 사람 자는 데가 아니야. 보일러가 밤새 숨을 쉬어서 귀가 먹먹해져.”

칼“안다. 그래서 왔다.”

보일러 당번“집이 언덕 위잖아. 거긴 조용하고 따뜻하지.”

칼“조용하다.”

칼은 대답을 거기서 멈추었다. 집은 조용했고, 조용한 것이 문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리가 많은 곳에서는 사라진 소리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당번은 더 묻지 않고 화구에 석탄을 한 삽 넣었다.

간이침대는 짧았다. 누우면 발목부터 침대 끝 밖으로 나갔고, 칼은 공구함 하나를 끌어다 발밑에 받쳤다. 높이를 맞추느라 공구함 안의 렌치를 두 개 꺼냈다가 하나를 도로 넣었다. 높이가 맞자 더 할 일이 없었으므로 그는 일어나 앉았다.

보일러 당번은 그가 일어나 앉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구의 불빛이 간이침대 끝에 받친 공구함의 모서리를 붉게 비추었다. 칼은 공구함의 걸쇠가 헐거운 것을 보고 손톱으로 한 번 눌러 보았고, 내일 고치기로 했다.

자정 무렵 반장이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야간조 누군가가 알린 모양이었다. 반장은 간이침대 위의 가방과 침대 끝에 받쳐 둔 공구함을 차례로 보았고, 그 둘을 보는 데 걸린 시간만큼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반장“이 침대는 야간조가 돌아가며 눈 붙이는 거다. 자네가 차지하면 야간조는 어디서 자나.”

칼“야간조를 내가 서면 된다. 그러면 침대가 남는다.”

반장“한 주 내내 야간을 서겠다는 소리야? 사흘이면 그 무릎이 먼저 그만두자고 할 거다.”

칼“무릎이 그만두자고 하면 그때 다시 정하겠다.”

반장“사흘만 여기서 자. 사흘 지나면 집에 가는 거다.”

칼“안 된다.”

반장은 그 대답을 듣고 한참 서 있었다. 열일곱 해 동안 칼에게서 안 된다는 대답을 들은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었고, 그때마다 칼이 옳았다. 반장은 문을 나서다 말고 보일러 당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장“담요 한 장 더 내줘라. 여기 밤은 집보다 길다.”

보일러 당번“반장이 담요를 내주라는 건 여기 있어도 된다는 소리야.” 당번이 선반에서 꺼낸 담요를 간이침대 위에 던지며 말했다. “석탄 냄새가 배어 있긴 한데, 추운 것보다는 낫지.”

칼“석탄 냄새는 괜찮다. 기름 냄새보다 순하다.”

보일러 당번“자네 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났는데?”

칼은 대답하지 않고 담요를 폈다. 당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화구 쪽으로 돌아앉았다. 보일러실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대답이 오지 않는 질문을 화구에 넣은 석탄처럼 여겼다. 넣고 나면 꺼내지 않았다.

그 밤 칼은 정비대의 볼트 상자를 모두 쏟았다. 크기별로 나뉘어 있던 볼트를 다시 나사산이 닳은 정도에 따라 나누었다. 손끝으로 나사산을 쓸어 보고, 너트에 끼워 돌려 보고, 헐거운 것은 왼쪽에 빡빡한 것은 오른쪽에 놓았다.

보일러 당번“밤새 그걸 왜 하나. 볼트가 밤사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내일 낮에 해도 볼트는 그대로 있어.” 당번이 화구 앞에서 고개만 돌려 물었다.

칼“손이 바쁘면 다른 데가 안 바쁘다.” 칼은 고개를 들지 않고 나사산 하나를 엄지로 쓸었다.

견습“밤새 하신 겁니까? 이 볼트들, 지난달에 제가 다 정리한 건데요.” 새벽 교대에 들어온 견습이 쏟아진 상자들을 보고 말했다. 하역기 밑에서 축을 마저 돌렸던 그 견습이었다.

칼“크기별로는 했더군. 나사산 닳은 대로는 안 했다.”

견습“그런 분류도 있습니까?”

칼“오늘부터 있다.”

견습은 고개를 끄덕이고 빈 상자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칼은 견습이 쓰는 글자를 보다가 고쳐 주지 않았다. 헐거움을 헐검으로 적은 이름표가 하나 있었는데, 일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견습“그날 레일 위에 두고 가신 렌치요.” 이름표를 다 붙인 견습이 공구함 하나를 열어 보였다. 기름걸레로 닦은 렌치가 맨 아래 칸에 눕혀져 있었다. “축은 반 바퀴만 돌렸습니다. 렌치는 제가 닦아서 여기 넣어 뒀어요.”

칼“잘했다. 반 바퀴로 얼음은 다 빠졌나?”

견습“다 빠졌습니다. 하역기는 그날 새벽 다섯 시에 다시 돌았어요. 고리 하나도 안 늘어났고요.”

칼은 렌치를 꺼내지 않고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그 렌치는 그 뒤로 몇 달 동안 그 칸에 그대로 있었고, 칼은 같은 치수의 다른 렌치를 썼다. 견습은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새벽 교대 종이 울리자 칼은 보일러실 구석의 세면대에서 면도를 했다. 거울은 증기에 흐려져 있었고, 그는 손바닥으로 거울을 한 번 닦고 그 자리가 다시 흐려지기 전에 면도를 끝냈다. 보일러 당번이 그 모습을 보다가 수건을 던져 주었다.

보일러 당번“여기서 면도까지 하면 아주 사는 거네. 오늘 밤에도 올 건가?”

칼“온다. 내 가방이 저기 있다.”

보일러 당번“가방이야 들고 가면 그만이지.”

칼“들고 갈 데를 정하면 들고 가겠다. 아직 안 정했다.”

당번은 수건을 돌려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칼은 작업복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정비대로 나갔다. 그 아침 그의 얼굴은 다른 아침과 다르지 않았고, 정비 구역 사람들은 그 다르지 않음을 보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밤 언덕 위 집의 현관 등은 켜지지 않았다. 노라가 정해 둔 규칙대로라면 사람이 밖에 있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 등을 켤 사람은 집 안에 없었고, 칼은 그 규칙을 누가 대신 지켜야 하는지를 따지지 않았다. 따지기 시작하면 답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VIII · 된다

석 달이 지났다. 부두의 얼음이 가장자리부터 녹기 시작했고, 칼은 보일러실 간이침대에서 자고 정비대에서 먹고 하역기 밑에서 일했다. 한 주에 엿새를 야간으로 섰고, 무릎은 아직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다. 집에는 공구를 가지러만 갔다.

한 번은 낮에 큰 파이프 렌치를 찾으러 언덕을 올라갔다. 현관 등은 꺼져 있었고, 부엌의 난로는 석 달 동안 불이 들어가지 않아 무쇠가 손바닥보다 차가웠다. 식탁 서랍은 닫혀 있었다. 난로 옆 의자 위에는 회색 아이 외투가 그대로 놓여 있었는데, 마지막 소매 하나가 몸판에 반쯤만 붙어 있었고 솔기 끝에 바늘이 꽂힌 채였다. 칼은 공구 상자에서 렌치를 찾아 들고 의자 옆을 지나 나왔다. 현관문을 잠그는 데 열쇠를 두 번 돌렸다. 한 번이면 잠기는 자물쇠였지만, 빈집의 자물쇠는 두 번 돌려 두는 것이 정비공의 셈으로는 맞았다. 계단 세 칸을 내려오는 동안 그는 문 위의 등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동료“오르벡, 이번 주 금요일 야간을 나랑 바꿔 줄 수 있나? 딸애 생일이라서 그래. 대신 다음 달에 두 번 서 줄게, 약속하지.” 점심때 정비대 옆에서 동료 하나가 도시락 뚜껑을 열며 물었다.

칼“된다.”

동료“고맙네. 자네도 약속하는 거지, 금요일 돼서 딴소리하기 없기로?”

칼“된다고 했다.”

동료는 그 대답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칼의 대답에서 약속이라는 말이 빠진 것은 그해 겨울부터였고, 빠진 자리는 된다와 안 된다로 충분히 메워졌다. 된다고 한 일은 그는 반드시 했다. 안 된다고 한 일은 처음부터 맡지 않았고, 그 사이에 있는 일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동료“요새 자네 농담을 통 못 들었어. 전에는 하역기 하나 서면 농담이 세 개씩 붙었잖아. 사슬에 하나, 반장한테 하나, 나한테 하나.”

칼“합리적이로군.”

동료“뭐가 합리적인데?”

칼은 대답하지 않고 렌치를 들었다. 그 말은 기관장에게서 가져온 말이었고, 예전에는 그 뒤에 농담이 하나씩 붙었다. 이제는 그 말이 문장의 끝이었다. 동료는 도시락 뚜껑을 닫고 칼의 등을 한 번 보았다가 자기 일로 돌아갔다.

견습“오르벡 씨, 지난겨울에 축 정렬하는 법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하역기 공사 끝나면요.” 오후에 견습이 정비대 너머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달엔 될까요?”

칼“된다. 내일 아침 교대 끝나고 삼 번 하역기 밑으로 와라.”

견습“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칼“내일 아침이라고 했다. 늦으면 혼자 한다.”

이튿날 아침 칼은 교대가 끝나기 십 분 전부터 삼 번 하역기 밑에 서 있었다. 견습이 뛰어왔을 때 축 덮개는 이미 열려 있었고, 칼은 늦었다는 말 대신 덮개 안쪽의 눈금부터 읽어 주었다. 견습은 그날 처음으로 축의 눈금을 혼자 맞추었다.

반장“언덕 위 집은 아직 세를 내나?” 그달 말 급료 봉투를 나눠 주던 반장이 칼의 봉투를 내밀다 말고 물었다. “안 쓰는 집에 세를 내는 건 정비공 셈법이 아닌데.”

칼“낸다. 안 쓰는 게 아니라 공구를 거기 두는 거다.”

반장“공구는 여기 공구함에 다 들어가잖나.”

칼“다 들어가지는 않는다. 큰 파이프 렌치가 있다.”

반장은 그 렌치 하나 때문에 집세를 내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봉투를 건넸다. 칼은 봉투를 받아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큰 파이프 렌치는 그 집 창고에 있었고, 칼은 석 달 동안 그것을 두 번 가지러 갔다.

보일러실 문을 열면 언덕이 보였다. 밤에 문을 열고 화구의 열기를 빼낼 때마다 칼은 언덕 중턱의 불빛들을 셌다. 집집마다 현관 등이 하나씩 켜져 있었고, 그 줄 가운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세지 않아도 어디인지 알 수 있었으므로 그는 그 자리를 건너뛰고 셌다.

석 달 사이에 칼이 다니는 길이 하나 바뀌었다. 정비 구역에서 부두로 나가는 길은 감시소 계단 앞을 지나는 것이 가장 짧았는데, 그는 그 길 대신 창고 뒤로 돌아 레일을 따라 걷는 길을 택했다. 백 걸음쯤 더 걸리는 길이었다. 한 번은 감시소 계단에 나와 있던 당직이 레일 쪽의 그를 보고 불렀다.

당직“오르벡 정비공, 요새는 길을 돌아서 다니시는구려. 무릎에 좋지 않을 텐데.”

칼“이쪽 길이 레일 이음매를 보기 좋다. 걸으면서 점검이 된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칼은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레일 이음매를 하나씩 보았고, 석 달 동안 헐거운 이음매 둘을 찾아 조였다. 당직은 고개를 끄덕이고 감시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유의 절반만 말한 대답도, 그 절반이 사실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밤이 되자 보일러 당번이 화구 앞에서 차를 두 잔 따랐다. 한 잔을 칼 쪽으로 밀어 놓고, 자기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간이침대를 턱으로 가리켰다.

보일러 당번“석 달째야. 침대가 자네 모양으로 꺼졌어. 이제 다른 사람이 거기 누우면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걸.”

칼“그럼 다른 사람은 눕지 마라.”

보일러 당번“농담이지?”

칼“아니다. 침대가 꺼진 모양이 바뀌면 내가 잠을 못 잔다.”

당번은 웃으려다 그만두고 차를 마셨다. 칼은 간이침대에 누워 공구함에 발을 올리고 보일러의 숨소리를 셌다. 쇠사슬 소리는 보일러실 벽을 넘어오지 못했다. 보일러는 사슬보다 박자가 빨라서, 세다 보면 금방 셀 수 없는 숫자에 닿았고 그러면 잠이 왔다. 그것이 그가 석 달 동안 찾아낸 유일한 방법이었다. 일에 지장이 없으면 정비공은 그것을 고치지 않는다.

VII · 의자

셋째 날 밤 칼은 언덕을 올라갔다. 현관 등은 꺼져 있었다. 그는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 세 곳을 뒤졌고, 그동안 계단 세 칸은 어둠 속에서 발밑에 있었다. 문을 열자 집 안의 공기가 바깥만큼 차가웠다. 사흘 동안 아무도 난로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엌의 난로 옆에 의자가 있었다. 등받이가 낮은 의자였고, 앉는 자리의 천은 노라가 두 번 갈아 씌운 것이었다. 그 위에 회색 외투가 개켜져 있었다. 일곱 살 치수의 아이 외투였고, 마지막 소매 하나가 몸판에 반쯤만 붙어 있었다. 솔기 끝에 바늘이 꽂힌 채 실이 의자 다리 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칼은 의자를 치우러 왔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그는 그렇게 정했다. 의자를 창고에 넣고 외투를 상자에 넣으면 부엌은 그냥 부엌이 된다.

그는 먼저 외투를 들었다. 외투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바늘에 꿰인 실이 따라 올라오다가 팽팽해졌다. 실을 끊으려면 이로 끊어야 했다. 그는 외투를 다시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의자를 들었다. 의자는 외투보다 무거웠고, 다리 네 개가 바닥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집 안의 유일한 소리였다. 그는 의자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다리 네 개가 바닥에 닳아 생긴 자국에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자정이 넘어 누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옆집 여자였고, 보자기에 싼 빵 한 덩이를 들고 있었다.

이웃 여자“불이 꺼져 있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나길래요.” 여자는 빵을 내밀었다. “지난달에 우리 애 바지를 대 주시고는 값을 안 받으셨어요.”

칼“아이 옷 값은 안 받았다. 그 사람 규칙이었다.”

이웃 여자“그 외투, 소매 하나가 남았네요.” 여자의 눈이 칼의 어깨 너머 난로 옆 의자로 갔다. “제가 마저 달아 드릴까요? 그 솜씨만큼은 못 해도 소매 하나는 달 줄 알아요.”

칼“두어라.”

이웃 여자“그래도 다 지은 옷이 낫지 않아요? 반쯤 붙은 소매는 보기에도 마음이 쓰여서요.”

칼“두라고 했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칼은 세 번째 말을 하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여자는 그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손은 의자를 붙잡고 있다기보다 의자가 거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손처럼 보였다.

이웃 여자“현관 등이라도 켜 두세요. 언덕길이 어두워요.”

칼“밖에 있는 사람이 없다.”

이웃 여자“내일 아침엔 국이라도 끓여서 가져다 드릴게요. 빵만 드시면 속이 버석해요.”

칼“아침엔 없다. 출근한다.”

여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고 돌아갔다. 칼은 빵을 식탁에 올려 두고 의자 옆 바닥에 앉았다. 등을 벽에 대고 왼쪽 무릎을 펴자 무릎이 찬 마루에 닿아 욱신거렸다. 그는 난로를 피우지 않았다. 불을 피우면 아침까지 불을 지켜야 했고, 불을 지키는 사람은 난로 옆 의자를 보게 되어 있었다.

대신 그는 난로 문을 한 번 열어 보았다. 사흘 전의 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부지깽이는 재 속에 반쯤 꽂힌 채였다. 재를 긁어내는 것은 다음 불을 피울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그는 난로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걸쇠는 소리 없이 걸렸다. 열여섯 해 전 이사 온 첫날 밤에 그가 기름을 먹여 둔 걸쇠였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면 식탁 서랍의 손잡이가 눈높이에 있었다. 서랍 안에는 보육 구역에 낼 서류가 들어 있었고, 칸은 반쯤 채워져 있었다. 노라의 글씨로 채운 칸과 비워 둔 칸이 있었다. 비워 둔 칸 가운데 하나에는 그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칼은 서랍을 열지 않았다. 열면 그 칸을 보게 되고, 보면 채우거나 비워 두거나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했다.

의자 위 외투에서 늘어진 실 끝이 난로 쪽에서 들어오는 외풍에 조금씩 흔들렸다. 그는 그 흔들림을 오래 보았다. 실은 바늘에 꿰인 채였고, 바늘은 솔기 끝에 반쯤 박혀 있었다. 바늘을 빼면 실이 풀리고, 실이 풀리면 반쯤 붙은 소매가 떨어진다. 고장 난 부품은 손대기 전의 상태부터 기록해 두는 것이 정비공의 순서였고, 그는 그 상태를 눈으로 기록해 두었다.

그는 쇠사슬 소리를 셌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밤에는 이 집에서 원래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오늘 밤도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 점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숫자가 수백을 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 했는지 그는 세지 않았다.

동이 트기 전 그는 벽에 기댄 채 잠깐 졸았다. 그를 깨운 것은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빠진 자리였다. 바람이 바다 쪽으로 돌면서 언덕까지 건너오던 쇠사슬 소리가 잠깐 끊긴 것이었다. 칼은 눈을 뜨고 소리가 다시 건너올 때까지 숨을 고르지 않았다. 바람이 돌아오고 사슬 소리가 다시 들리자 그는 그 소리를 하나부터 다시 셌다.

창이 회색으로 밝아 올 무렵 그는 일어나 외투 자락의 먼지를 털었다. 의자와 외투는 그대로였다. 그는 식탁의 빵을 반으로 잘라 반쪽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문을 닫았다. 언덕을 내려가 정비 구역으로 출근했다.

견습“댁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눈이 빨가십니다.” 정비 구역 문 앞에서 견습이 그를 보고 물었다.

칼“바닥이 찼다. 오늘 밤부터는 보일러실에서 잔다. 당번한테 담요 한 장 남는지 물어봐라.”

견습은 왜 집을 두고 보일러실에서 자느냐고 묻지 않고 보일러실 쪽으로 뛰어갔다. 칼은 주머니의 빵 반쪽을 꺼내 정비대 위에 올려놓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날 밤부터 그는 보일러실 뒤의 간이침대에서 잤다.

VIII · 납기 칸

석 달이 지났다. 칼은 보일러실 뒤 간이침대에서 잤고, 집에는 공구를 가지러 갈 때만 들렀다. 들를 때마다 부엌을 지나야 했고, 의자는 치워지지 않았다. 의자 옆을 지날 때 그는 걸음을 늦추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 일정한 걸음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일이었다. 현관 등은 석 달 동안 한 번도 켜지지 않았다.

이웃 여자“아직 등은 안 켜시네요.” 한번은 공구를 들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옆집 여자가 빨래를 걷다 말고 말했다.

칼“집에 사람이 없다.”

여자는 지금 그 집에서 나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칼은 모자를 조금 들었다 놓고 언덕을 내려갔다.

며칠 뒤 해 질 녘에 다시 공구를 가지러 올라갔을 때, 현관 계단에 옆집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예전에 그의 손등을 문질러 보던 아이였고, 그새 키가 한 뼘쯤 자라 있었다. 아이는 칼을 보고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올려다보았다.

옆집 아이“아저씨, 왜 이제 불 안 켜요? 여기 앉아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올 때 나를 못 찾아요.”

칼“켜는 사람이 없다.”

옆집 아이“아저씨가 켜면 되잖아요. 아저씨는 등도 고칠 줄 알잖아요.”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 앞에서는 욕도 담배도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날은 대답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공구를 챙겨 나와 현관문을 잠그고 아이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한 번 돌아보았을 때 아이는 어두운 문 앞에 그대로 앉아 언덕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칼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언덕을 올라올 때까지 길 모퉁이의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고,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는 것을 보고 나서 정비 구역으로 내려갔다.

그 뒤로도 해 질 녘에 공구를 가지러 올라간 날이면 그는 그 모퉁이 가로등 아래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내려갔다. 계단에 아이가 없는 날도 있었고 있는 날도 있었다. 있는 날에는 아이의 어머니가 올라올 때까지 서 있었고, 없는 날에는 가로등이 한 번 깜박이는 것을 보고 내려갔다. 가로등의 소켓도 바닷바람에 삭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맡은 등이 아니었다.

반장“오르벡, 종탑 하역기 셋 정기 점검 일정 좀 써 줘. 해마다 봄에 하던 거.” 반장이 작업 일정표를 정비대 위에 내려놓았다. 반장의 머리는 노조 회관 부엌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절반쯤 하얘져 있었다.

칼은 일정표의 납기 칸에 삼월 십이일이라고 적었다. 둘째 줄에는 사월 이일, 셋째 줄에는 사월 이십일일이라고 적었다. 숫자는 그의 다른 글씨보다 조금 더 꾹꾹 눌려 있었다.

반장“그냥 봄이라고 적지. 열일곱 해 동안 그렇게 썼잖아. 날짜는 공사 들어가면 어차피 바뀌어.”

칼“날짜로 적는다. 날짜는 틀리면 고쳐 적을 수 있다.”

반장“봄은 못 고치나?”

칼“봄은 칸이 너무 넓다.”

반장은 칼의 얼굴을 한동안 보았다. 노조 회관 부엌에서 화덕을 고치던 날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정비 구역에 반장 하나뿐이었다. 그는 일정표를 받아 들었다. 칼은 그 뒤로 어떤 서류의 어떤 칸에도 계절을 적지 않았다. 날짜를 적은 일은 날짜 안에 끝냈고, 끝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에는 날짜를 적지 않았다.

반장“예전 같으면 자네가 여기서 한마디 붙였을 텐데. 봄은 반장 마음이 너무 넓어서 칸이 넓다든가.”

칼“합리적이로군.”

반장은 그것이 대답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듣고 일정표를 둘둘 말았다. 칼의 입에서 그 말은 농담의 머리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 그 말 뒤에는 아무것도 따라 나오지 않았고, 반장은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하지 않았다.

반장“하나만 묻자. 집에는 언제 들어갈 건가?” 반장이 일정표를 겨드랑이에 끼고 돌아서다가 다시 물었다. “그것도 날짜로 대 봐.”

칼“날짜가 없다.”

반장“날짜가 없으면 계절이라도.”

칼“계절은 안 쓴다고 했다.”

반장은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오후 칼은 반장이 말없이 놓고 간 하역기 부품 목록을 받아 들고 그 목록의 부품을 해 지기 전에 모두 손보아 놓았다.

그 주에 칼은 정비 구역의 모든 작업 일정표를 한 장씩 넘겨 보며 계절로 적힌 칸을 찾아 날짜로 고쳐 적었다. 가을 중이라고 적힌 칸은 십월 이십일이 되었고, 겨울 전이라고 적힌 칸은 십일월 삼십일이 되었다. 반장은 고쳐진 일정표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견습“오르벡 씨, 삼 번 하역기 브레이크는 언제까지 됩니까? 선적 담당이 자꾸 물어봐서요.” 오후에 견습이 정비대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칼“목요일 오후 세 시.”

견습“대충 목요일쯤이라고 전해도 될까요?”

칼“세 시라고 전해라. 세 시에 끝난다.”

브레이크는 목요일 오후 두 시 오십 분에 끝났다. 칼은 남은 십 분 동안 공구를 닦았고, 세 시 정각에 선적 담당에게 끝났다고 알렸다. 견습은 그 십 분을 옆에서 내내 지켜보았다.

견습“십 분 일찍 끝났는데 왜 기다리셨어요? 바로 알려 주면 선적 담당이 좋아했을 텐데요.”

칼“세 시라고 했다. 두 시 오십 분이라고는 안 했다. 일찍 끝난 건 운이 좋았던 거고, 운은 다음번 납기 칸에 적을 수가 없다.”

