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부 1장
반품
현관 등 · 아홉 살에서 열한 살까지
I · 손톱
부두 셋방의 밤은 하역기 쇠사슬 소리로 시작해서 그 소리로 끝났다. 아버지는 해가 지면 부두로 나가 밤새 하역기의 쇠사슬에 짐 고리를 걸었고, 쇠사슬이 한 번 감길 때마다 셋방의 창틀이 낮게 떨렸다. 어머니는 낮에 부두 세탁장에서 남의 작업복을 빨았고, 저녁에는 같은 손으로 아들의 손을 씻겼다. 집에 있는 사람은 늘 둘이었고, 셋이 한자리에 앉는 것은 아침 한 끼뿐이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나무 대야에 데운 물을 붓고 잿물 비누를 꺼냈다. 세탁장에서 쓰다 남은 조각들을 뭉쳐 만든 비누라 모서리마다 색이 달랐고, 물에 닿자 코를 찌르는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칼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내밀었다. 아홉 살 아이의 손치고는 컸고, 손톱 밑은 부두 바닥의 기름과 녹으로 까맸다.
어머니“손가락 펴. 오므리면 안 빠진다.”
칼“어제도 했잖아.”
어머니“어제 한 건 어제 묻은 거고, 오늘 묻은 건 오늘 빼야지.” 어머니는 칼의 오른손 검지를 붙잡고 엄지손톱으로 손톱 밑을 긁어낸 다음, 비누를 묻힌 솔로 같은 자리를 문질렀다. 솔은 돼지털이 반쯤 빠져 있어서 닿는 데마다 따가웠다.
칼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손을 놓지 않고 더 천천히 문질렀는데, 천천히 하는 쪽이 더 오래 아프다는 것을 그는 일곱 살 무렵에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창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를 하나씩 셌다.
칼“엄마, 방금 감긴 거 들었어? 숨 네 번에 한 번이야. 아빠가 그 사이에 고리를 거는 거지?”
어머니“누가 그러던.”
칼“내가 셌어. 창틀이 떨리면 감긴 거고, 안 떨리면 풀린 거야.”
어머니“쓸데없는 걸 잘도 센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솔을 멈추고 창 쪽을 한 번 보았다. 쇠사슬이 감겼고, 창틀이 떨렸고, 어머니는 다시 솔을 움직였다.
어머니“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어머니가 왼손으로 넘어가며 말했다. “아침 먹고 회사 훈련소에 간다. 거기서 자고, 거기서 먹고, 거기서 일을 배운다.”
칼“언제까지?”
어머니“오래. 종이에 적혀 있으니까 가서 보면 된다.”
칼“아빠도 알아?”
어머니“둘이 정했다. 아빠는 내일 아침 교대가 늦어서 너 가는 건 못 본다.”
칼“그럼 아빠한테는 뭐라고 해?”
어머니“아무 말 안 해도 된다. 그 사람은 말 안 해도 안다.”
칼“왜 가야 하는데?”
어머니“밥이 나오니까.”
칼“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칼은 대야 밖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손이 먼저 손목을 잡았다.
어머니는 대답하는 대신 솔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문질렀다. 세탁장에서 하루 종일 남의 옷을 비빈 손바닥은 솔보다 거칠었고, 그 손이 손톱 밑을 한 번 지날 때마다 대야의 물이 조금씩 흐려졌다. 물은 처음에 뜨거웠다가 미지근해졌고, 나중에는 손등에 소름이 돋을 만큼 식었다. 어머니는 물이 다 식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됐다. 등잔 밑에 대 봐라.” 칼이 열 손가락을 펴서 불빛에 비추자 손톱 밑이 하얬다. 어머니는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칼“아빠 손톱은 왜 안 빼 줘?”
어머니“아빠 건 안 빠진다. 너무 오래 묻어서 손톱 밑이 아니라 살에 들었어.”
칼“나도 그렇게 돼?”
어머니“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빼는 거다.”
칼“내일 또 까매질 텐데.”
어머니“그럼 거기 사람이 빼 주겠지.”
칼“안 빼 주면?”
어머니“그럼 네가 빼라. 엄지손톱 끝으로 밀어내고, 비누 묻혀 비비고, 물이 식을 때까지 놓지 말고.” 어머니는 대야를 들고 일어나 문밖 하수구에 물을 버렸다. 문이 열린 사이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등잔 불꽃을 한쪽으로 눕혔고, 쇠사슬 소리가 방 안에서보다 크게 들렸다. 어머니는 문을 닫고 나서 한동안 문고리를 쥔 채 서 있었다.
칼“거기서도 쇠사슬 소리 들려?” 칼이 이불 속에서 물었다.
어머니“바람이 바다 쪽에서 부는 날은 들린다. 그런 날 세라.” 어머니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등잔 쪽으로 돌아왔다.
칼“바람이 안 부는 날은?”
어머니“그런 날은 세지 말고 그냥 자. 안 들려도 아빠는 걸고 있다.”
칼은 손톱을 혀끝으로 만져 보았고, 비누의 쓴맛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다시 쇠사슬 소리를 세기 시작했다. 소리 하나를 셀 때마다 아버지의 손을 하나 세는 셈이었고, 그 손은 숨 네 번의 틈마다 어김없이 다음 고리를 걸었다. 백을 넘게 세었을 때 어머니가 등잔을 껐고, 이백이 되기 전에 그는 잠들었다.
II · 기름 학교
회사 훈련소는 부두 북쪽 끝, 창고 셋을 함석 담으로 이어 붙인 자리에 있었다. 정식 이름은 정문 위 함석판에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기름 학교라고 불렀다. 들어올 때 손이 하얗던 아이도 일주일이면 손톱 밑이 까매진다는 뜻이었고, 그 말을 처음 지은 아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문 옆 창구에서 장부 담당이 칼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머리가 반쯤 빠진 사내였는데, 펜촉을 잉크병에 담글 때마다 혀를 찼다. 그는 어머니가 불러 주는 대로 장부에