견습“그럼 다음번에 늦어지면요?”

칼“늦어질 일에는 처음부터 날짜를 안 적는다. 그게 날짜를 지키는 방법이다.”

견습은 그 말을 수첩 귀퉁이에 받아 적었다. 칼은 견습이 무엇을 적는지 들여다보지 않았고, 견습은 그 뒤로 자기 납기 칸에도 날짜만 적었다.

그 밤 칼은 간이침대에 누워 쇠사슬 소리를 찾았다. 보일러실 벽 너머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신 보일러의 숨소리를 셌고, 숫자가 수백을 넘을 무렵 잠들었다. 언덕 위 집의 부엌에서는 의자가 바닥의 닳은 자국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VII · 수선실 문

셋째 날 밤 칼은 집에 들렀다가 바느질 바구니 하나만 들고 나왔다. 노라가 수선실에서 일감을 담아 오던 바구니였고, 그 안에 실타래와 바늘쌈과 단추 상자와 골무가 들어 있었다. 아이 외투는 넣지 않았다. 외투는 난로 옆 의자 위에 있었고, 그는 그것을 바구니에 넣을지 말지를 정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정하지 못한 것은 그 자리에 두고 나오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보육 구역은 부두에서 언덕 반대편에 있었다. 칼은 노라가 십 년 가까이 오가던 길을 처음 걸었다. 비탈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길 중간에 깨진 가로등 하나가 있었으며, 그 아래 돌계단은 가장자리부터 닳아 있었다. 노라가 저녁마다 바구니를 들고 이 계단을 내려왔다는 것을 그는 계단의 닳은 모양을 보고서야 셈해 보았다.

가는 길에 노조 회관 앞을 지났다. 파업이 없는 해라 부엌 창은 어두웠고, 연통 머리에는 칼이 열일곱 해 전에 씌워 둔 철망이 녹슨 채 그대로 얹혀 있었다. 새는 그 뒤로 거기에 집을 짓지 못했다. 칼은 바구니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들고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밤의 정문에는 문지기 방 창 하나만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창 너머로 긴 복도의 끝이 보였다. 칼은 그 복도가 몇 걸음인지 알았다. 노라에게서 들은 숫자였다. 그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끝까지 세기 전에 문지기 방의 창유리를 손가락 마디로 두드렸다.

문지기 방에서 나온 사람은 문지기가 아니었다. 짙은 회색 작업복을 입은 여자였고,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려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여자는 문지기 방의 불빛을 등지고 섰기 때문에 얼굴은 그늘 속에 있었다. 한 손에 드라이버가 들려 있었고, 복도 어딘가의 환기 기계를 손보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여자“문지기는 저녁 먹으러 갔어요. 복도 환기 기계가 덜컹거려서 제가 대신 보고 있었어요.” 여자는 칼이 묻기 전에 먼저 말하고, 문지기 방의 문을 등 뒤로 반쯤 닫았다. 그리고 바구니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시 칼을 보았다. “오르벡 씨죠.”

칼은 고개만 끄덕였다. 자기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보육 구역에서 수선실 사람의 남편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칼“수선실에 전해 주시오. 쓰던 사람이 이제 못 쓴다.”

여자“수선실은 낮에만 열어요. 제가 받아 두겠습니다.” 여자는 드라이버를 작업복 가슴 주머니에 꽂고 두 손으로 바구니를 받았다. 바구니의 무게를 가늠하듯 잠깐 들고 있다가 말했다. “아이들이 물어요, 수선 아줌마는 언제 오냐고요. 뭐라고 해 줄까요?”

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문지기 방 안에서 난로가 째깍거렸다. 언덕 반대편 부엌의 무쇠 난로도 불을 줄이면 같은 소리를 냈다.

칼“사실대로 해 주시오. 나중에라고는 하지 말고.”

여자“나중에라고 하면 안 되나요?”

칼“나중에가 언제냐고 묻는 애가 있다고 들었다. 그 애한테는 날짜를 대야 하는데, 댈 날짜가 없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늘 속의 얼굴이 조금 늦게 아래로 기울었다. 칼은 그것이 끄덕임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았다.

여자“그렇게 전할게요. 사실대로요.” 여자는 바구니 안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골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돌려드릴게요. 골무는 손에 맞춰 쓰는 거라서, 다른 사람 손에는 안 맞아요.”

칼“내 손에도 안 맞는다.”

여자“그래도요.” 여자는 골무를 칼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골무는 칼의 새끼손가락 첫 마디에도 들어가지 않을 크기였고, 안쪽이 바늘 끝에 눌려 잘게 패어 있었다.

골무는 노라의 손가락 모양대로 한쪽이 조금 눌려 있었다. 칼은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잠깐 서 있었다. 바구니를 받아 든 여자도 그동안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는지 나지 않았는지 칼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골무를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여자의 이름은 묻지 않았다. 바구니를 맡길 사람의 이름까지 알아 둘 필요는 없었고, 알아 두면 언젠가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언젠가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여자도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바구니는 수선실에서 잘 쓰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언덕길이 어두워요.”

칼은 모자를 조금 들었다가 내리고 돌아섰다. 돌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깨진 가로등 아래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골무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골무는 손바닥 위의 작은 쇠 무게로만 있었다. 그는 엄지로 골무 안쪽의 패인 자리를 한 번 쓸어 보았다. 바늘 끝이 수천 번 같은 자리를 눌러 만든 자국이었고, 정비공의 손으로 만지면 그것은 마모 기록이었다.

마모는 쓴 만큼 생긴다. 그는 골무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언덕 위 집으로 올라가는 길과 정비 구역으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모퉁이에서 그는 잠깐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중턱에 늘어선 집들의 현관 등이 하나씩 켜져 있었고, 그 줄 가운데 한 자리만 어두웠다. 그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 밤부터 그는 보일러실 뒤의 간이침대에서 잤다. 외투 주머니 속의 골무는 걸을 때마다 단추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냈다.

VIII · 골무

석 달이 지났다. 칼은 정비 구역 보일러실의 간이침대에서 잤고, 골무는 공구함 맨 위 칸의 작은 나사들 옆에 들어 있었다. 공구함을 열 때마다 골무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다른 칸으로 옮기지 않았고, 꺼내 보지도 않았다.

견습“오르벡 씨, 이건 뭡니까? 골무 아닙니까?” 공구함에서 십자 드라이버를 꺼내던 견습이 물었다.

칼“골무다.”

견습“정비공이 골무를 왜 갖고 다닙니까?”

칼“손에 안 맞는 공구도 있다.”

견습은 그것이 농담인지 아닌지 몰라 웃을 준비를 했다가 그만두었다. 예전의 칼이었다면 그 뒤에 한마디가 더 붙었을 것이고, 견습은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 칼은 드라이버를 견습의 손에 쥐여 주고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며칠 뒤 그는 하역기 제동 장치를 뜯다가 손톱만 한 고정 핀 여섯 개를 둘 데가 없어 잠깐 망설였다. 정비대 위에 두면 진동에 굴러떨어지기 쉬웠다. 그는 공구함 맨 위 칸에서 골무를 꺼내 엎어진 것을 바로 세우고 핀을 하나씩 넣었다. 여섯 개가 꼭 들어갔다.

견습“그거 그렇게 쓰시려고 갖고 다니신 거였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견습이 물었다.

칼“아니다, 오늘 처음 써 본 거다. 쓸 데가 생겼으니 쓴 거고.”

핀을 다시 끼우고 나서 그는 골무 안쪽에 묻은 기름을 헝겊으로 닦았다. 닦아도 바늘에 패인 자국은 그대로였고, 이제 그 위에 기름 냄새가 조금 얹혔다. 그는 골무를 원래 칸에 원래 방향으로 넣었다.

그 주에 보육 구역에서 봉투 하나가 정비 구역 앞으로 왔다. 받는 사람 칸에 정비공 오르벡이라고 적혀 있었고, 글씨가 반듯했다. 안에는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바구니 하나, 실타래 열한 개, 바늘쌈 하나, 단추 한 상자를 수선실에서 받았다는 내용이 한 줄에 하나씩 적혀 있었고, 서명 칸에는 이름 대신 수선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으러 오세요.” 칼은 그 줄을 두 번 읽었다. 획마다 끝이 정확히 멈춘 글씨였고, 쓰다가 고친 자국이 없었다.

그 밤 그는 보일러실 등불 아래에서 쪽지를 정비 대장 옆에 펼쳐 놓았다. 대장의 글씨는 그가 쓴 글씨였다. 획이 굵고 끝이 뭉개졌고, 원인 칸마다 같은 네 글자가 같은 기울기로 적혀 있었다. 쪽지의 글씨는 그 옆에서 작고 곧았다. 두 글씨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으므로 그는 곧 쪽지를 접었다.

보일러 당번“글씨 반듯하네. 학교 선생 글씨 같아.” 보일러 당번이 화구를 닫다가 칼의 어깨 너머로 쪽지를 보고 말했다.

칼“선생 글씨가 아니다. 기계 만지는 사람 글씨다.”

보일러 당번“글씨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칼“획 끝이 정확히 멈춘다. 손끝이 떨리는 사람은 나사를 끝까지 못 조인다. 끝까지 조이는 손은 글씨도 끝까지 쓴다.”

당번은 그런가 하고 화구 앞으로 돌아갔다. 칼은 문지기 방 앞에서 드라이버를 쥐고 있던 손을 떠올렸다가, 떠올린 것을 대장에 적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손은 적을 칸이 없었다.

동료“보육 구역에서 뭐가 왔다며? 무슨 일이야?” 이튿날 점심때 정비대 옆에서 동료가 물었다.

칼“영수증이다.”

동료“정비 구역이 보육 구역에 뭘 팔았나? 자네가 요새 장사를 다 하네. 농담은 안 팔고.”

칼“합리적이로군.”

동료“그 말만 하지 말고 뒤에 뭘 좀 붙여 봐. 전엔 붙였잖아.”

칼은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동료는 웃으려다 칼의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 말은 예전에는 농담 앞에 붙던 말이었고, 이제는 혼자 다녔다.

반장“보육 구역에서 환기 기계 수리 요청이 하나 들어왔다. 복도 쪽 송풍기가 밤마다 덜컹거린대.” 그 주 금요일에 반장이 작업 지시서를 들고 왔다. “거기 사람이 자네를 콕 집지는 않았는데, 자네가 가 볼 텐가?”

칼“안 간다. 다른 사람을 보내라.”

반장“송풍기는 자네가 제일 잘 보잖아. 왜?”

칼“거기 기계는 거기 사람이 고친다. 드라이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더군. 일손이 모자라면 그때 다시 말해라.”

반장은 지시서에 다른 정비공의 이름을 적었다. 그 정비공은 반나절 만에 돌아와 송풍기 날개 하나가 휘어 있었다고 보고했고, 칼은 그 보고를 대장에 옮겨 적었다. 원인 칸에는 날개 휨이라고 적혔다. 원인이 적힌 칸은 칼이 손대지 않아도 되는 칸이었다.

동료“아, 그리고 보육 구역 송풍기 말이에요. 거기서 기계 만지는 여자가 오르벡 씨는 잘 지내냐고 묻던데요.” 송풍기를 고치고 온 정비공이 보고서를 건네며 덧붙였다. “뭐라고 할지 몰라서 그냥 일 잘한다고 했습니다.”

칼“맞게 대답했다. 일은 한다.”

동료“다음에 가면 직접 안부라도 전하시지요.”

칼“전할 일이 생기면 그때 한다.”

칼은 보고서의 원인 칸을 대장에 옮겨 적고, 안부라는 말은 어느 칸에도 옮겨 적지 않았다. 쪽지에도 답장을 쓰지 않았다. 답장을 쓰면 언젠가 찾으러 가겠다는 문장을 적게 될 것 같았고, 언젠가라는 말은 그가 더는 쓰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쪽지를 접어 골무가 든 칸에 함께 넣었다. 공구함 맨 위 칸은 그 뒤로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들고 다니는 데 지장은 없었다.

공구를 가지러 언덕 위 집에 들른 낮에도 그는 현관 등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등은 석 달 동안 꺼져 있었다. 부엌의 의자 위에는 회색 아이 외투가 그대로 있었고, 마지막 소매의 솔기 끝에 바늘이 꽂힌 채였다. 그는 필요한 렌치만 찾아 들고 의자 옆을 지나 나왔고, 그날 밤에도 보일러의 숨소리를 세다가 잠들었다.

제0부 5장

원인 불명

마흔일곱, 이른 봄 · 마흔여덟, 한겨울

아래로 ↓

I · 지정

보일러실 간이침대에서 깨는 아침이 석 달을 넘겼다. 칼은 눈을 뜨면 먼저 보일러의 압력계를 보았고, 바늘이 제자리에 있으면 접었던 왼쪽 무릎을 펴고 그 발부터 바닥에 디뎠다. 침대는 그의 키보다 짧았으나 그는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침대를 늘일 시간이면 기체 하나를 더 열 수 있었다. 그날 아침에는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압력계보다 먼저 들렸다.

정비 구역으로 내려오는 길은 언덕 위 집 앞을 지났다. 칼은 석 달 넘게 그 길로 다니면서 부엌 창 쪽을 보지 않는 법을 익혔다. 창 너머 난로 옆에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그는 알았다. 치우지 못한 것을 날마다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보일러실 간이침대에서 자고, 공구가 필요할 때만 낮에 그 문을 열었다. 그날 아침에는 비가 와서 창이 흐렸고, 그래서 보지 않는 일이 평소보다 조금 쉬웠다.

그 여자를 칼은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지난겨울 밤, 보육 구역 문지기 방 앞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받아 들던 사람이었다. 얼굴은 그때도 그늘 속에 있었고 기억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기억에 남은 것은 소매였다. 회색 작업복의 소매가 팔꿈치 아래에서 두 번 접혀 있었고, 두 단의 폭이 자로 잰 듯 같았다. 그 뒤로 그는 보일러실 간이침대에서 잤고, 공구함 맨 위 칸의 골무와 쪽지 말고는 그 밤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곁에 두지 않았다.

의뢰는 이른 봄비가 사흘째 내리던 아침에 들어왔다. 정비 구역의 함석지붕은 빗줄기가 굵어질 때마다 소리의 높이를 바꾸었고, 정비공들은 그 소리로 비의 양을 짐작하며 아침 차를 마셨다. 문이 열리자 젖은 바람과 함께 기체 하나가 들어왔다. 그 앞에서 회색 작업복을 입은 여자가 우비 두건을 쓴 채 기체의 손목에 감은 끈을 쥐고 있었다. 기체는 끈이 없어도 따라 걸었을 것이고, 여자도 그것을 아는 듯 끈을 느슨하게 쥐고 있었다.

칼은 여자보다 기체를 먼저 보았다. 정비공의 눈은 사람보다 기계 쪽으로 먼저 가는데, 칼의 눈은 그중에서도 빨랐다. 기체는 칼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오른팔 관절에서 김이 가늘게 새고 있었으며, 가슴판에는 녹 자국이 번져 있었다. 이마에는 긁힌 선이 여러 줄 나 있었다. 글자도 숫자도 아니었고, 무엇에 긁혔는지 알 수 없는 평행한 흠이었다.

여자“담당 정비공을 지정해서 맡기려고 왔어요. 의뢰서는 여기 있어요.” 여자가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비가 그렇게 오는데도 종이에는 물기가 한 점도 없었다.

칼은 종이를 받아 들고도 바로 펴지 않았다. 그는 먼저 기체의 눈을 보았다. 눈의 불빛이 다른 기체보다 어두웠고, 깜박임이 반 박자씩 늦었다. 불빛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사이에 사람이 숨을 한 번 쉴 만한 틈이 있었다. 그는 그 틈을 두 번 더 확인한 뒤에야 종이를 폈다.

의뢰서의 글씨는 반듯했다. 줄 칸에 맞춰 쓴 글자들이 하나도 기울지 않았고, 획의 끝이 모두 같은 자리에서 멈추었다. 증상 칸에는 눈 깜박임 반 박자 지연, 고장 여부 판단 바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맨 아래 칸에는 같은 글씨로 담당 정비공 지정: 오르벡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씨를 칼은 공구함 맨 위 칸의 쪽지에서 본 적이 있었으나, 쪽지의 서명 칸에도 이름은 없었다. 칼은 의뢰 부서 칸을 읽지 않았다. 증상과 자기 이름이 있으면 일을 시작하는 데는 충분했다.

동료“졸린 깡통이로군.” 옆 정비대에서 젊은 정비공이 찻잔을 든 채 고개를 내밀었다. 기체의 눈이 그 말에 맞춰 느리게 한 번 꺼졌다 켜졌고, 정비대 몇 곳에서 웃음이 났다. “저 눈 좀 보시오. 아침을 안 먹은 깡통이오. 오르벡 씨 말고도 정비공은 많은데 굳이 지정까지 해서 맡길 물건이오?”

여자“알아요.” 여자는 그 말만 하고 젊은 정비공 쪽은 보지 않았다.

칼은 웃지 않았다. 그는 기체의 왼쪽 손목을 잡아 관절의 유격을 손끝으로 쟀고, 손목을 놓은 뒤에는 오른팔 관절에서 새는 김에 손바닥을 대어 온도를 보았다. 웃음은 그의 등 뒤에서 조금 더 이어지다가 그쳤다. 그가 돌아보지 않아서 그친 것인지 비가 다시 굵어져서 그친 것인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칼“언제부터 이렇게 늦었습니까.”

여자“제가 맡았을 때부터요. 그 전 일은 저도 몰라요.”

칼“그 전 정비 기록은 있습니까.”

여자“없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적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칼“고장인지 아닌지는 열어 봐야 압니다. 열어 봐도 모를 수 있고요.”

여자“고칠 수 있으면 고쳐 보세요.”

칼“못 고치면 못 고쳤다고 적습니다. 원인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고요. 그런 대장이라도 괜찮다면 맡겠습니다.”

여자“그럼 됐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대답이 너무 곧바로 나와서 칼은 그것이 방금 들은 말에 대한 대답인지, 미리 준비해 온 문장인지 잠깐 생각했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등록은 정비대 옆 단말에서 했다. 담당 정비공이 정해지면 그 이름을 기체의 명령 목록에 올리는 것이 규정이었고, 그 목록은 의뢰인의 손으로만 열렸다. 여자가 단말 앞에 서서 손을 목 쪽으로 올렸다가 내렸다. 작고 둥근 쇠붙이가 단말 옆 홈에 맞물리는 소리가 딸깍 하고 났다. 칼은 그 소리를 등으로 들었다. 그는 그때 기체의 가슴판 가장자리에 박힌 볼트 여덟 개를 눈으로 세고 있었다.

여자“여기 엄지를 대세요.”

칼은 기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왼손만 뒤로 뻗었다. 여자가 그 손목을 잡아 단말의 판에 엄지를 눌러 주었다. 판은 미지근했고 짧게 한 번 울렸다. 화면에 무엇이 떴는지 그는 보지 않았다. 볼트 여덟 개 가운데 셋의 머리에 새 공구 자국이 나 있었고, 그는 그쪽이 더 궁금했다.

여자는 화면 앞에 반 박자 더 서 있었다. 칼은 그것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등 뒤에서 젖은 장화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멀어지는 것으로 알았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사이 빗소리가 한 번 커졌다 작아졌다. 의뢰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오후가 되어서야 깨달았으나, 정비 대장에는 의뢰인의 이름을 적는 칸이 없었으므로 일에는 지장이 없었다.

동료“그 회색 작업복 의뢰인, 이름이 뭐랍디까?” 오후에 젊은 정비공이 물었다. “지정 의뢰는 이 구역 생기고 처음일 거요.”

칼“안 물었다. 대장에 그 칸이 없다.”

동료“그럼 다음에 오면 물어보시오. 깡통 주인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오.”

칼“다음에 올지 모른다. 기체는 매주 온다고 적혀 있고, 의뢰인이 온다고는 안 적혀 있다.”

대장에 새 기체를 올릴 때 칼은 늘 번호 대신 부를 이름을 하나 붙였다. 번호는 길었고, 긴 번호를 부르는 동안 손이 멈추었다. 그는 기체의 이마에 난 흠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었고, 일곱 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대장의 이름 칸에 일곱 번째라고 적고, 그 아래 첫 줄에 날짜와 증상을 옮겨 적었다. 그가 옮겨 적은 증상 칸의 글씨는 의뢰서의 글씨보다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II · 첫 꼬리표

일곱 번째는 그 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네 시에 왔다. 데려오는 사람 없이 혼자 걸어서 정비 구역 문을 들어왔고, 정비가 끝나면 정비대 옆 받침 위에 선 채 밤을 넘긴 뒤 금요일 아침에 혼자 걸어서 나갔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의뢰서에 적혀 있지 않았고, 칼은 그것을 찾아보지 않았다.

정비는 언제나 같은 순서였다. 기체를 정비대에 눕히고, 가슴판 아래 덮개를 열어 숫자 단추 열 개짜리 입력판에 정지 코드를 누르고, 눈의 불빛이 꺼진 것을 확인한 다음 가슴판을 연다. 일이 끝나면 가슴판을 닫고 같은 코드를 다시 눌러 연다. 칼은 이 순서를 이십 년 가까이 지켰고, 순서를 바꾼 날에는 반드시 무언가를 빠뜨렸다.

동료“오르벡 씨 코드는 늘 칠영구삼이더이다. 무슨 날짜요, 아니면 옛 애인 집 번지요?” 젊은 정비공이 어깨 너머로 입력판을 넘겨다보며 물었다.

칼“외우기 쉬워서다.”

젊은 정비공은 그것이 대답인지 아닌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자기 정비대로 돌아갔다.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 네 자리는 정말로 외우기 쉬웠고, 그는 서른 해 넘게 그 숫자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열한 살 때 못 끝으로 침대 틀에 새긴 숫자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종류였다.열한 살 때 물이 빠진 배수 출구에서 다시 읽은 번호판은 눈을 감아도 보이는 종류였다.열한 살 때 정문 등불 아래에서 본 네 자리는 등불을 볼 때마다 따라오는 종류였다. 다만 왜 외우기 쉬운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코드가 들어가자 기체는 반 박자 동안 그대로 있다가 눈의 불빛을 내렸다. 다른 기체들은 마지막 숫자가 들어가는 즉시 꺼졌다. 칼은 그 반 박자를 시계 없이 셌고, 셈이 맞는지 보려고 같은 네 자리를 다시 눌러 깨웠다가 한 번 더 눌러 닫았다. 두 번 다 같았다.

가슴판 안은 깨끗했다. 대기 회로의 접점에는 그을음이 없었고 유압 관에는 금 하나 없었으며, 눈 장치의 배선은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묶여 있었다. 깨끗한 속을 들여다볼수록 칼은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다. 고장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고, 흔적이 없는 고장은 정비공에게 가장 나쁜 소식이다.

칼“속은 멀쩡하군. 접점도 깨끗하고 관도 안 샌다. 오른팔에서 새는 건 패킹이 낡아서고, 그건 이번 주에 갈아도 다음 달이면 또 샌다. 네 관절은 원래 그렇게 생겼다. 그런데 눈은 모르겠다. 눈이 늦는 이유가 이 안에 없으면 이 밖에 있다는 뜻인데, 밖이라면 내 일이 아니다.” 칼은 꺼진 기체의 가슴판 안에 대고 말했다. 닫힌 기계에게 말을 거는 것은 고철선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듣는 쪽이 없으니 틀린 말을 해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

일이 끝나고 같은 네 자리를 다시 누르자 일곱 번째의 눈에 불빛이 돌아왔다. 기체는 정비대 위에 누운 채 고개를 칼 쪽으로 돌렸다.

일곱 번째“정비가 끝났습니까.”

칼“끝났다. 원인은 못 찾았다. 코드를 누르면 너는 반 박자 늦게 닫힌다. 그 원인도 모른다.”

일곱 번째“제 쪽에서는 지연이 측정되지 않습니다. 저는 닫혀 있는 동안의 일을 기록하지 못합니다. 원인을 못 찾았다는 것은 지금 기록하겠습니다.”

칼은 공구를 내려놓다가 손을 멈추었다. 저라는 말을 쓰는 기체를 그는 이십 년 동안 몇 기 보지 못했다. 기체들은 대개 본 기체라고 말했고, 자기를 가리키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 기종도 많았다. 그것도 결함인지 그는 판단하지 못했고, 판단하지 못한 것을 결함 칸에 올릴 수는 없었다.

꼬리표는 두꺼운 마분지였고, 칼은 연필로 거기에 두 줄을 적었다.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그는 꼬리표 구멍에 철사 끈을 꿰어 기체의 왼쪽 손목 고리에 묶었다. 매듭은 고철선에서 배운 것이어서, 두 번 감아 한 번 꺾으면 파도에 흔들려도 풀리지 않았고 풀 때는 한쪽 끝만 당기면 되었다.

재가동이 끝난 일곱 번째는 정비대에서 내려와 정비대 옆 받침 위에 올라섰다.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눈의 불빛을 한 단계 낮춘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기체들은 정비가 끝나면 그날로 구역을 나갔으나, 일곱 번째의 의뢰서에는 정비 일정이 목요일 오후부터 금요일 아침까지로 적혀 있었다. 받침 위에서 밤을 넘기는 까닭은 적혀 있지 않았고, 칼은 그것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날 밤 보일러실 간이침대에 누워 칼은 반 박자를 다시 세어 보았다. 보일러의 숨소리 사이에 그 틈을 끼워 넣어 보니 숨 한 번이 들어갈 자리가 남았다. 보일러는 고장이 아니었고, 그 틈도 보일러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틈을 세다가 접은 무릎이 식는 것을 느꼈고, 무릎을 펴지 않은 채 잠들었다.

새벽 두 시에 그는 눈을 떴다. 시계를 맞춰 둔 것은 아니었다. 새는 관절의 기름은 두 시 무렵에 가장 차가워졌고, 고철선에서는 그 시각에 새는 관절을 한 번 보고 다시 눕는 것이 정비 당번의 일이었다. 칼은 외투를 걸치고 보일러실을 나와 받침 앞에 섰다. 손전등으로 오른팔 관절을 비추자 김이 낮보다 가늘게 새고 있었다. 그는 김에 손바닥을 대어 온도를 보고, 패킹 둘레를 불빛으로 한 바퀴 돌았다.

일곱 번째“두 시입니다. 관절을 측정하십니까.”

칼“김을 본다. 새는 양이 낮과 같으면 된다.”

일곱 번째“같습니까.”

칼“같다. 나는 도로 자러 간다.”

그 뒤로 정비 날 밤이면 칼은 두 시에 한 번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받침 위 기체의 오른팔 김을 보았다. 깨우는 사람이 없어도 깨지 못한 밤은 드물었고, 그는 그 일을 대장의 어느 칸에도 적지 않았다. 새는 양이 낮과 같은 밤에는 적을 것이 없었다.

일곱 번째“제 작업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동쪽 창의 아래 끝에 걸렸을 때 일곱 번째가 받침에서 내려왔다.

칼“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겠다. 배치표는 정비공이 보는 칸이 아니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오겠습니다.”

기체는 문 앞에서 한 번 고개를 돌렸다. 정비대 쪽이었고, 칼은 그 동작을 꼬리표에 적지 않았다. 문을 나서는 기계가 흔히 하는 주변 확인일 수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 그는 그 방향을 다시 따져 보았다. 주변을 확인하는 기체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돌리는데, 일곱 번째는 한쪽으로만 돌렸다.

III · 반려

여름이 오기 전에 칼은 눈 장치를 두 번 갈았다. 처음에는 불빛을 내는 등을 갈았고, 두 번째에는 등과 이어진 박자 회로의 판을 통째로 갈았다. 새 판을 끼운 날 일곱 번째의 눈은 정확히 반 박자 늦게 깜박였다. 갈기 전과 같은 박자였다. 칼은 떼어 낸 판을 작업대 서랍에 넣고 서랍을 평소보다 세게 닫았다.

반장“자네가 못 고친 기체가 다 있군.” 반장이 서랍 닫히는 소리를 듣고 정비대로 건너왔다. 노조 회관 부엌에서 칼을 처음 본 사람이었고, 그 뒤로 칼이 무엇을 못 고쳤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칼“못 고친 게 아니다. 원인을 못 찾은 거다.”

반장“그게 다른가.”

칼“다르다. 원인을 찾으면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 지금은 그것도 모른다. 모르는 기체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구역 일정이 밀리니까 교체 신청을 넣겠다.”

교체 신청서를 쓴 것은 그 주말이었다. 기체 한 대를 통째로 바꾸어 달라는 서류는 장이 길어서 칼은 그것을 쓰는 데 정비보다 오래 걸렸다. 마지막 장의 마지막 칸이 원인 칸이었다. 그는 그 칸을 비워 둔 채 서류를 들고 서무실로 갔다.

서무“원인 칸이 비었네요.” 서무는 안경을 코끝으로 내리고 서류를 한 장씩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멈추었다. “원인이 없으면 예산 순위가 맨 뒤로 갑니다. 맨 뒤까지 예산이 내려온 해는 제가 이 자리에 앉은 뒤로 한 번도 없었고요.”

칼“원인이 없는 게 아니다. 모르는 거다.”

서무“서류에서는 그게 같은 겁니다, 오르벡 씨.”

동료“눈 장치 노후라고 적으시오. 다들 그렇게 적소.” 서무실까지 따라온 젊은 정비공이 문간에서 거들었다. 그 말은 오늘 아침 정비대에서도 한 번 들은 말이었다. “노후는 누가 뜯어봐도 반박을 못 하는 원인이오.”

칼“노후가 아니다. 눈 장치는 내가 두 번 갈았다. 새 판에서도 늦으면 판이 원인이 아니라는 뜻이고, 원인이 아닌 걸 원인 칸에 적으면 다음에 이 기체를 여는 놈은 판부터 갈다가 하루를 버린다.”

서무는 서류에 반려 도장을 찍었다. 사유 칸에는 예산이라고 적혔다. 칼은 반려된 서류를 받아 정비대로 돌아와 공구함 맨 아래 칸에 넣었다. 젊은 정비공이 무어라 한 번 더 입을 열려 하자 칼은 그의 손에 십삼 밀리 렌치를 쥐여 주고 삼번 정비대에 누운 하역 기체의 무릎을 턱으로 가리켰다.

정비대 옆 단말은 일곱 번째가 누울 때마다 저절로 켜졌다. 기체가 정비대에 오르면 단말이 기체의 기록을 불러오는 것이 정비 구역의 오래된 배선이었고, 화면 한쪽에는 그 기체의 명령 목록이 늘 열려 있었다. 칼은 그 화면에 등을 대고 일했다. 단말은 정비대 머리 쪽에 있었고 그가 열어야 할 가슴판은 정비대 한가운데에 있었으니, 등을 돌리는 것이 곧 일의 방향이었다.

동료“화면은 안 보시오? 목록이 열려 있던데.” 어느 목요일 젊은 정비공이 단말 앞을 지나가다 물었다.

칼“안 본다. 명령 목록은 기체를 부리는 쪽 칸이다. 나는 여는 쪽이다. 여는 쪽은 속을 보면 된다.”

가을에 두 번째 신청서를 냈다. 서류는 첫 번째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았고, 원인 칸도 그대로 비어 있었다. 서무는 이번에는 서류를 끝까지 넘기지도 않고 반려 도장을 찍었다. 사유는 이번에도 예산이었다.

서무“같은 서류를 두 번 내면 결과도 같습니다. 그건 정비공이 저보다 잘 아실 텐데요.”

칼“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결과가 나오면 고장이 아니라는 뜻이지. 서무실은 정상이로군.”

반장“원인 칸은 내가 채워 주지.” 반려 소식을 들은 반장이 정비대로 와서 말했다. “반장 판단으로 노후. 내 서명이 들어가면 서무도 순위를 올려 줄 거야. 자네가 쓰기 싫으면 내가 쓰면 되지 않나.”

칼“안 된다. 내가 모르는 걸 반장 이름으로 적으면 더 나쁘다. 모르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 되고, 그중 하나는 안다고 서명한 사람이 된다.”

반장“그럼 저 깡통은 계속 자네 차지야. 예산은 내년에도 안 내려와.”

칼“그럼 계속 연다. 열다 보면 원인이 나올 수도 있다.”

서무가 웃었는지는 칼이 보지 않았다. 그는 정비대로 돌아와 일곱 번째의 가슴판을 열었다. 반려 도장을 받은 날마다 그는 가벼운 짜증을 느꼈고, 짜증은 대개 저녁이면 가라앉았다. 가라앉지 않은 날에는 볼트에 렌치를 걸지 않고 기다렸다. 기분이 손에 묻은 채로 조인 볼트는 기계가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에 배웠다.

칼“예산이 내려오면 너는 나간다. 새 기체가 네 자리에 들어온다. 그러니 나한테 잘 보일 필요는 없다.” 칼은 열린 가슴판 안에 대고 말했다. 닫힌 기체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대답이 없는 쪽이 편했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매주 목요일에 오겠습니다.” 칠영구삼이 다시 들어가 눈에 불빛이 돌아온 기체가 그렇게 말했다. 닫혀 있는 동안의 일은 기록하지 못한다던 기체였다.

칼“예산이 내려오는 날을 너는 모른다.”

일곱 번째“모릅니다. 모르는 날까지는 매주입니다.”

칼은 그 대답이 어디에 대한 대답인지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닫히기 전에 들은 말이 있었을 수도 있었고, 대장에 적힌 반려 기록을 읽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꼬리표에 두 줄을 적고, 자기 매듭으로 묶었다.

IV · 매듭

꼬리표가 다른 매듭으로 돌아온 것은 가을이 깊어진 어느 목요일이었다. 칼은 일곱 번째의 손목 고리에서 지난주 꼬리표를 풀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두 번 감아 한 번 꺾는 그의 매듭이 아니었다. 끈이 납작하게 한 번 겹쳐져 있었고, 겹친 자리가 반듯해서 남은 두 가닥의 길이가 똑같았다.

바느질하는 사람들이 실 끝을 마무리할 때 쓰는 매듭과 닮아 있었다. 칼은 그 매듭을 어디서 보았는지 알았고, 알았다는 것을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끈의 한쪽 끝을 당겼다. 그의 매듭과 달리 그 매듭은 한쪽 끝을 당겨서는 풀리지 않았고, 그는 손톱으로 겹친 자리를 하나씩 들어 올려 풀었다.

가슴판을 열자 볼트 셋의 조임이 달랐다. 여덟 개 가운데 왼쪽 위의 둘과 오른쪽 아래의 하나였다. 그가 지난주에 조인 것보다 단단했고, 렌치를 걸었을 때 손목에 오는 저항이 처음 의뢰를 받던 날의 그 셋과 같았다. 칼은 셋을 풀어서 자기가 아는 값으로 다시 조였다. 정비 교본에 적힌 값이었고, 이십 년 동안 그 값이 틀린 적은 없었다.

칼“지난주에 누가 너를 열었나?” 같은 네 자리를 다시 눌러 기체를 깨운 뒤 칼이 물었다.

일곱 번째“열린 기록은 없습니다. 그 볼트 셋은 가슴판을 열지 않고도 조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칼“그러면 조임이 바뀐 원인은 뭐냐.”

일곱 번째“제 쪽에서 측정된 원인은 없습니다. 바깥 원인입니다.”

칼“바깥 원인은 내 대장에 칸이 없다. 칸이 없는 건 원인 불명으로 적는다.”

그는 꼬리표에 두 줄을 적고 매듭은 자기 매듭으로 다시 묶었다. 그 뒤로도 매듭이 바뀌어 돌아오는 주가 가끔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일 때도 있었고 두 달 동안 없을 때도 있었으며, 볼트 셋도 대개 그 주기를 따랐다. 칼은 바뀐 매듭을 볼 때마다 풀어서 다시 묶었고, 바뀐 조임을 볼 때마다 풀어서 다시 조였다. 대장의 원인 불명은 그 횟수만큼 늘었다.

초겨울의 어느 목요일, 칼은 일곱 번째의 가슴판 볼트를 세 번 풀었다가 세 번 다시 조였다. 첫눈이 온 지 사흘째였고, 하역기 밑에서 렌치를 레일 위에 내려놓은 밤으로부터 꼭 한 해가 되는 주였다. 칼은 그 주를 달력에 표시하지 않았다. 표시하지 않아도 손이 알았다.

일곱 번째“오늘은 같은 볼트를 세 번 조였습니다. 평소에는 한 번입니다.” 코드가 다시 들어가자 일곱 번째가 말했다.

칼“손이 무디다. 추워서다.”

일곱 번째“정비 구역의 기온은 지난주와 같습니다.”

칼은 대꾸하지 않고 렌치를 내려놓았다. 기분이 손에 묻은 날 조인 볼트는 기계가 먼저 알아차린다고 그는 배웠고, 오늘 그것을 알아차린 쪽은 정말로 기계였다. 그는 렌치를 다시 들지 않고 정비대 옆 의자에 앉아 손이 식기를 기다렸다. 일곱 번째는 정비대 위에 누운 채 그 시간 동안 고개를 그쪽으로 두고 있었다.

초겨울 무렵부터 일곱 번째는 정비대까지 칼과 나란히 걸었다. 정비 구역 문에서 정비대까지는 사십 걸음쯤이었고, 칼은 왼쪽 무릎이 쑤시는 날이면 그 사십 걸음을 조금 끌며 걸었다. 그런 날이면 일곱 번째의 걸음이 짧아졌다. 칼이 끄는 다리가 바닥에 닿는 박자와 일곱 번째의 쇠 발이 닿는 박자가 겹쳐서, 둘이 걷는 소리는 한 사람이 걷는 소리처럼 들렸다.

동료“깡통이 오르벡 씨 걸음을 흉내 내네.” 젊은 정비공이 찻잔을 든 채 웃었다. “둘이 다리를 똑같이 저는구려.”

칼“보행 이상이다. 적어 둬야겠군.” 칼은 대답하고 나서 정말로 그것을 꼬리표에 적었다. 보행 이상, 보폭 불규칙, 원인 불명.

동료“고개도 돌리던데. 오르벡 씨가 움직이면 꼭 그쪽으로 돌립디다.”

칼“그것도 이상이다. 그것도 적었다.”

젊은 정비공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칼은 그의 손에 기름통을 들려 일곱 번째의 오른팔 관절 쪽으로 보냈다. 패킹을 갈 차례였다. 젊은 정비공은 기름통을 들고 일곱 번째 앞에 섰다가, 기체의 고개가 자기 쪽이 아니라 칼 쪽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아무 말 없이 패킹을 갈았다.

동료“이 깡통, 내가 관절을 만지는데도 나는 안 보는군요.” 패킹을 다 갈고 나서 젊은 정비공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웃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칼“시선 고정 이상이다. 그것도 원인은 모른다.” 칼은 꼬리표를 집어 들었고, 앞면에 적을 자리가 모자라서 뒷면으로 뒤집었다.

그 겨울이 가고 봄과 여름이 같은 꼬리표로 지나갔다. 대장의 원인 불명은 매주 한 줄씩 늘었고, 칼은 그 줄을 세지 않았다.

V · 결함 목록

두 번째 겨울의 한겨울, 목요일이었다. 정비가 늦게 끝나서 칼은 해가 진 뒤에 지하 대장실로 내려갔다. 왼쪽 무릎을 먼저 접고, 무릎이 체중을 받아 주는 것을 확인한 뒤에 의자에 몸을 내렸다. 연말 정기 보고서를 쓰는 철이었고, 보고서에는 기체마다 한 해 치 결함을 한 단락으로 요약해 붙여야 했다. 일곱 번째의 대장은 아흔 장을 넘겨 있었다.

일곱 번째는 대장실 문 밖에 서 있었다. 정비 날 밤이면 늘 정비대 옆 받침 위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기체였는데, 오늘은 받침을 비우고 계단 아래 대장실 문틀 바로 바깥까지 와 있었다. 내려온 이유를 칼은 묻지 않았다.

칼“들어와라. 문에 서 있으면 계단 바람이 다 들어온다.”

일곱 번째“이 방은 제 작업 구역 목록에 없습니다. 목록에 없는 방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칼“그럼 거기 서 있어라. 바람은 내가 참지.”

칼“첫째, 보행 이상으로 보폭 불규칙, 정비공과 같이 걸을 때만 짧아짐. 둘째, 고개 돌림은 한쪽으로만, 정비공이 있는 쪽으로. 셋째, 정지 코드 입력 시 반 박자 지연, 같은 날 다른 기체는 지연 없음. 넷째, 꼬리표 매듭이 바뀌어 돌아옴, 바깥 원인. 다섯째, 볼트 셋의 조임 변화, 이것도 바깥 원인. 여섯째, 자기를 가리킬 때 저라는 말을 씀.” 칼은 한 해 치 결함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비공이 목록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빠뜨린 줄을 귀로 찾기 위해서다.

넷째 줄로 넘어가려다 그는 펜을 든 손을 멈추었다. 정비공이라는 말이 여섯 줄 가운데 세 줄에 들어 있었다. 걸음이 짧아지는 것도, 고개가 돌아가는 것도, 코드에 반 박자 머무는 것도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칼일 때의 기록이었다. 그 조각들이 한 그림으로 맞아 들어가려는 느낌이 손끝에 걸렸다. 그는 그 느낌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맞추고 싶지 않은 그림일수록 조각은 먼저 제자리를 찾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 기체를 닫은 정비공은 처음부터 칼 한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코드를 누른 날의 기록은 대장에 한 줄도 없었다. 비교할 기록이 없는 결론은 결론이 아니라 기분이고, 기분을 원인 칸에 적는 정비공은 남의 기계를 망친다. 펜이 다시 움직였다. 그는 요약 단락 끝에 늘 쓰던 말을 적었다.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일곱 번째“목록을 다 읽으셨습니까.” 문 밖에서 일곱 번째가 물었다.

칼“다 읽었다. 너는 고장 난 데가 여섯 군데인데 원인은 하나도 없다. 그런 기체는 이십 년 만에 처음이다.”

일곱 번째“여섯 줄 모두 작업 지장 없음입니까.”

칼“모두다. 그러니 너는 고장 난 기체가 아니라 이상한 기체다. 이상한 건 대장에 적을 칸이 없다.”

일곱 번째“원인 불명이 아흔한 번이고 작업 지장 없음도 아흔한 번입니다. 같은 말이 아흔한 번 적혀 있습니다.”

칼“같은 상태면 같은 말을 쓴다. 말을 바꾸면 읽는 쪽은 상태가 바뀐 줄 안다. 아흔한 번 같은 말을 쓴 건 아흔한 번 같았다는 기록이다.”

그때 단말의 화면이 꺼졌다. 천장의 전등이 한 번 깜박이더니 따라 꺼졌고, 계단 위 정비 구역에서 보일러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내려왔다. 쇠 관이 식으면서 내는 똑딱거림이 어둠 속에서 하나씩 늘어났다. 칼은 어둠 속에 앉은 채 정전의 범위를 소리로 쟀다. 보일러가 섰고, 바깥 수은등의 웅웅거림이 없었고, 부두 쪽 하역기의 쇠사슬 소리도 끊겼다. 구역 하나가 아니라 아랫부두 전체가 나간 것이다.

정비 구역 사무실의 전화가 울린 것은 그가 계단 스물네 칸을 손으로 더듬어 올라온 뒤였다. 전화선은 전깃줄과 따로 흘렀다. 밤에 이 번호로 오는 전화는 언제나 감시소에서 오는 것이었고, 칼은 수화기를 들기 전에 손바닥을 한 번 바지에 닦았다. 손은 젖어 있지 않았다.

당직“오르벡 정비공이오? 아랫부두 전체가 나갔소. 변전소 쪽 선이 눈 무게에 끊겼는데 아침 전에는 못 잇는다 하오. 언덕 너머 길도 눈으로 막혔고.”

칼“기온은.”

당직“지금 영하 열넷이고 새벽엔 더 내려간다 하오. 거기 아직 누가 남아 있소?”

칼“있다. 사람 하나, 기체 하나.”

당직“기체는 그냥 두시오. 철인이 얼어 죽는다는 말은 이 감시소에서 이십 년 동안 못 들어 봤소. 사람이나 얼지 마시오.”

칼은 대답하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기체는 얼어 죽지 않는다. 대신 관절이 언다. 일곱 번째의 오른팔 관절은 한 해 내내 새고 있었고, 새는 윤활유는 영하 열넷에서 두 시간이면 패킹 안에서 굳는다. 굳은 기름은 관절이 움직이는 첫 동작에 패킹을 찢고, 찢긴 틈으로 쇠가 쇠를 갈아 먹는다. 그런 관절을 그는 고철선에서 수십 개 뜯어냈다.

손전등으로 일곱 번째의 오른팔을 비추자 새는 김이 벌써 가늘어져 있었다. 김이 가늘어졌다는 것은 관절 안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언덕 너머 기체의 작업 구역까지는 평소 이십육 분 길이 눈 때문에 한 시간이 넘을 것이었고, 그 길은 막혔다. 칼의 집까지는 언덕길로 이십 분이었다. 난로가 있는 집이었다.

칼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공구함을 열었다. 기름통 하나, 여분의 패킹 두 벌, 마른 걸레 한 장을 자루에 넣었다. 정비공은 기체를 옮길 때 기체보다 공구를 먼저 챙긴다. 옮긴 자리에서 공구가 없으면 옮긴 일이 헛일이 되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기름통은 왜 챙기십니까.”

칼“언 관절은 녹을 때 기름이 먼저 빠진다. 녹이기만 하고 기름을 안 채우면 내일 아침에 쇠끼리 갈린다. 반만 하는 정비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칼“가자.”

일곱 번째“어디로 말입니까.”

칼“내 집이다. 난로가 있다. 오늘 밤 그 관절을 녹일 데는 거기밖에 없다.”

일곱 번째“정비공 자택은 제 작업 구역 목록에 없습니다.”

칼“오늘 밤에 넣어라.”

일곱 번째“넣었습니다.” 기체의 눈이 반 박자 늦게 한 번 깜박였다. “목록에 넣은 장소는 저절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우라는 명령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칼“그건 내일 생각하자.” 칼은 외투 깃을 세우고 손전등을 껐다. 전지를 아껴야 했고, 이십 분짜리 길은 불이 없어도 무릎이 알았다.

VI · 정전

눈은 무릎 아래까지 쌓여 있었다. 수은등이 모두 꺼진 부두 길은 하늘보다 어두웠다. 왼쪽 무릎은 계단 스물네 칸을 오르면서 이미 쑤시기 시작했고, 눈 속에서는 한 걸음마다 더 깊이 쑤셨다. 칼은 오른발로 눈을 먼저 다지고 왼발을 그 자리에 놓으며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 시간이 두 배로 들었고, 그는 이십 분이 사십 분이 되리라고 계산했다.

언덕길로 꺾어 백 걸음쯤 올랐을 때 칼은 옆에서 들리는 쇠 발소리의 간격이 바뀐 것을 알았다. 일곱 번째의 발이 눈을 밟는 소리가 칼의 왼발이 눈에 닿는 소리와 같은 박자로 났다. 기체의 보폭은 원래 사람의 한 걸음 반쯤 되었는데 지금은 칼의 걸음과 거의 같았다. 칼은 걸음을 멈추었고, 기체도 같은 박자에 멈추었다.

칼“고장이냐.”

일곱 번째“측정 중입니다.”

칼“뭘 측정한다는 거냐.”

일곱 번째“측정이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측정 중입니다.”

칼은 더 묻지 않고 다시 걸었다. 기체는 다시 같은 박자로 걸었다. 무엇을 재는지 모르는 기계와 나란히 걷는 것은 정비공에게 편한 일이 아니었는데, 무릎은 백 걸음 전보다 덜 쑤셨다. 그는 그것을 추위에 무릎이 무뎌진 탓으로 돌렸다.

일곱 번째“남은 거리는 얼마입니까.” 언덕의 중턱쯤에서 일곱 번째가 물었다.

칼“이백 걸음. 내 걸음으로.”

일곱 번째“제 걸음으로도 이백입니다. 지금은.”

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현관 앞 계단 세 칸에 눈이 덮여 있었고, 칼은 난간 대신 문틀을 짚으며 올라섰다. 열쇠는 한 번에 돌아가지 않았다. 자물쇠 안에 성에가 끼어 있어서 그는 열쇠를 입김으로 두 번 데웠다. 공구를 가지러 낮에만 열던 문이었다.마지막으로 밤에 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동틀 때까지 부엌 바닥에 앉아 있다가 출근했다.마지막으로 밤에 이 문을 나설 때 그의 팔에는 바느질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문이 열리자 안에 고여 있던 공기가 바깥보다 차갑게 밀려 나왔다.

칼은 문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스위치에 닿은 자리는 그의 어깨보다 한 뼘 낮았다. 노라의 손이 닿기 좋은 높이로 그가 옮겨 단 스위치였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들어오며 그 등을 끄던 손버릇이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정전이었고, 정전이 아니었어도 그 등은 두 해 동안 켜진 적이 없었다. 그는 손을 거두고 손전등을 다시 켰다.

일곱 번째는 문턱 앞에서 멈추었다. 문틀은 기체의 이마보다 낮았다. 칼이 숙이라고 말하기 전에 기체가 먼저 고개를 숙였고, 숙인 채로 문틀의 높이와 문의 폭과 현관에서 부엌까지의 거리를 차례로 보았다. 보는 순서가 칼이 처음 맡은 기체를 볼 때의 순서와 같았다. 일곱 번째는 쇠 발을 문턱 안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부엌은 칼이 두 해 전에 두고 나온 그대로였다. 식탁 위에 엎어 둔 찻잔 두 개와 창틀의 마른 화분이 있었고, 난로 옆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의자 위에는 작은 회색 외투가 놓여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거기 닿았다가 곧바로 난로 쪽으로 옮겨 갔다. 칼은 난로 문을 열고 통에 남은 석탄을 넣었으며, 성냥은 세 번째에 붙었다.

불이 붙자 부엌의 어둠이 난로 쪽에서부터 물러났다. 칼은 일곱 번째를 난로 앞 바닥에 앉혔다. 식탁 의자는 기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었고, 난로 옆 의자는 처음부터 셈에 넣지 않았다. 기체는 오른팔을 난로 쪽으로 두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았다. 관절에 낀 서리가 녹아 물방울이 되었고, 물방울은 바닥에 하나씩 떨어졌다.

일곱 번째“이 옷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서리가 반쯤 녹았을 때 일곱 번째가 말했다. 기체의 눈은 난로 옆 의자를 향해 있었다.

칼“안다.”

일곱 번째“마지막 소매가 몸판에 반쯤만 붙어 있습니다. 솔기 끝에 바늘이 꽂힌 채입니다. 치수는 칠 세 아동의 것입니다.”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난로 문을 열고 석탄을 하나 더 넣은 뒤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데 필요한 것보다 오래 손잡이를 쥐고 있었고, 쇠 손잡이가 손바닥을 데우다가 뜨거워질 무렵에야 놓았다. 바람이 창을 한 번 흔들었다.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정전으로 멎어 있어서 부엌에 들리는 것은 바람과 불 소리뿐이었다.

칼“다섯 살짜리 거다.” 칼이 말했다. 말을 하고 나서야 그는 자기가 대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라는 애들 옷을 늘 두 치수 크게 지었다. 봄에 데려와서 입히고, 그다음 봄에도 입히고, 그다음 봄에도 입히려고. 크면 소매를 하나씩 풀면 된다고 했다.”

노라라는 이름이 이 부엌에서 소리가 된 것은 두 해 만이었다. 칼은 그 이름이 불 소리 사이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는데, 이름은 생각보다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일곱 번째는 눈의 불빛을 한 단계 낮추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칼은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일곱 번째“데려오지 않았습니까.”

칼“안 데려왔다. 봄이 두 번 왔고 두 번 다 그냥 지나갔다. 어느 애를 데려올지도 나는 묻지 않았다. 노라는 정해 두었을지도 모르지. 봄에 하자고 미룬 건 나였고, 약속이냐고 묻길래 약속이라고 했다.” 칼은 난로의 불을 보면서 말했다. 목소리는 대장을 읽을 때와 같은 높이였다. “그 뒤로 약속은 안 한다.”

일곱 번째“약속이라는 분류는 제 목록에 없습니다.”

칼은 웃었다. 소리는 짧았고 코로 한 번 빠져나간 숨에 가까웠으나, 웃음이 맞았다. 자기 웃음소리를 그는 두 해 만에 들었다. 정비 구역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어디서 고장 신호가 난 줄 알았을 것이다.

일곱 번째의 눈이 반 박자 늦게 깜박였다. 난로 불빛 속에서는 그 늦음이 정비대 위에서보다 또렷했다. 불빛이 꺼졌다가 켜지는 틈에 칼은 자기 숨을 한 번 맞추어 보았고, 숨은 그 틈에 넉넉히 들어갔다.

칼“너도 반 박자 늦는군. 내 무릎이랑 같다.”

칼은 일어나서 난로 옆 의자로 갔다. 두 해 동안 그는 이 의자 위의 것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그 겨울 셋째 날 밤에 의자와 외투를 한 번 들었다가 내려놓은 뒤로 그는 이 의자 위의 것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외투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어깨선을 따라 먼지가 앉아 있어서 그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한 번 털었다. 마지막 소매는 몸판에 반쯤 붙은 채 늘어져 있었다. 솔기 끝에 꽂힌 바늘의 귀에는 노라가 매듭을 짓지 않은 실이 그대로 꿰여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난로 앞 바닥에 앉아 외투를 무릎에 펼쳤다. 바늘은 그의 손가락에 비해 너무 작아서, 볼트를 반 바퀴 단위로 맞추는 손이 바늘 하나를 쥐는 데 세 번을 놓쳤다. 남은 솔기는 손가락 한 뼘 길이였다. 그는 노라가 뜬 땀의 간격을 눈으로 재어 가며 한 땀씩 따라 떴다. 일곱 번째 땀에서 바늘이 미끄러져 왼손 검지 끝을 찔렀고, 피가 한 방울 맺혔다.

일곱 번째“출혈이 있습니다. 작업에는 지장이 없는 양입니다.”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피를 바지에 닦지 않고 다음 땀을 떴다. 솔기가 끝나는 자리에서 실을 두 번 감아 한 번 꺾어 매듭을 지었는데, 고철선에서 배운 매듭이라 바느질하는 사람의 매듭은 아니었으나 풀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실 끝은 이로 끊었다. 그는 왼쪽 소매 끝을 안으로 한 번 접고, 그 위를 한 번 더 접었다. 오른쪽 소매도 똑같이 두 번 접었다. 애들 옷은 두 번 접어 두었다가 크면 하나씩 푸는 것이라고 노라는 말했었다. 그는 두 번 접힌 소매 끝을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난로 불빛이 그 손등의 기름 줄 위에서 흔들렸고, 일곱 번째의 관절에서 마지막 서리가 물이 되어 떨어졌다.

조치 칸

VII · 조치 기록

전기는 새벽 여섯 시에 들어왔다. 칼은 난로 앞 바닥에서 깼는데, 언제 잠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깨어 보니 등에 그의 회색 외투가 덮여 있었다. 어젯밤 현관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였다. 일곱 번째는 밤새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오른팔 관절에서는 김이 다시 가늘게 새고 있었다. 다시 샌다는 것은 다 녹았다는 뜻이었다.

칼“이걸 네가 덮었나.”

일곱 번째“새벽 세 시에 당신의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측정했습니다. 사람의 체온 저하는 첫째 규칙의 범위입니다. 옷걸이에 걸린 천 가운데 가장 두꺼운 것을 골랐습니다.”

칼“합리적이로군.”

난로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고 석탄 통은 반쯤 비어 있었다. 칼이 통을 들여다보자 일곱 번째가 먼저 말했다.

일곱 번째“불이 꺼지면 관절이 다시 업니다. 밤사이 석탄을 일곱 덩이 넣었습니다.”

칼“석탄값은 대장에 안 적는다.” 칼은 자루에서 기름통을 꺼내 기체의 오른팔 관절에 기름을 채웠다. 녹은 관절은 기름을 예상보다 많이 먹었고, 그는 그 양을 눈으로 재어 두었다. 대장에 적을 숫자였다.

칼은 외투를 입고 난로의 재를 긁어냈다. 의자 위에는 소매가 두 번 접힌 작은 외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았고, 보았다는 것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침실 문은 어젯밤부터 닫힌 채였고, 그는 그 문을 열지 않고 현관으로 나갔다.

일곱 번째“의자 위의 옷은 정비 구역으로 가져가지 않습니까.” 현관에서 일곱 번째가 물었다.

칼“안 가져간다. 그건 이 집 물건이다.”

일곱 번째“어젯밤 솔기 끝에 지은 매듭은 정비 구역 매듭입니다. 꼬리표에 쓰시는 것과 같습니다.”

칼“그것밖에 모른다.”

일곱 번째“풀리지 않는 매듭입니다. 한쪽 끝을 당기면 풀린다는 점만 다릅니다.”

칼은 문고리를 잡은 채 그 말을 따져 보았다. 풀리지 않으면서 한쪽 끝을 당기면 풀리는 매듭은 고철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던 매듭이었다. 파도에는 버티고, 사람이 풀려고 할 때만 풀렸다. 그는 그 설명을 기체에게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이웃집 여자가 문 앞의 눈을 쓸고 있었다. 여자는 빗자루를 멈추고 칼을 보았고, 그 뒤를 따라 내려오는 기체를 보았다. 그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두 해 만에 보았다는 얼굴이었다.

이웃 여자“오르벡 씨, 어젯밤에 집에 들어왔었소? 밤중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길래 도둑인 줄 알았소.”

칼“하룻밤이다. 기체 관절이 얼 뻔했다.”

이웃 여자“깡통이랑 같이 잤단 말이오?”

칼“기체는 안 잔다. 나만 잤다.”

이웃 여자“어쨌든 그 집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걸 보니 좋습디다. 노라 씨 있을 때처럼.”

칼“기체 때문이다.” 칼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여자는 빗자루를 든 채 기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눈을 쓸었고, 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정비 구역으로 돌아가는 눈길에서 일곱 번째는 어젯밤과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칼은 그것을 꼬리표에 적을지 잠깐 생각했다가, 이미 적은 항목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보일러는 다시 돌고 있었고, 정비공들은 아직 반쯤만 출근해 있었다. 그는 외투를 벗기도 전에 지하 대장실로 내려가 단말을 켰다.

조치 기록 칸은 짧았다. 칼은 조치 내용 칸에 처음에 정비공 자택으로 데려감이라고 쳤다가 지웠다. 기체는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관하는 것이었고, 대장의 말은 대장의 양식을 따라야 했다. 그는 다시 적었다. 날짜, 기체명 일곱 번째, 조치 내용은 야간 보관 장소 변경, 정비공 자택, 동결 방지. 결과 칸에는 관절 해빙과 패킹 손상 없음을 적었고, 마지막 칸에는 늘 쓰던 대로 작업 지장 없음이라고 적었다.

일곱 번째“자판 소리를 셌습니다. 지우는 소리가 다섯 번 있었습니다.” 대장실 문 밖에서 일곱 번째가 말했다. 기체는 이번에도 문틀 바깥에 서 있었다.

칼“오타다.”

일곱 번째“다섯 글자를 지우고 다른 글자를 쳤습니다. 오타는 대개 한 글자입니다.”

칼“그럼 다섯 글자짜리 오타다. 대장에는 고친 다음 것만 남는다.”

반장“어젯밤 정비 구역이 비어 있더군. 기체는 어디 뒀나.” 반장이 대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칼“내 집이다. 대장에 적었다.”

반장“야간 보관 장소 변경, 정비공 자택, 동결 방지. 작업 지장 없음.” 반장은 화면을 소리 내어 읽고 나서 칼을 돌아보았다. “규정상 기체를 구역 밖에서 재우려면 사전 승인이 필요하네. 알고 있지.”

칼“안다. 정전은 사전에 안 알려 준다.”

반장“그래서 사후 기록이군. 이 줄은 내가 결재하지.” 반장은 단말의 결재 칸에 자기 번호를 넣었다. 그러고 나서 화면을 한 번 더 보았다. “자네가 이 한 줄을 쓰는 데 한참 걸렸겠어.”

칼“양식대로 썼다. 양식대로 쓰는 데는 오래 안 걸린다.”

반장“의뢰인한테는 알려야 하지 않나. 남의 기체를 자기 집에 재웠으면.” 반장이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의뢰 부서 칸에 연락처가 있을 텐데.”

칼“꼬리표에 적는다. 의뢰인이 알아야 할 일은 꼬리표에 적고, 꼬리표는 기체가 달고 간다. 의뢰인이 꼬리표를 보는지 안 보는지는 내가 모른다.”

반장“자네는 의뢰 부서 칸도 안 읽었지.”

칼“안 읽었다. 기체는 속을 보면 되고, 부서는 속에 없다.”

반장은 더 묻지 않고 나갔다. 칼은 그날 일곱 번째의 꼬리표에 세 줄을 적었다.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그리고 그 아래에 야간 보관 장소 변경. 매듭은 그의 매듭이었다.

일곱 번째“셋째 줄은 지난주 꼬리표에 없던 줄입니다.” 일곱 번째가 손목에 묶인 꼬리표를 눈높이로 들어 올려 보며 말했다.

칼“지난주에는 없던 일이니까. 일이 있었으면 적는다.”

일곱 번째“기록이 정확합니다.”

금요일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일곱 번째는 혼자 언덕 너머 쪽으로 걸어갔다. 눈 녹은 길에 쇠 발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혔고, 손목의 꼬리표가 걸음마다 한 번씩 흔들렸다. 칼은 그 간격이 평소의 간격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정비 구역 문간에서 보았다. 같이 걷는 사람이 없으면 기체의 보폭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칼은 문간에서 돌아와 대장의 그날 줄에 아침에 채운 기름의 양을 숫자로 보탰다. 숫자로 적을 수 있는 것은 숫자로 적는 것이 그의 대장이었다.

VIII · 확인

다음 주 목요일 일곱 번째는 같은 시각에 왔다. 칼은 손목 고리의 꼬리표를 풀다가 매듭이 바뀌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납작하게 한 번 겹친 매듭이었다. 그는 손톱으로 매듭을 풀고 꼬리표를 뒤집었다. 그가 적은 세 줄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연필이 아니라 잉크였고, 줄 칸이 없는 마분지 위에서도 글자가 기울지 않았다. 확인이라는 두 글자였고, 획의 끝이 같은 자리에서 멈추어 있었다. 칼은 작업대 서랍을 열어 맨 아래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지난해 이른 봄에 받은 의뢰서였다.

그는 두 종이를 작업등 아래 나란히 놓았다. 받침을 쓰는 순서가 같았고, 이응을 닫는 자리가 같았다. 의뢰인이 꼬리표를 읽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기체는 의뢰인의 것이었고, 의뢰인이 정비 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규정에도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확인이 셋째 줄 아래에만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원인 불명 아래에 확인이 붙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칼“이 줄이 붙은 원인은.” 칼은 꼬리표를 기체의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일곱 번째“바깥 원인입니다.”

칼“그렇겠지. 너한테는 잉크가 없으니까.”

바뀐 매듭과 이 글씨를 한 줄로 잇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잇는 데 필요한 것은 추측 하나였고, 추측은 대장에 적는 것이 아니었다. 칼은 의뢰서를 다시 접어 서랍 맨 아래에 넣고, 그 위에 확인이 적힌 꼬리표를 얹었다. 그리고 새 꼬리표에 늘 쓰던 두 줄을 적었다. 매듭 이상, 원인 불명.

일곱 번째“그 꼬리표는 다시 묶지 않으십니까.” 일곱 번째가 서랍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칼“안 묶는다. 새 꼬리표를 묶고, 서랍에 든 건 이제 기록으로 둔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기록은 버리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의뢰인에게 물을 것이 있으면 꼬리표에 적으십시오. 꼬리표는 제가 달고 갑니다.”

칼“의뢰인한테 물을 건 없다. 의뢰서에 증상이 있었고, 증상은 내가 본다. 너한테 물을 것도 원인뿐이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꼬리표에는 원인 칸만 쓰십시오.”

칼은 그것이 기체의 권고인지 확인인지 따지지 않았다. 그는 새 꼬리표에 두 줄을 적고, 셋째 줄 자리는 비워 두었다. 적을 일이 없는 주에는 셋째 줄이 없었다.

일곱 번째“다음 주에도 셋째 줄이 있습니까.”

칼“일이 있으면 있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일이 없으면 두 줄입니다.”

동료“집에 데려갔다며.” 젊은 정비공이 찻잔을 들고 와서 정비대 모서리에 기대었다. “깡통을 집에 재운 정비공은 이 구역에서 오르벡 씨가 처음일 거요. 반장님이 결재하면서 한참 웃었다던데.”

칼“동결 방지다.”

동료“그럼 다음 정전 때도 데려가시오?”

칼“정전이 나면 그때 대장을 보고 정한다. 지난번에 그렇게 했고 결과가 괜찮았으니 같은 조건이면 같은 조치가 나오겠지.”

며칠 뒤 서무가 정비대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반장의 사후 결재가 서무실까지 올라갔고, 서무는 서무대로 할 일을 찾아낸 얼굴이었다.

서무“야간 보관 장소 변경 사전 승인 양식이에요. 미리 내 두시면 다음 정전 때는 사후 결재 없이 바로 쓰실 수 있어요. 정비공 자택이라고 한 칸만 채우시면 됩니다.”

칼“안 낸다.”

서무“왜요? 오르벡 씨한테 편한 서류인데요.”

칼“미리 내 두면 다음에도 데려간다는 말이 된다. 다음 일은 다음 정전이 정한다. 나는 그런 말은 미리 안 한다.”

서무는 양식을 도로 접어 들고 갔다. 젊은 정비공이 그 뒷모습을 보다가 칼을 보았으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정전이 다시 나지 않았다. 한파가 한 번 더 온 목요일, 칼은 해 질 무렵 보일러의 압력계를 오래 보았다. 바늘은 제자리에 있었다. 재가동을 마친 일곱 번째는 정비대 옆 받침 위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칼은 한 시간마다 간이침대에서 일어나 압력계를 보았다. 바늘은 매번 제자리에 있었다. 두 시에는 받침 앞까지 가서 오른팔의 김을 보았고, 김은 낮과 같은 굵기로 새고 있었다. 보일러가 도는 한 정비 구역은 얼지 않았고 받침 위의 관절도 얼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 네 번 일어났고, 다섯 번째에는 일어나지 않고 보일러의 숨소리를 세다가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곱 번째는 받침에서 내려와 문 앞에 섰다. 칼은 보일러실 문간에서 압력계를 다시 보고 있었다.

일곱 번째“어젯밤에는 보일러가 돌았습니다. 관절 온도는 동결 기준보다 높았습니다. 언덕 너머 길도 열려 있습니다.”

칼“그럼 가라. 조건이 다르면 조치도 다르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그 장소는 아직 제 목록에 있습니다. 지우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칼“알고 있다.” 칼은 압력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지우라는 말은 그 뒤에 붙지 않았다.

그 뒤로 꼬리표에 확인이 붙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매듭은 가끔 바뀌어 돌아왔으나 셋째 줄이 없는 꼬리표에는 그 아래 적을 자리도 없었다. 칼은 그 인과를 따로 적지 않았다. 셋째 줄이 있어야 확인이 붙는다는 것은 한 번의 기록으로 세울 수 있는 규칙이 아니었다.

칼은 그 겨울 내내 보일러실 간이침대에서 잤고, 무릎은 여전히 접힌 채였다. 대장의 그 한 줄은 다른 줄들 사이에서 양식대로 적힌 채 반장의 결재 번호를 달고 남았다. 꼬리표의 확인 두 글자를 본 사람은 칼 하나였다. 그는 서랍 맨 아래의 종이 두 장을 그 겨울 내내 버리지 않았다. 서랍을 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두 장은 맨 아래에서 같은 순서로 겹쳐 있었고, 그는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VII · 하루 더

전기는 새벽 여섯 시에 들어왔다. 칼은 난로 앞 바닥에서 깼고, 깨자마자 일곱 번째의 오른팔부터 보았다. 관절의 서리는 다 녹았으나 패킹 틈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녹은 물이 마르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면 언덕 길에서 그 물이 다시 언다. 물이 언 관절은 서리가 낀 관절보다 나빴다.

그는 자루에서 기름통을 꺼내 관절에 기름을 채웠다. 녹은 관절은 기름을 예상보다 많이 먹었다. 기름이 패킹 틈의 물기를 밀어내며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고, 칼은 그 방울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방울은 해가 다 뜨도록 맑아지지 않았다.

칼은 침실 문을 열고 창 옆 벽의 전화로 정비 구역 사무실을 불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는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어 들고 있었다.

칼“오늘 하루 쉬겠다.”

반장“자네가 쉬겠다는 말은 두 해 만에 처음 듣는군. 어디 아픈가.”

칼“내가 아니라 기체다. 관절이 덜 말랐으니 오늘 밤까지 말려서 데려가겠다.”

반장“기체 때문에 휴가를 쓰는 정비공은 처음 보네. 대장에는 뭐라고 적을 텐가.”

칼“내일 가서 적는다. 오늘 일은 오늘 끝나야 적을 수 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그는 침실 문을 도로 닫았다. 하루는 길었다. 칼은 난로 불을 지키는 동안 손을 놀릴 데를 찾았고, 찾을 데는 많았다. 두 해 동안 아무도 기름을 치지 않은 경첩이 문마다 울었고, 부엌 창의 걸쇠는 녹이 슬어 반쯤만 걸렸다. 그는 공구 상자를 열었다. 공구를 가지러만 들르던 집에서 공구를 쓰는 것은 두 해 만이었다.

칼“이 경첩은 노라가 세 번 말했다. 울 때마다 기름 좀 치라고. 나는 두 번까지는 내일 한다고 했고 세 번째에 쳤다. 그 뒤로는 안 울었는데 두 해 만에 다시 운다. 손이 안 가면 쇠는 원래대로 돌아간다.” 칼은 경첩 축에 기름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며 말했다. 난로 앞의 기체에게 하는 말인지 경첩에게 하는 말인지는 그도 정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사람이 사는 집도 그렇습니까.”

칼“모른다. 집은 내 전공이 아니다.”

창 걸쇠의 녹을 긁어내고 나니 정오가 지났다. 칼은 찬장에서 마른 빵을 찾아 난로 위에 데워 먹었다. 일곱 번째는 그가 빵을 먹는 동안 눈을 그쪽으로 두고 있었다.

칼“사람 먹는 걸 처음 보나.”

일곱 번째“정비 구역에서 당신이 먹는 것을 측정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정비 구역에서 먹는 시각이 일정하지 않고, 먹지 않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습니다.”

칼“그것도 대장에 적어 둘 거냐.”

일곱 번째“제 대장은 없습니다. 당신의 대장에는 사람 칸이 없습니다.”

일곱 번째“식탁의 찻잔이 두 개 엎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세 번째 잔으로 물을 마셨습니다.”

칼“그 둘은 그냥 둔다.”

칼은 빵을 마저 먹었다. 그 대답에 붙일 말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한 것이 이번에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는 의자 쪽을 한 번 보았다. 소매가 두 번 접힌 외투가 그 위에 그대로 있었다.

일곱 번째“그 의자는 고치지 않습니까. 다리 하나가 바닥에서 이 밀리 떠 있습니다.”

칼“그건 고장이 아니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고장 목록에서 뺍니다.” 기체는 잠시 눈의 불빛을 고르게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이 집 안을 측정해도 되겠습니까. 어젯밤에는 현관과 부엌만 측정했습니다. 목록에 넣은 장소는 전체를 알아야 정확합니다.”

칼“해라. 침실은 빼라.”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침실은 목록에서 뺍니다.”

기체는 고개를 숙인 채 집 안을 한 바퀴 돌았다. 현관에서 부엌까지, 부엌에서 뒷문까지, 창고 문 앞까지 걸었고, 침실 문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쇠 발이 마룻바닥을 디딜 때마다 낡은 판자가 한 번씩 울었다. 칼은 걸쇠를 긁으면서 그 울음의 자리를 귀로 세었다. 판자가 우는 자리는 노라가 늘 피해서 걷던 자리였고, 기체는 그 자리를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칼“거기 셋째 판자는 밟지 마라. 밤에 울면 잠이 깬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이 집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있습니까.”

칼“지금은 없다. 판자 얘기는 버릇이다.”

오후에 일곱 번째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절의 물기가 다 말랐다는 뜻이었다. 기체는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다보았고, 칼이 뒤따라 나가자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일곱 번째“현관 계단은 세 칸입니다. 둘째 칸이 왼쪽으로 이 도 기울었습니다. 어젯밤 당신의 왼발이 그 칸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칼“미끄러진 적 없다.”

일곱 번째“일 센티 미끄러졌습니다.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이 미끄러진 것으로 분류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칼은 대꾸하지 않고 둘째 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받침목 하나가 썩어 있었다. 그는 창고에서 각목을 찾아 받침목을 갈았고, 수평자를 대어 칸이 바로 섰는지 보았다. 기포가 한가운데에 섰다. 일곱 번째는 그동안 계단 아래에 서서 칸마다의 높이를 차례로 보고 있었다.

칼“다른 칸은.”

일곱 번째“첫째와 셋째는 수평입니다. 맨 아래 첫째 칸은 다른 칸보다 낮습니다.”

칼“그건 원래 그렇다.”

해가 진 뒤 둘은 정비 구역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눈은 낮 동안 조금 녹았다가 다시 얼어서 길이 미끄러웠고, 일곱 번째의 걸음은 어젯밤처럼 짧았다. 칼은 나오기 전에 난로 불을 껐다. 의자 위 외투의 소매가 두 번 접혀 있는 것을 그는 불을 끄기 직전에 한 번 더 보았다.

일곱 번째“이 집의 열쇠는 하나입니까.” 칼이 문을 잠그는 것을 보며 일곱 번째가 물었다.

칼“하나다. 하나 더 있던 건 이제 쓸 사람이 없다.”

일곱 번째“제 목록에 있는 장소에 저는 열쇠가 없습니다. 문이 잠겨 있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단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칼“들어갈 일 없다. 동결 방지는 내가 있을 때만 한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계단까지로 기록하겠습니다.”

칼“측정은 끝났나.”

일곱 번째“끝났습니다. 지금은 적용하고 있습니다.”

칼“뭘 적용하는데.”

일곱 번째“측정한 값입니다.”

칼은 그것이 대답인지 아닌지 따져 보다가 따지기를 그만두었다. 무릎이 어젯밤보다 덜 쑤셨고, 그는 그것을 받침목을 갈며 몸을 덥힌 탓으로 돌렸다.

VIII · 두 번째 눈길

이튿날 칼은 대장에 이틀 치를 한꺼번에 적었다. 야간 보관 장소 변경, 정비공 자택, 동결 방지. 다음 줄에는 주간 보관 연장, 관절 건조. 정비공이 하루 쉰 것은 기체 대장이 아니라 인사 장부의 일이어서 적지 않았고, 마지막 칸에는 늘 쓰던 말을 적었다. 작업 지장 없음.

반장“주간 보관 연장이라.” 반장이 대장을 넘겨보며 말했다. “자네 대장에 이런 줄이 들어간 건 처음이군. 계단까지 고쳤다면서. 이웃 사람이 사무실에 전화를 했더군, 오르벡 씨 집에서 하루 종일 망치 소리가 난다고.”

칼“받침목이 썩었다. 썩은 걸 두면 사람이 다친다.”

반장“두 해 동안 썩어 있던 거 아닌가.”

칼“두 해 동안은 그 계단을 밤에 오른 사람이 없었다.”

반장“그 기체는 올랐고.”

칼“기체도 오른다. 사람보다 무겁게 오르니 썩은 칸은 기체가 먼저 안다. 그 칸을 찾은 것도 기체였다.”

반장“깡통이 자네 집 계단을 고치게 했다는 말이군. 대장에는 그것도 적나.”

칼“안 적는다. 내 집 계단은 기체 대장 칸이 아니다.”

동료“집에 데려갔다며. 하루 휴가까지 쓰고.” 젊은 정비공이 찻잔을 들고 와서 정비대 모서리에 기대었다. “하루 더 있었던 것도 동결 방지요?”

칼“건조다. 동결 방지의 뒷일이다. 얼음을 녹이고 물기를 안 말리면 일을 반만 한 거다.”

그 겨울의 끝 무렵에 한파가 한 번 더 왔다. 정전은 나지 않았으나 보일러가 정비 구역 구석까지 데우지 못할 만큼 추웠고, 정비대 위에 누운 일곱 번째의 오른팔 관절에 다시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칼은 대장의 지난 기록을 한 번 넘겨 보고 나서 공구 상자를 닫았다.

칼“가자.”

일곱 번째“제 작업 구역 목록에 있는 장소입니다. 길 안내는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필요 없었다. 정비 구역 문을 나서자 일곱 번째가 반걸음 앞서 걸었고, 칼이 꺾어야 할 모퉁이에서 기체가 먼저 꺾었다. 언덕 아래 갈림길에서도 기체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칼은 뒤따르면서 일곱 번째의 보폭이 자기 무릎에 맞추어 짧아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꼬리표에 적을지 생각하다가, 이미 적은 항목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현관 계단 앞에서 일곱 번째가 멈추었다. 기체는 둘째 칸에 쇠 발을 한 번 올려 보고 내렸다. 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일곱 번째“둘째 칸이 수평입니다.”

칼“내가 고쳤다. 기억 안 나나.”

일곱 번째“기억합니다. 확인했습니다. 고친 것은 고친 뒤에 한 번 확인하는 것이 당신의 순서입니다.”

이웃 여자“오르벡 씨, 그 깡통이 또 왔소?” 옆집 창이 열리고 이웃 여자가 목만 내밀었다. “밤에 그 큰 게 계단에 서 있으니 간이 떨어지겠소. 현관 등이라도 켜 두시오. 깡통이 계단에서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칼“깡통은 안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건 나고, 그 칸은 지난번에 내가 고쳤다.”

일곱 번째“이웃의 권고는 타당합니다. 현재 계단의 조도는 사람이 칸의 모서리를 보기에 부족합니다.” 창이 닫힌 뒤 일곱 번째가 말했다.

칼“타당한 건 안다. 켜는 건 다른 일이다.”

칼은 열쇠를 돌렸다. 이번에는 자물쇠에 성에가 끼어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 손이 먼저 문틀 안쪽의 스위치로 갔다가, 누르지 않은 채 내려왔다. 난로 옆 의자에는 소매가 두 번 접힌 외투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는 그쪽을 한 번 보았다가 석탄 통으로 손을 뻗었다. 그날 밤에도 그는 의자에 앉지 않았고 침실 문을 열지 않았다. 일곱 번째는 난로 앞의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일곱 번째“맨 아래 칸은 언제 놓았습니까. 받침목의 나이테로는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불이 붙고 나서 일곱 번째가 물었다.

칼“내가 놓은 게 아니다. 이 집을 얻을 때부터 세 칸이었다. 둘째 칸이 기운 건 받침목이 썩어서고, 받침목이 썩은 건 내가 두 해 동안 안 봐서다.”

일곱 번째“맨 아래 칸의 높이는 다른 칸보다 이 센티 낮습니다. 아동의 보폭으로 오르기 쉬운 높이입니다. 그 칸의 모서리가 다른 칸보다 많이 닳았습니다. 앉았던 자리처럼 닳았습니다.”

칼“이웃 애들이 앉았다. 부모가 둘 다 야간에 나가는 집 애들이었는데, 노라가 등을 켜 두면 그 아래로 모였다.”

칼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석탄을 하나 더 넣었다. 맨 아래 칸이 왜 낮은지를 그는 이십 년 가까이 한 번도 따져 본 적이 없었고, 그 칸이 누구의 높이에 맞았는지는 오늘 기체에게서 처음 들었다. 따져 보지 않은 것이 이 집에는 계단 말고도 여럿 있었고, 그는 오늘 밤 그것을 다 따질 생각은 없었다.

같은 자리라는 것을 칼은 바닥의 얼룩으로 알았다. 지난번 서리가 녹아 떨어진 자리에 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체의 무릎은 그 자국 위에 정확히 놓였다. 칼은 난로 앞 바닥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무릎을 오래 보았다. 정비공으로서 그는 그것을 기억력이 좋은 기체라고만 판단했다.

이튿날 아침 둘은 언덕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설 때 칼은 둘째 칸에 왼발을 디뎠고, 칸은 기울지 않았으며 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일곱 번째는 그의 반걸음 뒤에서 같은 박자로 내려왔다.

일곱 번째“오늘 아침 당신은 둘째 칸에서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둘입니다. 고친 칸과, 제가 적용한 보폭입니다. 원인이 둘인 경우 당신의 대장에는 어떻게 적습니까.”

칼“둘 다 적는다. 하나만 적으면 다음 사람이 반만 고친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둘 다 기록하겠습니다.”

칼은 언덕을 다 내려와서야 그 대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체가 사람의 걸음에 원인을 붙였고,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기체 자신이었다. 그는 그것을 결함으로 적을지 조치로 적을지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목요일 꼬리표의 빈자리에 한 줄을 보탰다. 동결 방지 조치 이 회, 기체가 경로 자율 보행, 원인 불명.

VII · 치수

전기는 새벽 여섯 시에 들어왔다. 칼은 거의 자지 못했다. 난로 앞 바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불을 지키다가 몇 번 졸았고, 졸 때마다 무릎이 그를 깨웠다. 날이 밝자 그는 난로의 재를 긁어내고 의자 위의 작은 외투를 한 번 보았다. 소매가 두 번 접혀 있었다.

칼은 자루에서 기름통을 꺼내 기체의 오른팔 관절에 기름을 채웠다. 녹은 관절은 기름을 예상보다 많이 먹었다. 기름을 넣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기체의 눈을 보지 않았고, 다 넣은 뒤에야 의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어젯밤 그 치수는 어떻게 알았나.” 칼은 외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일곱 번째“소매 길이와 어깨 폭과 옷 길이를 쟀습니다. 세 값이 칠 세 아동 표준 치수표의 값과 일 센티 안에서 맞았습니다.”

칼“손을 안 대고 쟀나.”

일곱 번째“눈으로 쟀습니다. 문틀을 지날 때 문틀의 높이를 알았으므로, 그 높이를 자로 삼았습니다.”

칼“정비 기체 저장판에 아동 치수표가 왜 들어 있나.”

일곱 번째“제 야간 작업 구역의 기준표입니다. 그 구역의 일은 거기 있는 사람의 몸 크기에 맞추어 정합니다. 그 구역에는 그 치수의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칼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다음 질문은 이미 혀끝에 있었다. 몸 크기로 일을 정하는 구역이 어디냐는 질문이었고, 그것은 원인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배치를 묻는 질문이었다. 배치표는 정비공이 보는 칸이 아니라고 그는 첫 주에 이 기체에게 말해 두었다.

칼“야간 작업 구역은 배치표 칸이니 내 칸이 아니다. 그건 안 묻겠다.” 그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마지막 소매가 마지막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바늘이 꽂혀 있어서인가.”

일곱 번째“바늘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솔기의 실은 색이 바랬고 그 소매의 실은 바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꿰맨 쪽이 덜 바랩니다. 그 소매가 마지막이었고, 마지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합리적이로군.”

칼“어젯밤 눈길에서 재던 건 끝났나.” 현관에서 장화를 신으며 칼이 물었다.

일곱 번째“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길을 한 번 더 걸으면 끝납니다.”

칼“그럼 오늘 아침에 끝나겠군. 내려가는 길도 같은 길이다.”

일곱 번째“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과 무릎이 접히는 각도가 다릅니다. 같은 길이 아닙니다.”

칼은 장화 끈을 매던 손을 멈추고 기체를 올려다보았다. 무릎이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다르게 접힌다는 것은 그가 열한 살 이후로 날마다 알던 일이었고, 그것을 남에게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끈을 마저 매고 문을 열었다.

정비 구역으로 내려가는 눈길에서 일곱 번째는 어젯밤과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언덕 아래 갈림길을 지났을 때 기체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말을 꺼냈다.

일곱 번째“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칼은 걸음을 멈출 뻔했다. 기체가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묻는 문장은 그가 정비 구역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기체는 대답하거나 보고하거나 확인을 구했다. 허가를 구하는 쪽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칼“해라.”

일곱 번째“소매는 언제 하나씩 풉니까.”

칼“크면.”

일곱 번째“크기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신장입니까, 팔 길이입니까.”

칼“모른다. 그건 노라가 알았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모르는 것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칼“노라는 애들 키를 문틀에 연필로 표시해 두라고 했다. 그 높이가 기준이었을 수는 있는데, 나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다. 확인 못 한 건 기준으로 쓰지 마라.”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이 집 문틀에는 연필 표시가 없습니다. 어젯밤 지날 때 보았습니다.”

칼“없다.”

기체는 그 대답을 받아 적는 듯 눈의 불빛을 한 번 낮추었다가 올렸다. 모른다는 대답을 받은 기계가 더 묻지 않는 것을 칼은 정비공으로서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그는 그날 오전 꼬리표에 늘 쓰던 두 줄을 적고, 둘째 줄 아래에 처음 보는 항목을 하나 보탰다. 기체 측 질문 일 회, 내용은 정비 무관.

반장“정비 무관이면 왜 적었나.” 꼬리표를 넘겨본 반장이 물었다.

칼“기체가 질문을 한 것 자체가 처음이다. 처음 생긴 일은 내용이 무관해도 적는다.”

반장“무슨 질문이었나.”

칼“옷 소매에 관한 거다. 정비와 무관하다고 적었으니 무관하다.”

반장“자네 대장은 늘 원인을 모른다고 하면서 무관한 건 확실히 아는군.” 반장은 꼬리표를 돌려주며 웃었다. “깡통이 소매를 물었다. 노조 회관 부엌 시절의 자네라면 그걸로 농담 세 개는 만들었을 거야.”

칼“합리적이로군.”

반장은 그것이 대답의 전부라는 것을 알아듣고 자리를 떴다. 칼은 서무실 선반에서 피복 지급 규정집을 빌려 왔다. 맨 뒤에 조합원 자녀 피복의 표준 치수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아침에 들은 세 값을 그 표의 칠 세 줄과 맞추어 보았고, 세 값은 일 센티 안에서 맞았다. 기체의 대답을 기체 밖의 기록으로 확인한 것은 이 대장에서 처음이었다. 그는 대장의 그날 줄에 원인 칸을 채웠다. 치수 판정 근거, 표준 치수표 대조, 일치.

일곱 번째“원인 칸이 채워졌습니다. 이 대장에서 처음입니다.” 떠나기 전에 관절을 한 번 더 보고 다시 깨운 일곱 번째가 단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칼“확인한 것만 채운다. 확인 안 한 건 여전히 원인 불명이다.”

일곱 번째“확인된 원인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흔두 번째 줄입니다.”

칼“아흔두 줄 가운데 하나다. 비율로 치면 너는 아직 원인 불명인 기체다. 하나를 찾았다고 대장 이름을 바꾸지는 않는다.”

칼은 꼬리표를 기체의 손목 고리에 묶었다. 손을 떼기 전에 그는 매듭을 한 번 더 당겨 보았다. 두 번 감아 한 번 꺾은 매듭은 어젯밤 작은 외투의 소매 솔기 끝에 지은 것과 같은 매듭이었다.

VIII · 순서

그 겨울 내내 칼은 목요일마다 원인을 하나씩 물었다. 질문을 한 번 시작하고 나니 대장의 원인 불명 칸들이 전보다 눈에 걸렸고, 걸리는 것을 그냥 두는 것은 정비공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는 원인만 물었다. 왜 걷느냐, 어디를 지키느냐 같은 것은 묻지 않았고, 그런 것은 대장에 칸이 없었다.

칼“고개가 한쪽으로만 돌아가는 원인은.”

일곱 번째“측정 중입니다.”

칼“보폭이 짧아지는 원인은.”

일곱 번째“그것도 측정 중입니다. 측정이 끝난 값은 이미 적용하고 있습니다.”

칼“끝난 값이 있으면 그걸 말해라. 반쯤 끝난 대답도 대답이다.”

일곱 번째“당신의 왼쪽 무릎은 보폭이 짧을수록 덜 접힙니다. 그 값까지는 끝났습니다. 그 값을 제가 왜 적용하는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단말에 손을 안 대고 대장을 읽는 원인은.” 칼은 원인 칸이 처음 채워진 날 기체가 그것을 먼저 알았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일곱 번째“대장은 단말을 거치지 않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대장에 기록된 기체입니다.”

칼“그럼 네 결함 목록도 읽었겠군.”

일곱 번째“읽었습니다. 여섯 줄입니다.”

칼“반박할 거 있나.”

일곱 번째“없습니다. 기록이 정확합니다.”

칼“볼트 셋의 조임이 바뀌는 원인은.” 다음 목요일 칼은 가슴판을 열기 전에 물었다.

일곱 번째“바깥 원인입니다. 바깥 원인에 대해서는 제가 대답할 순서가 없습니다.”

칼“순서가 없다는 건 영영 안 한다는 거냐.”

일곱 번째“제 순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칼은 그 문장의 주어를 찾다가 찾지 않기로 했다. 제 순서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순서라는 뜻이고, 누군가는 원인 칸이 아니라 이름 칸에 들어갈 말이었다. 그의 대장에는 이름 칸이 기체 하나에 하나뿐이었다.

칼은 그 대답을 대장의 비고 칸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적고 나서 다시 읽어 보니 원인을 적은 것인지 증상을 적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 줄 끝에 원인 불명이라고 덧붙였다. 덧붙인 뒤에도 줄은 여전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셋째 주의 목요일에는 일곱 번째가 먼저 물었다. 가슴판을 닫고 같은 네 자리를 다시 누른 직후였고, 칼은 렌치를 공구함에 넣고 있었다.

일곱 번째“노라는 누구입니까. 제 목록에 없는 이름입니다.”

칼“내 아내였다.”

일곱 번째“목록에 넣어야 합니까.”

칼“넣을 필요 없다. 명령할 사람이 아니다. 명령을 할 수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목록에는 넣지 않고 다른 곳에 기록하겠습니다.”

다른 곳이 어디냐고 칼은 묻지 않았다. 그것은 원인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고, 기체의 저장판에 목록 말고 무엇이 더 있는지는 정비 교본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공구함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용했다.

칼“정지 코드를 누르면 반 박자 머무는 원인은.” 칼은 그 질문을 겨울의 마지막 목요일까지 아껴 두었다. 다른 질문들보다 그 질문이 대장에서 가장 오래된 줄이었다.

일곱 번째“그 질문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순서가 아닙니다.”

칼“순서는 누가 정하나.”

일곱 번째“제가 정합니다.”

칼은 손에 든 렌치를 내려놓았다. 순서를 정하는 기체라는 말을 그는 정비 교본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교본에 따르면 기체의 순서는 명령이 정했고, 명령이 없으면 규칙이 정했다. 그는 그것을 결함 칸에 올릴지 오래 생각했고, 끝내 올리지 않았다. 대답을 미룬 것은 대답을 지어낸 것보다 정직했다.

동료“집에 데려갔다며. 요새는 깡통이랑 문답까지 하신다고.” 젊은 정비공이 찻잔을 들고 와서 정비대 모서리에 기대었다. “깡통이 대답은 해 줍디까?”

칼“동결 방지였다. 문답은 원인 조사고, 대답은 반쯤 한다.”

동료“반쯤이면 사람보다 낫구려. 우리 반장님은 내가 물으면 사분의 일쯤 하시는데.”

칼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대장의 비고 칸을 열어 그 겨울의 문답을 날짜별로 옮겨 적었다. 질문 다섯, 반쯤 한 대답 하나, 측정 중 둘, 순서 보류 둘. 비고 칸에 기체의 말을 옮겨 적은 것은 처음이었다.

반장“자네 대장에 깡통 말이 적혀 있군.” 정기 검토 날 대장을 넘기던 반장이 비고 칸에서 손을 멈추었다. “기체가 한 말을 정비 기록에 옮겨 적는 건 처음 보네.”

칼“증언이다. 원인 조사에는 증언도 들어간다.”

반장“증인이 고장 난 당사자인데.”

칼“그래서 원인 칸이 아니라 비고 칸에 적었다. 당사자 말은 참고만 한다.”

마지막 목요일 일곱 번째는 코드가 다시 들어가자마자 먼저 말을 꺼냈다. 정비대에서 내려와 받침으로 옮겨 서기 전이었고, 눈의 불빛은 아직 다 올라오지 않은 채였다.

일곱 번째“소매를 하나 풀었습니까.”

칼“안 풀었다. 그 옷을 입을 애가 없다.”

일곱 번째“알겠습니다. 풀게 되면 그것도 기록하겠습니다.”

칼“풀 일이 생기면 내가 대장에 적는다. 너는 대장을 읽으니까 따로 알릴 필요는 없다.”

칼은 왜 그걸 묻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그것도 원인을 묻는 질문이었으니 물어도 되었으나, 대답이 측정 중일 것이라는 데에 그는 렌치 한 자루를 걸 수 있었다. 그는 꼬리표에 두 줄을 적고 자기 매듭으로 묶었다. 일곱 번째는 그 밤을 받침 위에서 넘기고 이튿날 아침 언덕 너머 쪽으로 걸어갔고, 칼은 그 겨울의 마지막 원인 불명을 대장에 옮겨 적었다.

그날 낮에 그는 공구를 가지러 언덕 위 집에 들렀다. 필요한 렌치를 찾아 들고 의자 옆을 지나다가 그는 걸음을 반 박자 늦추었다. 외투의 소매는 두 번 접힌 그대로였다. 그것을 하나 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대장에 적을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렌치를 들고 문을 잠갔다.

제0부 6장

현관 등

마흔아홉 · 이른 봄 목요일

아래로 ↓

I · 일정표

그 주 월요일 아침 칼은 정비 대장을 펴서 일곱 번째의 칸을 찾다가 지난겨울의 한 줄 앞에서 손을 멈추었다. 야간 보관 장소 변경, 정비공 자택, 동결 방지, 작업 지장 없음. 그가 쓴 글씨였고, 그 줄을 적던 아침에 손등의 기름 줄을 바지에 두 번 문지른 것까지 그는 기억했다. 대장의 다른 줄과 양식이 똑같은 줄이었으므로 그는 거기서 오래 머물지 않고 맨 아래 빈칸으로 내려갔다.

그 주 월요일 아침 칼은 정비 대장을 펴서 일곱 번째의 칸을 찾았다. 지난겨울 정전이 끝나고도 하루를 더 집에 두었던 그 이틀은 대장에 두 줄로 적혔고, 그 겨울 한파 밤에 그는 한 번 더 같은 조치를 적었다. 야간 보관 장소 변경, 주간 보관 연장. 칸이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칸대로 적었다. 동료들은 그 이틀을 두고 한동안 농담을 했으나 언덕의 눈이 녹기 전에 그만두었다.

그 주 월요일 아침 칼은 정비 대장을 펴서 일곱 번째의 칸을 찾았다. 지난겨울 정전 다음 날 아침 외투의 치수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은 뒤로, 그 겨울 내내 그는 이 기체와 원인을 주고받았고 대장의 비고 칸에 처음으로 기체의 말을 옮겨 적었다. 무릎 값까지는 대답이 왔다. 반 박자의 원인만은 순서가 있다는 말로 보류된 채 비고 칸 맨 아래에 남아 있었다.

일정표는 사무실 문 옆 판자에 압정으로 꽂혀 있었다. 기체 번호와 정비 요일과 담당 정비공의 이름이 등사기로 찍혀 나오는 한 주 한 장짜리 종이였고, 칼은 이 년 동안 그 종이에서 한 줄만 읽었다. 목요일, 일곱 번째, 오르벡. 이번 주에는 그 줄 옆에 작은 쪽지가 하나 더 꽂혀 있었다. 등사기 글자가 아니라 손으로 쓴 글씨였고, 획 하나도 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쪽지에는 세 줄이 적혀 있었다. 등록 이 년 정기 점검. 야간 정비 장소 변경, 보육 구역 환기실. 담당, 구역 관리자. 칼은 그 글씨를 알았다. 이 년 전 이른 봄 비가 오던 아침, 의뢰서 맨 아래에 담당 정비공 지정이라고 쓰고 그 옆에 그의 성을 적어 넣었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그 손에 대해 칼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회색 작업복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린 팔목, 기체의 등록 화면 앞에서 그보다 반 박자 오래 숙이고 있던 고개, 그리고 못 고치면 못 고쳤다고 적겠다는 말에 그럼 됐어요라고 대답하던 낮은 목소리가 전부였다. 이름은 그날 묻지 않았고, 그 뒤로는 물을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사유를 한 번 읽고 쪽지를 반으로 접어 대장의 일곱 번째 칸 사이에 끼웠다. 정비 장소가 바뀌면 바뀐 이유를 대장에 남겨 두는 것이 이 구역의 순서다.

동료“이 년 점검이라. 관리자가 직접 데려가서 밤새 들여다본다는 거 아니오. 졸린 깡통이 생일상을 받는구먼.” 칼의 어깨 너머로 쪽지를 읽은 동료가 웃었다. 그는 칼보다 열 살쯤 어렸고, 이 년 전 비 오던 아침에 그 기체에게 졸린 깡통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도 그였다.

칼“생일이 아니라 점검이다. 등록한 날로부터 이 년이 되면 등록한 쪽에서 한 번 들여다본다. 규정에 있다.”

동료“규정에 있는 걸 챙기는 사람이 이 구역에 아직 있었구려. 그 깡통 교체 신청을 두 번이나 낸 사람이 당신이잖소. 관리자가 밤새 보고 나서 못 쓰겠다고 도장을 찍어 주면 당신 소원이 풀리는 거요.”

칼“그렇게 되면 그것도 합리적이다.”

동료“그나저나 목요일 밤이 비는구먼. 깡통이 정비대에 안 서는 밤이면 당신도 보일러 뒤에서 잘 까닭이 없잖소. 하룻밤쯤 집에 가서 자 보시오.”

칼“간이침대가 가깝다. 목요일 밤에도 하역기는 돌고, 하역기가 돌면 정비공은 그 옆에 있는 편이 낫다.”

동료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세 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정비 구역 사람들은 칼에게 집 이야기를 두 번 넘게 꺼내지 않는 법을 익혔다. 칼은 그 배려에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맡긴 기체를 남보다 하루 일찍 고쳐서 정비대 앞에 세워 두었고, 양쪽 다 그것으로 셈이 맞는다고 여겼다.

점심 무렵 칼은 반장실 문을 두드렸다. 반장은 스무 해 전 파업 부엌에서 칼을 처음 찾아낸 정비 구역의 선임이었고, 머리가 반백이 된 지금은 공구보다 서류를 만지는 날이 많아 손톱이 칼의 것보다 깨끗했다. 칼은 목요일 밤 정비 장소가 바뀐다는 것만 쪽지에 적힌 대로 알렸다.

반장“이 년 점검이라. 그 자리에서 못 쓰겠다는 판정이라도 나오면 서무도 예산 타령만 하지는 못할 거요. 두 번 다 원인 칸이 비어서 돌아온 신청서 아니오. 내가 대신 채워 주겠다고 할 때 받았으면 한 번은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칼“빈칸으로 낸 건 내 신청서였다. 돌아온 것도 내 신청서고.”

반장“그럴 줄 알았소.” 반장은 한참 칼을 보다가 서랍을 닫았다. “그 관리자 말이오, 오늘 아침 일찍 와서 쪽지를 직접 꽂고 갔소. 당신한테 전해 달라는 말도 하나 있었소. 꼬리표는 평소대로 달아 보내 달랍디다.”

칼“평소대로 말고 다는 법은 모른다.”

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반장실을 나왔다. 관리자가 정비공의 꼬리표를 두고 말을 남겼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으나, 이상한 것을 하나 찾을 때마다 대장에 적다가는 대장이 먼저 모자랄 터였다.

오후 내내 칼은 동료가 맡겨 둔 운반 기체 두 대의 바퀴 축을 갈았다. 월요일에 들어온 기체를 월요일 안에 돌려보내는 것은 이 구역에서 칼만 하는 일이었고, 그 대신 그는 목요일 오후만큼은 누구의 기체도 받지 않았다. 동료는 축을 간 기체를 끌고 나가면서 칼의 작업대 위에 담배 한 갑을 올려놓았고, 칼은 그것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 날 다른 동료에게 주었다. 해 질 무렵 축을 다 갈고 손을 씻은 뒤 그는 사무실 창 너머로 언덕을 한 번 보았다. 정비 구역 뒷길은 부두를 등지고 언덕으로 올라갔고, 일곱 번째는 이 년 동안 정비를 마친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나 그 길로 걸어갔다.

화요일과 수요일은 다른 주의 화요일, 수요일과 다르지 않았다. 밤이 되면 칼은 보일러실 안쪽의 간이침대에 누웠고, 발목이 침대 끝 쇠테에 닿으면 왼쪽 무릎을 접었다. 처음 몇 달은 공구함을 끌어다 발을 받쳤으나, 밤에 공구함이 필요한 일이 잦아지자 그만두고 무릎을 접는 쪽으로 정했다. 보일러의 숨소리 너머로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벽을 타고 들어왔다. 그는 그 소리를 몇 번 세다가 잠들었고, 새벽에 한 번 깨어 무릎을 펴려다가 쇠테에 발목을 부딪치고 다시 접었다. 세 번의 겨울 동안 그 일은 너무 자주 있어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II · 감시소

목요일 정오에 칼은 부두 감시소의 철계단을 올랐다. 정비 날 밤에 기체가 정비 구역 밖에 있게 되면 그 사실을 감시소 장부에 올려 두는 것이 규정이었고, 이 년 동안 그 규정을 쓴 것은 지난겨울 정전 밤 하루뿐이었다.지난겨울 정전 뒤 이틀과 한파 밤 하루뿐이었다.지난겨울 정전 밤 하루뿐이었다. 감시소는 부두 한가운데 쇠기둥 넷 위에 얹힌 판잣집이었다. 창이 사방으로 나 있어서 종탑 하역기부터 부두 끝 창고까지가 한눈에 들어왔고, 책상 위에는 손때 묻은 장부 세 권이 펼쳐져 있었다.

당직“오르벡 정비공이 대낮에 여기를 다 오시고. 하역기는 아침부터 멀쩡하오.” 책상 앞의 당직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그는 칼이 하역기 일로 밤에 전화를 걸 때마다 수화기를 드는 사람이었고, 오늘도 밤 당직이라 낮잠을 자러 왔다가 장부를 뒤적이는 중이라고 했다.

칼“기체 하나가 오늘 밤 정비 구역 밖에서 잔다. 일곱 번째, 야간 위치 보육 구역 환기실, 담당 구역 관리자, 사유 등록 이 년 정기 점검. 장부에 올려라.”

당직“그 졸린 깡통 말이오? 그놈 밤 자리를 장부에 올리는 건 지난겨울 이후 처음이구려.” 당직은 펜에 잉크를 찍어 기체 배치 장부의 빈칸에 칼이 부른 대로 적고, 줄 끝에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열두 시 칠 분이라고 덧붙였다.

당직“당신 목소리는 낮보다 밤에 더 잘 알아듣소. 다른 정비공들은 하역기가 서도 아침까지 기다리오.”

칼“아침까지 기다리면 아침에 할 일이 두 배가 된다. 하역기는 선 시각에 알아야 선 이유를 찾기가 쉽다. 시각이 흐려지면 이유도 같이 흐려진다.”

당직“그래서 내 장부엔 당신 이름이 이유보다 많이 적혀 있소.”

옆에 펼쳐진 다른 장부는 하역기 가동 기록이었다. 하역기가 서고 다시 돈 시각이 분 단위로 적혀 있었고, 그 옆에 이유 칸이 있었다. 이유 칸은 절반쯤 비어 있었고, 나머지에는 당직의 둥근 글씨로 쇠사슬 꼬임, 돌풍, 정박 지연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당직“위에서는 이유 칸을 다 채우라고 성화요. 빈칸이 많으면 감시소가 일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나.” 당직이 그 장부를 칼 쪽으로 돌려 놓았다.

칼은 장부 위로 손을 뻗어 이유 칸의 빈자리들을 검지로 위에서 아래까지 한 번 쓸었다. 둥근 글씨가 적힌 칸에서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고, 손등의 검은 줄만 빈칸 위를 지나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직은 칼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장부를 도로 제 쪽으로 돌려 놓았다.

칼은 창가로 가서 부두를 내려다보았다. 기체 수십 기가 줄을 지어 짐을 나르고 있었고, 종탑 하역기의 쇠사슬이 정오의 햇빛 속에서 천천히 감겼다가 풀렸다. 기체들의 걸음은 저마다 박자가 조금씩 달랐으나 다들 제 박자로는 고르게 걸었다. 그 가운데 반 박자 늦은 걸음은 하나도 없었다.

당직“오늘 밤엔 남쪽 배가 두 척 들어오오. 새벽 다섯 시까지 하역이 잡혀 있어서 나도 밤새 이 장부 앞에 앉아 있어야 하오. 깡통들은 밤을 새워도 불평이 없으니 부럽지. 이웃들은 품삯이 밀리면 사흘씩 일을 놓는데, 저것들은 이십 년 동안 한 번을 안 그랬으니 말이오.”

칼“사람은 배가 고프면 일을 놓는다. 기계는 배가 고프지 않다. 기계가 일을 놓으면 그건 고장이거나 명령이다.”

당직“그럼 고장 쪽은 정비공이 맡고 명령 쪽은 위에서 맡으면 되겠구려.” 당직은 웃고 나서 연락처 장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당신은 오늘 밤 어디 있소? 하역기가 서면 늘 하던 대로 정비 구역으로 걸면 되겠지?”

칼“그렇다. 보일러실이다. 이 년 동안 그 번호가 바뀐 적은 없다.”

칼은 철계단을 내려오며 부두의 쇠사슬 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정오의 그 소리는 밤의 소리보다 컸지만 덜 또렷했다. 낮에는 사람 소리와 바퀴 소리가 섞여 쇠사슬이 그 사이에 묻혔고, 밤이 되어 다른 소리가 빠져야 쇠사슬만 남는다는 것을 그는 아홉 살 때 부두 셋방에서 처음 알았다.

III · 닫고 열기

목요일 오후 네 시에 일곱 번째가 정비 구역 문으로 들어왔다. 이 년 동안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 시각이었다. 함석지붕의 채광창으로 늦은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정비대 옆의 쇠 받침을 데우고 있었다. 기체가 정비대 위에 등을 대고 눕자 오른팔 관절에서 새는 김이 그 빛 속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칼은 공구 수레를 끌어와 정비대 옆에 세웠다. 수레의 맨 윗서랍에는 이 기체에만 쓰는 공구가 따로 들어 있었다.

칼“지난주 꼬리표.” 칼이 손을 내밀자 일곱 번째가 누운 채 왼손을 조금 들어 손목 고리에 매인 마분지 꼬리표를 보였다. 칼은 철사를 두 번 감고 반매듭으로 끝내는 사람이었는데, 돌아온 꼬리표는 한 번 감아 납작한 맞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이 년 동안 가끔 있던 일이었다. 그는 매듭을 풀어 꼬리표를 대장 사이에 끼우고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매듭은 정비 항목이 아니었다.

칼“닫는다.” 칼은 가슴판 아래 덮개를 열고 입력판에 오른손 검지를 올렸다. 칠, 영, 구, 삼. 손가락이 외운 숫자는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 네 자리를 누르는 데 드는 시간은 이 년 동안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 마지막 자리를 누르고 반 박자가 지나서야 기체의 눈이 한 번 흐려졌다가 꺼졌다. 그 반 박자는 대장의 결함 목록에 정지 코드 입력 시 반 박자 지연이라는 이름으로 백 번 넘게 올라 있었고, 칼은 그것을 손목시계로 재 본 적도 있었다. 잴 때마다 같았으나, 같다는 것 말고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칼“원인을 모르면 모른다고 적는다. 오늘도 그렇게 하마.” 칼은 가슴판의 볼트를 대각선 순서로 풀며 말했다. 다른 정비공들은 다섯 시 종이 울리자 하나둘 빠져나갔고, 넓은 정비 구역에 남은 사람은 그 혼자였다. 닫힌 기계는 듣지 않는다. 칼은 그것을 알면서도 이 기체를 열 때마다 말을 했고, 사람 앞에서는 짧아진 그의 말이 이 정비대 앞에서만 길어졌다.

칼“관절 패킹은 지난달에 갈았는데 또 샌다. 원인은 모른다. 패킹은 갈아도 다음 달이면 다시 샌다. 교체 신청은 두 번 냈고 두 번 다 서무에서 돌아왔다. 반려 사유는 예산이었지. 가슴판 볼트 셋은 이번에도 내가 맞춰 둔 것과 조임이 다르다. 풀린 게 아니라 다르게 조여져 있어. 원인 불명.” 그는 토크 렌치를 볼트에 걸고 눈금을 읽은 뒤 지난주와 같은 값으로 다시 조였다. “오늘 밤엔 언덕 위로 간다더라. 관리자가 직접 본단다. 내가 이 년 동안 못 고친 걸 거기서 하룻밤에 고치면 나는 이 년을 헛조인 셈이 된다. 그래도 원인이 밝혀지는 쪽이니 나쁘지는 않다.”

칼“눈 밝기 나사는 오늘도 손대지 않는다.” 칼은 기체의 이마 아래, 긁힌 선 일곱 줄 바로 밑에 있는 조절 나사를 손전등으로 한 번 비추어 보기만 했다. “첫해 여름에 반 바퀴 돌려 본 적이 있지. 다른 기체만큼 밝게 해 주면 박자도 따라 빨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네 박자가 사흘 동안 흐트러져서 도로 반 바퀴 돌려 놓았다. 그 반 바퀴가 뭘 건드렸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모르는 나사는 안 돌린다.”

정비가 끝난 것은 여섯 시를 조금 넘겨서였다. 칼은 가슴판을 덮고 볼트를 대각선 순서로 조인 뒤 입력판에 같은 네 자리를 다시 눌렀다. 닫을 때와 열 때 같은 숫자를 쓰는 방식을 견습 시절의 그는 미덥지 않게 여겼으나, 쉰이 가까워진 지금은 그보다 나은 방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닫은 사람이 연다. 기체의 눈은 이번에도 반 박자 늦게 밝아졌다. 기체는 정비대에서 몸을 일으켜 늘 하던 대로 옆의 쇠 받침 위로 올라섰다.

일곱 번째“재가동했습니다. 정비 내역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칼“관절 패킹 확인, 윤활유 교체, 가슴판 볼트 재조임. 새는 건 그대로다.”

일곱 번째“지난달에 간 패킹으로도 샌다면 원인은 패킹이 아닙니다.”

칼“패킹이 아니면 무엇인지를 모른다. 원인 아닌 것 하나를 지웠다고 원인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 년 동안 그렇게 적어 왔고 오늘도 그렇게 적는다.”

일곱 번째“확인했습니다. 오늘 밤 점검에서 정비 이력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칼“대답할 것 없다. 꼬리표 백한 장이 대장에 끼워져 있다. 거기 다 적혀 있으니 네 입으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일곱 번째“백한 장의 둘째 줄은 모두 같은 문장입니다.”

칼“같은 문장이 백한 번이면 그게 이력이다. 한 번 적은 말은 실수일 수 있지만 백한 번 적은 말은 기록이다.”

칼은 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었다. 기체를 닫은 날 손을 씻는 것은 서른 해 된 버릇이었고, 잿물 비누를 아무리 문질러도 손등의 검은 줄은 그대로 남았다. 그는 줄이 남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정비대 쪽으로 돌아섰다.

IV · 측정

일곱 번째는 정비대에서 내려와 있지 않았다. 기체는 받침 위에 선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일러실 쪽을 보고 있었다. 보일러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문틈으로 안쪽 벽에 붙여 놓은 간이침대의 끝과 개어 둔 담요 한 장이 보였다. 대장의 결함 목록에 고개 돌림, 정비공 쪽이라고 적어 둔 바로 그 각도였다.

일곱 번째“정비공 오르벡. 기록할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칼“네 결함이면 내가 적는다. 말해 봐라.”

일곱 번째“제 결함이 아닙니다. 보일러실 간이침대의 길이는 당신의 신장보다 십이 센티 짧습니다. 작업 지장 있음.”

칼은 수건을 든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이 년 동안 그는 이 기체 앞에서 백 번 넘게 작업 지장 없음이라고 적었고, 그 말이 뒤집혀 자기 쪽으로 돌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보일러가 한 번 크게 숨을 쉬었고, 관 속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칼“간이침대는 결함 목록에 올라가는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한테는 작업 지장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일곱 번째“정비 날 밤 저는 이 받침 위에서 아침까지 섭니다. 이 자리에서는 보일러실 안이 보입니다. 이 년 동안 정비 밤은 백한 번이었고, 당신은 그 가운데 아흔여섯 번을 저 침대에서 잤습니다. 아흔여섯 번 모두 왼쪽 무릎을 접고 잤습니다. 침대 끝이 발목에 닿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접고 잔 아침에 당신은 첫 걸음을 늦게 떼고, 첫 볼트를 놓친 아침이 세 번 있었습니다. 작업 지장 있음.”

칼“아흔여섯 번을 셌다는 말이냐.”

일곱 번째“셌습니다.”

칼“그건 정비 항목이 아니다. 누가 세라고 했나.”

일곱 번째“명령은 없었습니다. 받침 위에서 보이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칼“보이는 건 다 세나.”

일곱 번째“다 세지는 않습니다.”

칼은 그 대답 뒤에 무엇이 더 있는지 묻지 않았다. 묻는다면 다음 질문은 무엇을 세고 무엇을 세지 않느냐는 것이 될 텐데, 그것은 고장의 원인을 묻는 질문이 아니어서 그의 대장에는 들어갈 칸이 없었다. 칸이 없는 질문은 정비공이 하는 질문이 아니라고 그는 오래전에 정해 두었다. 대신 그는 칸이 있는 질문을 하나 골랐다.

칼“아흔여섯 번을 보고 오늘에야 말하는 이유는 뭐냐. 첫 번째 밤에 말했으면 아흔다섯 번은 무릎을 펴고 잤을 거다.”

일곱 번째“정비 날 밤에는 당신이 이 구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받침에 서 있고, 두 시에 관절의 김을 봐야 했습니다. 이유가 있는 밤에 침대 길이를 말하면 당신은 무릎을 접고 계속 잤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유가 없는 첫 번째 밤입니다. 이유가 없는 밤에 말하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칼“이유가 없는 밤이라.” 칼은 그 말을 한 번 되받았다가 더 잇지 않았다. 정비 날 밤 두 시에 일어나 관절의 김을 보는 일을 그는 이 년 동안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고, 그 일이 없는 밤에 자기가 어디서 자야 하는지는 따져 본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니 그건 맞는 순서로군.”

칼“재 보자.” 칼은 수레에서 줄자를 꺼내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맡의 쇠기둥에 줄자 끝을 걸어 발치까지 당겨 읽은 다음, 문틀에 등을 붙이고 서서 정수리 높이에 연필로 금을 긋고 그 금까지를 다시 쟀다. 두 숫자의 차이는 기체가 말한 숫자에서 한 눈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줄자를 든 채 침대에 한 번 누워 보았다. 발목이 침대 끝 쇠테에 닿았고, 무릎이 저절로 접혔다. 이 간이침대는 원래 하역기가 밤새 고장 나던 해에 야간 당번들이 번갈아 눈을 붙이던 물건이었고, 당번 제도가 없어진 뒤로는 보일러실 벽에 접힌 채 서 있었다. 세 번의 겨울 전 이 침대를 펴고 처음 누운 밤 그는 길이를 재지 않았다. 발목이 닿으면 무릎을 접었고, 무릎을 접고 자는 것이 버릇이 된 뒤로는 닿는다는 사실도 잊었다.

일곱 번째“누워서 재는 방법은 오차가 큽니다. 줄자의 숫자가 더 정확합니다.”

칼“기계 관절은 세워 놓고 재고, 사람 무릎은 눕혀 놓고 잰다. 줄자는 길이를 알려 주지만 무릎이 언제 접히는지는 누워 봐야 안다.” 칼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칼“합리적이로군.” 칼은 줄자를 감으며 보일러실에서 나왔다. 그 말 뒤에 붙일 농담을 그는 찾지 않았다. “오늘 밤은 네가 받침에 서지 않는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잘 작업상 이유도 없다. 집에서 자마.”

일곱 번째“자택 침대의 길이는 측정하지 못했습니다. 정전 밤에 침실 문은 닫혀 있었고, 당신은 난로 앞 바닥에서 잤습니다. 작업 지장 여부는 미확인입니다.”

칼“그건 내가 잰다. 내 집 침대다.”

일곱 번째“확인했습니다. 정비공의 야간 위치를 자택으로 기록합니다.”

칼“그런 것도 적나.”

일곱 번째“적습니다. 정비 날 밤마다 적었고, 지난 백한 번은 모두 제가 있는 자리와 같은 칸이었습니다. 오늘이 처음으로 다른 칸입니다.”

칼은 대꾸하지 않고 줄자를 수레 서랍에 넣었다. 기계가 정비공의 위치를 적는다는 이야기는 교본 어디에도 없었으나, 교본에 없는 칸을 채우는 버릇이라면 그도 이 년 동안 이 기체의 대장에서 실컷 보아 온 터였다. 그는 그 일을 결함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정비공의 잠자리는 기체의 결함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고, 판단이 선 일은 적지 않는 것이 그의 대장 양식이었다.

V · 꼬리표

꼬리표를 쓰기 전에 남은 일이 하나 있었다. 칼은 정비대 앞 바닥에 분필로 곧은 줄을 하나 긋고, 줄 끝에 선 쇠기둥을 턱으로 가리켰다. 걸음 검사는 이 년 동안 정비 날마다 마지막에 하는 일이었다.

칼“걸어라. 저 기둥까지.”

기체는 분필 줄을 따라 기둥까지 걸었다. 칼은 발이 닿는 자리마다 분필로 작은 표시를 했고, 표시는 열한 개였다. 간격은 고르고 길었으며, 오른팔 관절의 김이 걸음마다 같은 높이에서 흔들렸다.

일곱 번째“열한 걸음입니다.”

칼“세지 마라. 세는 건 내 일이다.”

일곱 번째“제 걸음은 제가 세고 당신은 분필로 셉니다. 둘이 같으면 측정이 맞은 것이고, 다르면 둘 중 하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칼“돌아와라. 이번엔 내가 옆에서 같이 걷는다.”

칼은 왼쪽 무릎을 먼저 내디디며 기체 옆에서 분필 줄을 따라 걸었다. 이번에는 표시가 열넷이었다. 같은 길이를 걷는데 걸음이 셋 늘었고, 늘어난 걸음만큼 간격은 짧아져 있었다.

일곱 번째“열네 걸음입니다. 분필 표시와 같습니다.”

칼은 분필 자국 사이를 뼘으로 재고 대장의 보행 항목에 적었다. 단독 보행 정상, 동행 시 보폭 감소, 원인 불명. 이 줄도 이 년 동안 여러 번 적은 줄이었다. 지난겨울 눈길에서 고장이냐고 물었을 때 측정 중이라는 대답을 들은 뒤로 그는 이 항목을 묻지 않고 적기만 했다.

일곱 번째“그 줄은 결함 목록에 들어갑니까.”

칼“정상 범위를 벗어나면 들어간다. 범위는 교본이 정한다.”

일곱 번째“교본의 보행 범위에는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칼“그러니 원인 불명이다. 교본에 없는 것을 원인 칸에 적을 수는 없다. 적고 싶으면 교본부터 고쳐야 하는데, 교본은 정비공이 고치는 물건이 아니다.”

걸음 검사를 마친 뒤 칼은 정비대 옆 책상에 대장을 펴고 오늘의 칸을 채웠다. 관절 패킹 확인, 윤활유 교체, 가슴판 볼트 재조임, 보행 검사.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금일 야간 정비 장소 변경, 보육 구역 환기실, 담당 구역 관리자, 사유 등록 이 년 정기 점검. 책상 한쪽의 단말 화면에는 이 기체의 등록 정보가 떠 있었고, 칼은 이 년 동안 그래 왔듯 그 화면에 반쯤 등을 돌린 채 종이 대장만 보았다. 종이에 적힌 것은 손으로 고칠 수 있었고, 화면에 뜬 것은 그가 고치는 물건이 아니었다.

해가 언덕 너머로 기울 무렵 칼은 새 꼬리표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마분지에 철사 구멍이 하나 뚫려 있고, 앞면에는 날짜와 기체 이름 아래 빈 줄이 둘, 뒷면에는 인계라는 칸이 하나 인쇄되어 있었다. 정비를 마친 기체가 누구의 손을 거쳐 정비 구역을 나섰는지 적는 칸이었고, 기체가 꼬리표를 달고 걷는 동안에는 그 칸의 이름이 기체를 책임졌다. 칼은 언제나 뒷면부터 채웠다. 오르벡. 이 년 동안 그 칸에 다른 이름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칼“내일 아침 꼬리표는 누가 보냐. 정비 다음 날 아침이면 네가 이 길로 걸어 나가기 전에 내가 한 번 더 보던 거다.”

일곱 번째“오늘 밤 정비 담당자가 봅니다. 점검이 끝나면 꼬리표는 담당자의 매듭으로 다시 묶여 돌아옵니다.”

칼“매듭은 정비 항목이 아니다. 둘째 줄만 그대로 돌아오면 된다.”

일곱 번째는 정비대에서 내려와 문 앞에 서 있었다. 열린 문틀이 기체의 어깨를 테두리처럼 둘러쌌고, 그 너머로 언덕길과 언덕 위 건물의 지붕이 저녁 빛 속에 납작하게 겹쳐 보였다. 기체의 그림자는 문턱을 넘어 분필 자국들이 남은 바닥까지 길게 들어와 있었다.

일곱 번째“꼬리표를 받겠습니다. 보육 구역 환기실까지 이십육 분입니다. 일곱 시 정각에 도착하려면 지금 나서야 합니다.”

칼“앞면이 아직이다. 기다려라. 이 분 늦는다고 일정표가 찢어지지는 않는다.”

일곱 번째“일정표의 시각은 담당자가 정한 것입니다. 이 분은 제가 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습니다.”

칼“그럼 일 분 안에 적으마.”

칼은 펜 뚜껑을 이로 물어 뺐다. 앞면 첫 줄에는 늘 하던 대로 관절 패킹 확인, 윤활유 교체, 가슴판 볼트 재조임을 적었다. 둘째 줄은 원인을 적는 줄이었고, 이 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줄이라 생각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스물넷의 밤바다에서 떨리는 손으로 입력판을 누르지 못하고 돌아온 뒤로 그는 손이 떨리는 날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고, 오늘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늙은 기관장의 어두운 한쪽 귀가 누군가 원인 칸을 지어 적은 기체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사흘 밤 문 너머로 들은 뒤로, 그는 이 줄에 아는 척하는 말을 한 번도 적지 않았다.말에는 이유를 붙이라고 문 너머에서 배운 스물넷의 밤 이후로, 그는 이 줄에 이유가 붙지 않은 말을 한 번도 적지 않았다. 펜 끝이 그 줄의 첫 칸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 문밖에서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고, 기체는 꼬리표를 받으려고 왼손을 반쯤 내민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꼬리표

VI · 두 줄

칼은 둘째 줄을 채웠다.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이 년 동안 백 번 넘게 쓴 글자는 손이 먼저 알아서, 획의 굵기까지 지난주의 것과 같았다. 그는 꼬리표를 기체의 왼쪽 손목 고리에 대고 철사를 두 번 감은 뒤 반매듭으로 끝냈다. 매듭을 한 번 당겨 보고, 마분지가 고리 바깥쪽으로 반듯하게 돌아가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일곱 번째“확인했습니다. 지난 백한 장과 같은 문장입니다. 뒷면의 인계 칸도 마저 확인하겠습니다.”

칼“오르벡. 늘 그 이름이다.” 칼은 기체의 손목에 매인 꼬리표를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여 주었다.

일곱 번째“늘 그 이름이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다음 정비는 다음 주 목요일 오후 네 시입니다.”

칼“일정표에 그렇게 찍혀 나올 거다. 늦지 마라.”

일곱 번째“이 년 동안 늦은 적이 없습니다.”

칼“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일정표대로 오는 기계가 정비공한테는 제일 편하다. 같은 기계니까 같은 문장이다. 다음 주에 다른 문장을 쓰게 되면 그건 네가 고장이 났거나 내가 고장이 났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일곱 번째“둘 중 하나라면 어느 쪽을 먼저 점검하시겠습니까.”

칼“너다. 나를 점검해 줄 정비공은 이 구역에 없다.”

일곱 번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기체는 꼬리표가 매인 왼손을 내리고 문턱을 넘었고, 언덕길로 접어들기 전에 한 번 멈추어 고개를 정비 구역 쪽으로 돌렸다. 고개 돌림, 정비공 쪽. 칼은 그것을 보았으나 등을 돌려 공구 수레의 서랍을 닫았다. 이 년 동안 그는 꼬리표를 매고 나면 기체가 길모퉁이를 도는 것을 지켜보지 않았고, 오늘도 그 차례를 바꾸지 않았다.

칼은 책상으로 돌아가 대장의 오늘 칸 맨 아래, 기체의 야간 위치를 적은 줄 밑에 한 줄을 더 보탰다. 정비공 야간 위치, 자택. 정비공이 자기 위치를 기체의 대장에 적을 이유는 양식 어디에도 없었으나, 기체 쪽에서 그것을 적는다고 들은 뒤로는 이쪽 대장에만 빈칸이 남는 것이 맞지 않아 보였다.

공구는 쓴 순서의 거꾸로 서랍에 들어갔다. 토크 렌치가 맨 먼저, 입력판 덮개를 여는 납작한 열쇠가 맨 나중이었다. 그는 정비대의 쇠 받침을 기름걸레로 한 번 훔치고, 바닥에 남은 분필 자국 스물다섯 개를 장화 바닥으로 문질러 지웠다. 보일러실에 들어가 간이침대의 담요를 개어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두었다. 침대를 접어 벽에 세울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는데, 내일 밤에는 다시 그 위에서 잘 터였다. 정비대 위의 작업등을 끄자 쇠 받침이 어둠 속에 비어 있었고, 받침 위가 빈 채로 맞는 목요일 밤은 이 년 만에 처음이었다.

동료“오르벡, 아직 있었소? 문 잠그러 왔는데.” 아침의 그 동료가 열쇠 꾸러미를 흔들며 사무실 쪽에서 걸어 나왔다. 두고 간 도시락 통을 찾으러 왔다가 정비대 위의 등이 켜진 것을 본 모양이었다. “깡통은 언덕으로 갔소? 그럼 당신은 어디서 자오.”

칼“집이다. 간이침대가 십이 센티 짧다더라.”

동료“누가 그럽디까?”

칼“기계가 그러더군. 재 봤더니 맞았다.”

동료“기계가 정비공 잠자리를 재다니, 그 관리자가 뭘 가르쳐 놨나 보구려. 보육 구역 사람이 왜 하필 당신을 찍어서 그 깡통을 맡겼는지 이 구역 사람들은 아직도 궁금해하오.”

칼“못 고치는 걸 맡기려면 못 고쳤다고 적는 사람한테 맡기는 게 낫다. 다른 이유는 모른다. 모르는 건 궁금해하지 않는다.”

동료“당신은 그게 늘 편하겠소. 아무튼 세 해를 거기서 자 놓고 이제야 재 봤단 말이오. 그 집은 겨울 내내 비워 뒀으니 수도가 얼었을지도 모르겠구려. 물이 안 나오면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여기 수돗가에서 씻으시오.”

칼“얼었으면 녹이면 된다. 정비공이 제 집 수도가 얼어서 정비 구역으로 세수하러 오면 이 구역의 웃음거리가 하나 늘겠지.”

동료“그런 말이 다 나오는 걸 보니 간이침대가 짧긴 짧았나 보오. 집에 먹을 건 있소? 모퉁이 가게에 들러 감자라도 몇 알 사 가시오.”

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외투를 걸쳤다. 회색 외투는 어깨가 그의 몸보다 조금 컸고, 스물세 해 전 배에서 내리던 날 늙은 기관장이 벗어 준 그대로였다. 그는 동료가 문을 잠그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정비 구역을 나섰고, 갈림길에서 동료는 부두 쪽으로, 칼은 집이 있는 비탈 쪽으로 걸었다. 저녁 바람에 부두의 쇠사슬 소리가 실려 와 등 뒤에서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

VII · 현관 등

모퉁이 가게에서 칼은 감자 넷과 양파 하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 덩이와 둥근 빵 하나를 샀다. 가게 주인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언가 물으려다가 거스름돈을 세는 쪽을 골랐다. 집은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비탈 중턱에 있었다. 현관 계단은 세 칸이었고, 칼은 왼쪽 무릎을 먼저 올리며 그것을 올랐다. 열쇠는 늘 넣고 다니는 외투 안주머니에 있었다.

집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차가웠다. 수도는 얼지 않았고, 꼭지를 틀자 녹물이 잠깐 나오다가 맑아졌다. 칼은 난로에 불을 붙이고 노라가 쓰던 큰 냄비에 물을 받았다. 감자와 양파를 썰고 돼지고기를 깍둑 모양으로 잘라 넣는 동안 부엌에는 그가 내는 소리밖에 없었고,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 소리마저 냄비 뚜껑 아래로 들어갔다. 소금은 찬장 둘째 칸의 유리병에 있었는데, 병 바닥에 굳은 소금을 칼등으로 긁어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물이 끓는 동안 그는 세 번의 겨울 동안 열지 않았던 침실 문을 열었다. 매트리스 위에는 먼지를 막으려고 덮어 둔 낡은 천 한 장뿐이었고, 홑이불과 담요는 발치의 궤짝에 들어 있었다. 궤짝을 열자 좀약 냄새가 올라왔다. 칼은 홑이불을 두 번 털어 매트리스에 펴고 네 귀퉁이를 접어 넣은 다음 담요를 그 위에 덮었다. 노라가 하던 대로 귀퉁이를 세모로 접으려다가 두 번 실패했고, 세 번째에는 손으로 꾹 눌러 넣는 것으로 끝냈다.

부엌 벽의 괘종시계는 바늘이 멈춘 채였다. 세 번의 겨울 동안 아무도 태엽을 감지 않았고, 멈춘 시각은 이제 어느 날의 어느 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칼은 시계 문을 열고 태엽 열쇠를 찾아 쥔 다음 침실 창 옆 벽에 걸린 유선 전화로 갔다.

칼은 수화기를 들고 감시소 번호를 돌렸다. “감시소, 당직 바꿔라.”

당직“오르벡 정비공이오? 보일러실 번호가 아니라 집 번호로 걸려 와서 처음엔 누군가 했소.”

칼“오늘 밤은 집이다. 하역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걸어라. 정비 구역 번호로 걸어 봐야 보일러만 받는다. 그리고 지금 몇 시냐.”

당직“아홉 시 십이 분이오. 감시소 시계는 하역기 장부에 맞춰 돌리니 틀릴 리가 없소. 장부의 연락처 칸은 오늘 밤 번호로 고쳐 두겠는데, 정비 구역 번호는 아예 지워 버릴까요?”

칼“아니다. 오늘 하루다.”

당직“그럼 이 번호를 장부 맨 위에 올려 두리까, 정비 구역 번호 밑에 적어 두리까?”

칼“밑에 적어라. 위는 정비 구역이고, 이 년 동안 그 순서였다.”

당직“순서는 당신이 정하시오. 하루라도 고쳐 적는 게 장부지요. 낮에 말한 남쪽 배 두 척이 방금 들어왔으니, 새벽 다섯 시까지 쇠사슬 소리가 좀 시끄러울 거요.”

칼“괜찮다. 부두 소리에는 아홉 살 때부터 이골이 났다.”

당직“그 졸린 깡통은 오늘 밤 어디 두었소? 정비 날 밤이면 당신이 거기 붙어 있어서 전화를 받던 거 아니오.”

칼“오늘은 등록한 쪽에서 점검한다. 내 일정이 아니다.”

당직“당신 일정이 아닌 밤도 있구려. 그럼 오늘은 편히 주무시오.”

칼은 수화기를 걸고 부엌으로 돌아가 시계 바늘을 아홉 시 십삼 분에 맞추었다. 태엽을 감자 진자가 한 번 흔들렸다가 멈추었고,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밀어 주자 그때부터 같은 박자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시계 문을 닫고 수프를 한 그릇 떠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의자가 둘 있었고, 그는 늘 앉던 문 쪽 의자에 앉아 빵을 뜯어 수프에 적셔 먹었다. 냄비는 한 사람 몫보다 컸고, 반 넘게 남은 수프를 그는 냄비째 난로 위에 올려 두었다. 아침에 데우면 될 일이었다.

그릇을 씻어 엎어 놓은 뒤 그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벗었다. 문 위 처마 밑의 현관 등은 유리갓에 먼지가 앉고 안쪽에 마른 나방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칼은 부엌 의자를 하나 끌고 나가 그 위에 왼쪽 무릎부터 올라섰다. 유리갓을 돌려 빼서 나방을 털고 젖은 행주로 닦은 다음, 전구를 빼 불빛에 비추어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았는지 보았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구를 소켓 끝까지 돌려 넣고 유리갓을 다시 씌운 뒤 의자를 부엌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손등의 검은 줄 위에 먼지가 한 겹 더 묻었다.

현관 등의 스위치는 문틀 안쪽, 칼의 가슴께 높이에 있었다. 노라의 손이 닿기 좋은 높이를 재어 그가 문틀 안쪽으로 옮겨 단 스위치였고, 노라는 그가 야간 근무를 나가는 밤마다 그것을 올려 두었다. 세 번의 겨울 동안 그 스위치는 내려진 채였다. 오늘 밤 집에 있는 사람은 칼이었다. 칼은 스위치를 올렸다.

칼은 문에 붙은 작은 유리창으로 노란 불빛이 계단 세 칸을 다 덮는지 한 번 내다보았다. 외투는 문 옆 못에 걸었고, 장화는 계단 쪽으로 코를 두게 돌려 놓았다. 침실로 가는 길에 그는 난로 옆 의자 앞을 지났다. 의자 위에는 작은 외투가 개켜져 있었고, 두 번 접어 올린 소매는 지난겨울 정전 밤에 그가 접은 그대로였다. 장례 다음 날 밤 보일러 뒤로 짐을 옮겨 간 뒤로 그는 이 의자 앞을 공구를 가지러 들를 때만 지났고, 그때마다 외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장례 다음 날 밤 그가 들었다가 내려놓은 의자는 세 번의 겨울 동안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늘도 그는 의자를 치우지 않았다.의자 옆에 바느질 바구니가 놓여 있던 자리는 장례 다음 날 밤 그가 언덕 위 문지기 방에 바구니를 맡기고 온 뒤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서 창까지는 여섯 걸음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부두를 내려다보았고, 수은등이 부두 끝까지 켜져 있는 것과 그 아래에서 기체들이 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창의 걸쇠를 걸고 커튼은 반만 쳤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운 채로 부두가 보이는 폭이었다.

그는 왼쪽 무릎을 먼저 침대에 올리고, 무릎이 체중을 받아 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몸을 눕혔다. 집의 침대는 그의 키보다 길었고, 그는 무릎을 펴고 누웠다. 창밖에서는 부두의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어왔고, 그 밑으로 벽 너머 환기관의 낮은 울림이 깔렸다. 그는 아홉 살 때 부두 셋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쇠사슬이 감기는 횟수를 셌다. 수가 너무 커지면 칠, 영, 구, 삼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그것은 열한 살 밤 침대 틀에 못으로 그 숫자를 새긴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그 번호판을 단 기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열한 살 때 다시 물가로 내려가 본 그날부터 셈 사이에 끼어드는 버릇이 되었다.열한 살 때 늙은 교관에게 등록자가 되는 법을 묻고 돌아온 밤에도 그는 의무실 침대에서 이 소리를 셌다.

물에 잠긴 집에서 문을 받치고 선 기계를 닫고 내려온 뒤로 그는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기계는 닫지 않았고, 오늘 저녁에도 자기가 닫은 기계를 자기 손으로 열었다.물에 잠긴 해안의 그 집 문은 지금도 누군가 받치고 서 있을지 몰랐으나, 그는 배에서 내린 뒤로 그 해안에 다시 가 본 적이 없었다.굴뚝의 흰 글씨를 읽어 주자 기계가 일 년 동안 받치고 있던 문에서 손을 떼던 오후를 그는 그 집의 녹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했다. 아홉 살 때부터 그의 몸은 소리가 난다고 깨는 법이 없었고, 늘 나던 소리가 빠질 때에만 눈을 떴다. 셈이 삼백을 넘어갈 무렵 그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고, 자정을 조금 넘겨 잠들었다. 그가 잠든 뒤에도 현관 등은 계단 세 칸을 비추었고, 부두의 쇠사슬은 네 시간 동안 같은 박자로 돌았다.

VI · 언덕 아래

칼은 둘째 줄을 비워 둔 채 펜을 외투 주머니에 꽂고 꼬리표를 쥐고 문을 나섰다. 기체가 반 박자 늦게 그 뒤를 따랐다. 정비 구역 뒷길은 부두를 등지고 언덕으로 올라갔고, 해가 진 뒤라 길 위의 웅덩이에는 하늘의 마지막 빛만 남아 있었다. 이 년 동안 칼은 이 길을 기체와 함께 걸은 적이 없었다. 정비 다음 날 아침 기체는 혼자 이 길로 갔고, 칼은 그 뒷모습을 보는 대신 다음 기체의 덮개를 열었다.

일곱 번째“동행은 일정에 없습니다. 꼬리표는 문 앞에서 받는 것이 순서입니다.”

칼“앞면을 아직 다 못 적어서 걸으면서 적는다. 너는 네 일정대로 가고, 나는 언덕 아래까지만 간다. 거기서부터는 내 일이 아니다.”

걷기 시작하고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칼은 기체의 보폭이 줄어든 것을 알았다. 조금 전 정비대 앞 분필 줄 위에서 잰 것과 같은 길이였다. 그는 묻지 않았다. 왼쪽 무릎이 그 보폭에서 덜 쑤신다는 것을 그는 지난겨울 눈길 이후로 알고 있었고,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묻는 것은 정비공의 방식이 아니었다.

일곱 번째“이 길은 정비 구역 문에서 갈림길까지 칠백사십 걸음입니다. 웅덩이가 넷 있고, 그중 둘은 비가 그치고 사흘이 지나야 마릅니다.”

칼“그것도 매주 셌나.”

일곱 번째“정비 다음 날 아침마다 걸었습니다. 같은 길을 백한 번 걸으면 세지 않아도 숫자가 남습니다.”

길 오른쪽으로 부두가 내려다보였다. 수은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종탑 하역기의 긴 팔이 저녁 하늘에 검게 걸려 있었다.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비탈을 타고 올라왔다. 칼은 걸으면서 그 소리를 몇 번 세었고, 기체는 그가 세는 동안 보폭을 바꾸지 않았다.

칼“이 길은 안다. 아내가 수선감을 받으러 다니던 길이다. 저녁마다 이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날 단 단추 수를 셌다더군. 셈이 맞는 날은 저녁상에 반찬이 하나 늘었다.” 칼이 앞을 본 채 말했다. 사람 앞에서는 꺼내지 않는 이야기를 그는 지난겨울부터 이 기체 앞에서만 가끔 꺼냈다.

일곱 번째“그 이름은 정전 밤에 당신이 말했고, 그 뒤로 제 기록에 있습니다. 노라입니다.”

칼은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 위의 꼬리표를 한 번 뒤집었다. 뒷면의 인계 칸에 적힌 자기 성이 저녁 빛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열한 살 장마 밤 물속에서 그를 안아 올린 기계는 어머니의 이름을 듣고 그 이름은 목록에 없다고 했고, 그 뒤로 그는 기계의 목록에 누구의 이름이 있고 없는지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언덕 아래 갈림길에 닿았을 때 하늘은 거의 다 어두워져 있었다. 왼쪽 길은 칼의 집이 있는 비탈로 내려갔고, 오른쪽 길은 돌계단이 되어 언덕 위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 사 층 건물이 서 있었다. 아래 두 층의 창마다 불이 켜져 있었고, 불빛 속으로 작은 그림자들이 지나갔다가 다시 지나갔다.

일곱 번째“일곱 시 반에 아래층 창이 꺼지고, 아홉 시에 위층 창이 꺼집니다. 환기실은 지하에 있어서 창이 없습니다.”

칼“그것도 셌나.”

일곱 번째“환기 기계는 창이 꺼지는 시각에 맞추어 바람을 바꿉니다. 세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칼“환기실은 지하라 했지. 거기는 관절이 얼 만큼 차가운 데냐.”

일곱 번째“보일러실보다 이 도 낮고, 정전 밤의 당신 부엌보다는 십일 도 높습니다. 관절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칼“지장 없으면 됐다. 수선실은 어느 창이냐.”

일곱 번째“삼 층 동쪽 끝입니다. 수선실은 낮에만 쓰는 방이라 지금은 불이 꺼져 있습니다.”

칼은 삼 층 동쪽 끝의 어두운 창을 한 번 찾아 보고 고개를 내렸다. 그 창 아래에서 누가 단추 수를 세며 언덕을 내려왔는지는 기체의 목록에도 그의 대장에도 적혀 있지 않았고, 적혀 있지 않은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정비공의 버릇이 아니었다. 그는 아래 두 층의 밝은 창들도 오래 보지 않았다.

칼은 갈림길의 돌기둥에 꼬리표를 대고 둘째 줄을 채웠다.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 그러고 나서 그 아래 남은 여백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야간 배치 보육 구역, 정비공 미동행. 정비공이 따라가지 않는 곳으로 기체가 밤을 보내러 갈 때는 그렇게 적어 두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이 년 동안 그는 그 줄을 쓰지 않았다. 배치표는 정비공이 보는 칸이 아니었고, 기체가 어디서 밤을 보내는지 모르는 정비공은 그 줄을 채울 수 없었다. 오늘은 반으로 접힌 쪽지 한 장이 그 장소를 알려 주었다.

칼“여기서부터는 네 일정이다.” 칼은 기체의 왼쪽 손목 고리에 철사를 두 번 감아 반매듭으로 꼬리표를 매었다.

일곱 번째“확인했습니다. 정비공 미동행.” 기체는 꼬리표가 매인 왼손을 내리고 돌계단 첫 칸에 발을 올렸다가 거기서 한 번 멈추었다. “돌아가시는 길은 왼쪽입니다. 비탈의 가로등이 둘 꺼져 있고, 세 번째 가로등 아래의 웅덩이가 깊습니다.”

칼“이십 년을 다닌 길이다. 웅덩이는 나도 안다.”

일곱 번째“알고 계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기체는 계단을 올라갔다. 보폭은 언덕 아래에서보다 길었고, 오른팔 관절의 김이 계단 위쪽 어둠 속에서 한동안 희게 보이다가 사라졌다. 칼은 김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갈림길에 서 있다가 왼쪽 길로 돌아섰다.

VII · 현관 등

비탈의 가로등은 기체가 말한 대로 둘이 꺼져 있었다. 칼은 세 번째 가로등 아래 웅덩이를 왼쪽으로 돌아서 지났다. 모퉁이 가게는 덧문을 반쯤 내리고 있었고, 그는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 감자 넷과 양파 하나, 절인 돼지고기 한 덩이와 둥근 빵 하나를 샀다. 돈을 받던 가게 주인이 덧문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가게 주인“정비공 양반, 집에 불 때러 가는 길이오? 그 집 굴뚝에서 연기 나는 걸 본 지가 한참 됐소.”

칼“오늘은 땐다. 간이침대가 짧다는 판정이 나왔다.”

가게 주인“누가 그런 판정을 내립디까?”

칼“기계가 내렸다. 줄자로 재 보니 맞더군.”

가게 주인“요즘 깡통들은 별걸 다 재는구려. 그래도 판정이 맞으면 따르는 게 순서지. 빵은 내일 아침까지는 말랑할 거요. 감자는 껍질째 끓여야 덜 풀어지고.”

골목 어귀에 닿았을 때 등 뒤 언덕 위에서 무언가가 한꺼번에 어두워졌다. 칼은 돌아보지 않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반이었고, 기체가 말한 시각이었다. 아래층 창들이 꺼졌다는 것을 그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았다.

골목에 들어서자 집들의 창이 하나씩 보였다. 저녁상을 치우는 집, 아이를 씻기는 집, 누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새어 나오는 집이 있었고, 불이 꺼진 집은 비탈 중턱의 그의 집 하나였다. 옆집 창문이 열리더니 이웃 여자가 행주를 든 채 고개를 내밀었다.

이웃“오르벡 씨 아니에요? 이 시간에 이 골목에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계단에 쌓였던 낙엽은 우리 집 애가 치웠어요. 봄 되면 또 쌓이니 그냥 두라고 해도 그 애가 도무지 듣질 않아서요.”

칼“그 애 자전거 사슬이 늘어져 있더군. 내일 아침에 들고 오라고 하시오. 사슬 마디 하나 빼면 된다.”

이웃“고맙단 소리는 끝까지 안 하시네요. 그래도 그 애는 좋아할 거예요.” 이웃 여자는 웃고 창문을 닫았다.

칼은 현관 계단 세 칸을 왼쪽 무릎부터 올라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웃집 창의 불빛은 계단까지 닿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열쇠 구멍을 찾는 데 손이 세 번 헛나갔다.

집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차가웠다. 성냥은 늘 두던 난로 선반에 없었고, 칼은 찬장 서랍을 두 개 열어 본 뒤에야 노라가 실패와 함께 넣어 두던 셋째 서랍에서 그것을 찾았다. 난로에 불이 붙었으나 연기가 부엌 쪽으로 밀려 나왔다. 연통의 조절판이 녹슬어 반쯤 닫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칼은 공구 상자에서 기름병을 꺼내 축에 몇 방울 떨어뜨린 뒤 손잡이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어 풀었다. 조절판이 끝까지 열리자 연기는 연통으로 빨려 올라갔고, 부엌의 모서리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노라가 쓰던 큰 냄비에 물을 받고, 가게 주인의 말대로 감자를 껍질째 넣었다. 냄비는 한 사람 몫보다 컸다. 한 그릇을 떠서 식탁 끝에 앉아 먹고, 반 넘게 남은 수프는 냄비째 난로 위에 올려 두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 칼은 침실 창 옆 벽에 걸린 유선 전화로 감시소를 불렀다. “감시소, 당직 바꿔라. 오늘 밤 하역기 일은 이 번호로 걸어라.”

당직“오르벡 정비공이오? 집 번호로 거는 건 오랜만이구려. 장부의 연락처 칸을 오늘 밤 번호로 고쳐 두리다.”

칼“오늘 하루다. 내일 아침에는 다시 정비 구역 번호로 돌려 적어라.”

당직“알겠소. 낮에 말한 남쪽 배 두 척이 방금 들어왔으니, 새벽 다섯 시까지 쇠사슬 소리가 좀 시끄러울 거요.”

칼“괜찮다. 부두 소리에는 아홉 살 때부터 이골이 났다. 비탈 가로등이 둘 나갔다. 내일 아침 장부에 올려 두어라. 세 번째 가로등 아래 웅덩이도 같이.”

당직“가로등까지 세고 들어오셨소? 정비공은 집에 가는 길에도 쉬지를 않는구려. 올려 두리다. 그러고 보니 언덕 쪽 환기탑 가동 기록이 방금 일곱 시 반에 한 번 바뀌었는데, 늘 그 시각이긴 해도 정비공이 보기엔 이상 없는 거요?”

칼“이상 없다. 창이 꺼지는 시각에 맞춰 바람을 바꾼다더라.”

당직“누가 그럽디까?”

칼“그 바람을 바꾸는 기계가.”

세 번의 겨울 동안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자, 침대에는 먼지를 막으려고 덮어 둔 낡은 천 한 장뿐이었다. 칼은 발치의 궤짝에서 좀약 냄새가 밴 홑이불과 담요를 꺼내 두 번씩 털고 매트리스 위에 폈다. 그다음에는 공구 상자에서 사슬 마디를 빼는 펀치와 작은 망치를 꺼내 현관 옆 선반에 올려 두었다. 아침에 이웃집 아이가 자전거를 끌고 오면 문을 열자마자 손에 잡혀야 할 물건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벗었다. 문에 붙은 작은 유리창 너머로 골목의 창들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그는 문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노라의 손 높이에 맞추어 옮겨 단 스위치라 그의 손에는 조금 낮았다. 칼은 스위치를 올렸다.

칼은 문에 붙은 작은 유리창으로 노란 불빛이 계단 세 칸을 다 덮는지 한 번 내다보았다. 외투는 문 옆 못에 걸었고, 장화는 계단 쪽으로 코를 두게 돌려 놓았다. 침실로 가는 길에 그는 난로 옆 의자 앞을 지났다. 의자 위에는 작은 외투가 개켜져 있었고, 두 번 접어 올린 소매는 지난겨울 정전 밤에 그가 접은 그대로였다. 장례 다음 날 밤 보일러 뒤로 짐을 옮겨 간 뒤로 그는 이 의자 앞을 공구를 가지러 들를 때만 지났고, 그때마다 외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장례 다음 날 밤 그가 들었다가 내려놓은 의자는 세 번의 겨울 동안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늘도 그는 의자를 치우지 않았다.의자 옆에 바느질 바구니가 놓여 있던 자리는 장례 다음 날 밤 그가 언덕 위 문지기 방에 바구니를 맡기고 온 뒤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서 창까지는 여섯 걸음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부두를 내려다보았고, 수은등이 부두 끝까지 켜져 있는 것과 그 아래에서 기체들이 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창의 걸쇠를 걸고 커튼은 반만 쳤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운 채로 부두가 보이는 폭이었다.

그는 왼쪽 무릎을 먼저 침대에 올리고, 무릎이 체중을 받아 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몸을 눕혔다. 집의 침대는 그의 키보다 길었고, 그는 무릎을 펴고 누웠다. 창밖에서는 부두의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어왔고, 그 밑으로 벽 너머 환기관의 낮은 울림이 깔렸다. 그는 아홉 살 때 부두 셋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쇠사슬이 감기는 횟수를 셌다. 수가 너무 커지면 칠, 영, 구, 삼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그것은 열한 살 밤 침대 틀에 못으로 그 숫자를 새긴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그 번호판을 단 기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열한 살 때 다시 물가로 내려가 본 그날부터 셈 사이에 끼어드는 버릇이 되었다.열한 살 때 늙은 교관에게 등록자가 되는 법을 묻고 돌아온 밤에도 그는 의무실 침대에서 이 소리를 셌다.

물에 잠긴 집에서 문을 받치고 선 기계를 닫고 내려온 뒤로 그는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기계는 닫지 않았고, 오늘 저녁에도 자기가 닫은 기계를 자기 손으로 열었다.물에 잠긴 해안의 그 집 문은 지금도 누군가 받치고 서 있을지 몰랐으나, 그는 배에서 내린 뒤로 그 해안에 다시 가 본 적이 없었다.굴뚝의 흰 글씨를 읽어 주자 기계가 일 년 동안 받치고 있던 문에서 손을 떼던 오후를 그는 그 집의 녹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했다. 아홉 살 때부터 그의 몸은 소리가 난다고 깨는 법이 없었고, 늘 나던 소리가 빠질 때에만 눈을 떴다. 셈이 삼백을 넘어갈 무렵 그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고, 자정을 조금 넘겨 잠들었다. 그가 잠든 뒤에도 현관 등은 계단 세 칸을 비추었고, 부두의 쇠사슬은 네 시간 동안 같은 박자로 돌았다.

VI · 질문

칼은 펜을 내렸다. 꼬리표의 둘째 줄을 빈 채로 둔 채 그는 문 앞에 선 기체를 올려다보았다. 이 년 동안 그는 이 기체에게 수없이 말을 했으나 대부분은 닫힌 기체에게 한 혼잣말이었고, 열린 기체에게 한 말은 정비 내역과 지시였다. 물은 것은 거의 원인뿐이었다. 관절이 왜 새는지, 패킹을 갈아도 왜 다시 새는지, 볼트가 왜 다르게 조여 있는지. 기체는 그때마다 모른다고 하거나 측정 중이라고 했고, 칼은 그 대답을 원인 불명이라는 네 글자로 옮겨 적었다.

칼“하나 묻자. 적기 전에.”

일곱 번째“들을 수 있습니다.”

칼“너는 왜 반 박자 늦냐. 지난겨울에 한 번 물었고 순서가 있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이번이 두 번째 묻는 것이다. 코드를 넣을 때도, 눈을 뜰 때도, 문턱을 넘을 때도 너는 늘 반 박자 늦다. 이 년 동안 나는 그걸 결함 목록 맨 위에 적었다. 교체 신청서는 원인 칸을 비운 채 두 번 냈고, 두 번 다 서무에서 예산 때문에 돌아왔다. 고칠 수 없으면 원인이라도 알아야 적을 말이 생긴다.”

기체의 눈이 한 번 건너뛰었다. 반 박자 늦은 깜박임이 아니라, 깜박여야 할 자리에서 한 번을 통째로 거르는 동작이었다. 칼은 이 년 동안 그런 동작을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을 결함 목록의 어느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일곱 번째“그 질문에는 지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묻는 순서대로 대답하겠습니다.”

칼“다음에 오면이라.” 칼은 그 말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렸다. “정비 날은 내가 가는 날이 아니라 네가 오는 날이다. 말을 틀리게 했다.”

일곱 번째“틀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순서가 있다는 것만 지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칼“순서가 있다면 첫 번째가 뭔지는 말할 수 있겠군.”

일곱 번째“첫 번째를 말하면 순서가 시작됩니다. 저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칼“그럼 나머지라도 묻자. 매주 꼬리표가 다른 매듭으로 돌아오는 건. 가슴판 볼트 셋이 내가 맞춘 것과 다르게 조여 있는 건. 내가 등을 돌리면 네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가 있는 건.” 칼은 결함 목록을 외우듯 하나씩 짚었다. 이 년 동안 대장에 적어 온 순서 그대로였다.

일곱 번째“모두 같은 순서 안에 있습니다. 하나를 따로 꺼내면 나머지의 대답이 틀려집니다.”

칼은 입을 다물었다. 이 년 동안 따로따로 적어 온 결함들이 하나의 순서 안에 있다는 대답은 대장 양식으로는 받아 적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결함 목록은 칸마다 원인을 하나씩 요구했고, 원인 하나에 칸 여러 개가 매달리는 경우를 위한 양식은 없었다. 그는 그 대답을 머릿속의 어느 칸에 넣어야 할지 몰라 일단 빈칸으로 두었다.

칼“보류는 언제 풀리나.”

일곱 번째“순서의 첫 번째가 시작될 때 풀립니다.”

칼“그게 언제냐고 물으면 그것도 보류겠군. 보류가 보류를 낳으면 대장이 모자란다. 그럼 이 줄에는 뭐라고 적나. 원인 불명이라고 적으면 되겠군.”

일곱 번째“불명이 아니라 보류입니다. 둘은 다른 칸입니다.”

칼은 펜을 다시 들었다. 이 년 동안 원인 불명, 작업 지장 없음이 들어가던 자리에 그는 다른 글자를 적었다. 원인: 질문 보류. 글씨가 평소보다 작아서 줄 끝에 빈자리가 남았고, 그는 그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꼬리표를 왼쪽 손목 고리에 대고 철사를 두 번 감아 반매듭으로 끝낸 뒤 그는 매듭을 한 번 당겨 보았다.

일곱 번째“확인했습니다. 원인, 질문 보류.” 기체는 꼬리표가 매인 왼손을 내렸다. “작업 지장 여부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칼“대답을 못 들었는데 지장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아나. 모르는 걸 아는 척 적지는 않는다.”

일곱 번째“그렇습니다.” 기체는 문턱을 넘었다. 언덕길로 접어들기 전에 한 번 멈추어 고개를 정비 구역 쪽으로 돌렸고, 그 고개는 이번에도 반 박자 늦게 다시 앞을 향했다.

기체가 문턱을 넘어간 뒤 칼은 책상으로 돌아가 대장을 다시 폈다. 오늘의 칸 맨 아래, 결함 목록이 이어지는 자리에 그는 줄을 하나 긋고 적었다. 질문 보류, 반 박자 외 세 건, 다음 정비 시 순서대로 답변 예정. 그 줄은 대장 양식 어디에도 해당하는 칸이 없었고, 그는 칸이 없는 줄을 대장에 적은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적고 나서야 알았다. 지우지는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는 것과 대답을 아직 못 들었다고 적는 것은 다른 일이었으나, 둘 다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칼은 대장을 덮고 문틀에 기대어 기체가 언덕 모퉁이를 도는 것을 보았다. 다음 주 목요일 네 시까지 남은 날을 그는 손가락으로 세었고, 셈이 끝나자 정비대로 돌아가 공구 수레의 서랍을 하나씩 닫았다. 서랍은 일곱 칸이었고, 맨 윗칸이 가장 무거웠다. 보일러실 불을 끄기 전에 그는 간이침대의 담요를 개어 머리맡에 올려 두었고, 정비대의 작업등을 끈 뒤에는 바닥에 남은 분필 자국 스물다섯 개를 어둠 속에서 장화 바닥으로 문질렀다.

VII · 현관 등

돌아오는 길에 칼은 모퉁이 가게에 들러 감자 넷과 양파 하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 덩이와 둥근 빵 하나를 계산대에 올렸다. 가게 주인은 감자를 종이 봉지에 담다가 손을 멈추고 칼을 올려다보았다.

가게 주인“감자 넷이면 두 사람 몫인데, 정비공 양반. 오늘은 손님이라도 오시오?”

칼“아니다. 냄비가 크다. 그 냄비는 감자 넷을 넣어야 바닥이 덮인다. 한 번 끓이면 아침까지 간다.”

가게 주인“그럼 빵도 하나 더 가져가시오. 아침까지 가는 수프에 빵이 하나면 모자라오. 이건 값을 안 받겠소. 어제 구운 거라 오늘 못 팔면 버릴 거니까.”

칼은 빵 두 개를 외투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가게를 나왔다. 집은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비탈 중턱에 있었다. 현관 계단 세 칸을 왼쪽 무릎부터 올라가 문을 열자 바깥보다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는 난로에 불을 붙이고 노라가 쓰던 큰 냄비에 물을 받았으며, 감자와 양파와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뒤 뚜껑을 덮었다. 냄비는 한 사람 몫보다 컸다.

부엌 벽에는 세 번의 겨울 전에 걸어 둔 달력이 그해 마지막 장을 편 채 걸려 있었다. 칼은 그것을 못에서 벗겨 내 접은 다음 난로 옆 불쏘시개 바구니에 넣었다. 달력이 걸려 있던 자리만 벽지 색이 조금 더 밝았고, 그 밝은 네모 위에 그는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수프가 끓는 동안 칼은 식탁에 앉아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공책을 꺼냈다. 연필을 찾으려고 식탁 서랍을 열자 노라가 넣어 둔 보육 구역에 낼 서류 묶음이 먼저 보였고, 그는 서류 밑에서 몽당연필을 꺼낸 뒤 서랍을 닫았다. 정비 대장에 옮기기 전에 이것저것을 적어 두는 공책이었고, 그는 새 장을 펴서 맨 위에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번호를 붙여 나갔다. 첫째 줄에는 반 박자, 둘째 줄에는 맞매듭으로 돌아오는 꼬리표, 셋째 줄에는 다르게 조여 있는 가슴판 볼트 셋, 넷째 줄에는 정비공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적었다. 써 놓고 보니 넷 모두 원인을 묻는 질문이었다. 그는 순서를 한 번 바꾸어 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는데, 묻는 순서대로 대답하겠다고 한 쪽은 기체였고 순서를 정하는 쪽은 묻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줄을 적으려다 그는 펜을 멈추었다. 맨 처음 지정 의뢰서에 그의 성을 적어 넣은 반듯한 글씨가 떠올랐고, 그 글씨의 주인이 왜 하필 그의 성을 적었는지도 원인을 묻는 질문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칼은 다섯째 줄을 비워 둔 채 공책을 덮었다.

세 번의 겨울 동안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자, 침대에는 먼지를 막으려고 덮어 둔 낡은 천 한 장뿐이었다. 칼은 발치의 궤짝에서 좀약 냄새가 밴 홑이불과 담요를 꺼내 두 번씩 털고 매트리스 위에 폈다. 귀퉁이를 접어 넣다가 그는 침대의 길이를 손뼘으로 한 번 재 보았다. 침대는 그의 키보다 한 뼘 남짓 길었다. 기체가 미확인이라고 남긴 칸을 그는 손뼘으로 채웠고, 집의 침대까지 줄자로 잴 일은 아니었다.

칼은 침실 창 옆 벽에 걸린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감시소 번호를 돌렸다. “감시소, 당직 바꿔라.”

당직“오르벡 정비공이오? 보일러실 번호가 아니라 집 번호로 걸려 와서 처음엔 누군가 했소.”

칼“오늘 밤은 집이다. 하역기에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걸어라. 정비 구역 번호로 걸어 봐야 보일러만 받는다.”

당직“알겠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묻지 않으리다. 장부의 연락처 칸만 고쳐 두겠소.”

칼“바람이 아니라 측정이다. 간이침대가 십이 센티 짧았다.”

당직“십이 센티를 누가 쟀소?”

칼“기계가 쟀다. 줄자로 확인했고, 누워서도 확인했다. 두 번 확인한 숫자는 장부에 올려도 된다.”

당직“그것참 합리적인 바람이구려. 낮에 말한 남쪽 배 두 척이 방금 들어왔으니, 새벽 다섯 시까지 쇠사슬 소리는 좀 참으시오.”

칼“참을 것 없다. 부두 소리에는 아홉 살 때부터 이골이 났다.”

칼은 수프를 한 그릇 떠서 식탁 끝에 앉아 먹었다. 가게 주인이 덤으로 준 빵은 반으로 갈라 하나만 수프에 적셨고, 나머지 하나는 종이에 싸서 찬장에 넣었다. 반 넘게 남은 수프는 냄비째 난로 위에 올려 두었다. 공책은 다음 주 목요일이라고 적힌 장을 펼친 채 식탁 위에 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첫 줄부터 다시 읽어 볼 생각이었다. 그릇을 씻어 엎어 놓은 뒤 그는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벗었다. 문틀 안쪽, 그의 가슴께 높이에 스위치가 있었다. 노라의 손 높이에 맞추어 그가 옮겨 단 스위치였다. 칼은 스위치를 올렸다.

칼은 문에 붙은 작은 유리창으로 노란 불빛이 계단 세 칸을 다 덮는지 한 번 내다보았다. 외투는 문 옆 못에 걸었고, 장화는 계단 쪽으로 코를 두게 돌려 놓았다. 침실로 가는 길에 그는 난로 옆 의자 앞을 지났다. 의자 위에는 작은 외투가 개켜져 있었고, 두 번 접어 올린 소매는 지난겨울 정전 밤에 그가 접은 그대로였다. 장례 다음 날 밤 보일러 뒤로 짐을 옮겨 간 뒤로 그는 이 의자 앞을 공구를 가지러 들를 때만 지났고, 그때마다 외투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장례 다음 날 밤 그가 들었다가 내려놓은 의자는 세 번의 겨울 동안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늘도 그는 의자를 치우지 않았다.의자 옆에 바느질 바구니가 놓여 있던 자리는 장례 다음 날 밤 그가 언덕 위 문지기 방에 바구니를 맡기고 온 뒤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서 창까지는 여섯 걸음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부두를 내려다보았고, 수은등이 부두 끝까지 켜져 있는 것과 그 아래에서 기체들이 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창의 걸쇠를 걸고 커튼은 반만 쳤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운 채로 부두가 보이는 폭이었다.

그는 왼쪽 무릎을 먼저 침대에 올리고, 무릎이 체중을 받아 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몸을 눕혔다. 집의 침대는 그의 키보다 길었고, 그는 무릎을 펴고 누웠다. 창밖에서는 부두의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들어왔고, 그 밑으로 벽 너머 환기관의 낮은 울림이 깔렸다. 그는 아홉 살 때 부두 셋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쇠사슬이 감기는 횟수를 셌다. 수가 너무 커지면 칠, 영, 구, 삼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그것은 열한 살 밤 침대 틀에 못으로 그 숫자를 새긴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그 번호판을 단 기계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사실은 열한 살 때 다시 물가로 내려가 본 그날부터 셈 사이에 끼어드는 버릇이 되었다.열한 살 때 늙은 교관에게 등록자가 되는 법을 묻고 돌아온 밤에도 그는 의무실 침대에서 이 소리를 셌다.

물에 잠긴 집에서 문을 받치고 선 기계를 닫고 내려온 뒤로 그는 다시 열 사람이 없는 기계는 닫지 않았고, 오늘 저녁에도 자기가 닫은 기계를 자기 손으로 열었다.물에 잠긴 해안의 그 집 문은 지금도 누군가 받치고 서 있을지 몰랐으나, 그는 배에서 내린 뒤로 그 해안에 다시 가 본 적이 없었다.굴뚝의 흰 글씨를 읽어 주자 기계가 일 년 동안 받치고 있던 문에서 손을 떼던 오후를 그는 그 집의 녹 냄새와 함께 지금도 기억했다. 아홉 살 때부터 그의 몸은 소리가 난다고 깨는 법이 없었고, 늘 나던 소리가 빠질 때에만 눈을 떴다. 셈이 삼백을 넘어갈 무렵 그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고, 자정을 조금 넘겨 잠들었다. 그가 잠든 뒤에도 현관 등은 계단 세 칸을 비추었고, 부두의 쇠사슬은 네 시간 동안 같은 박자로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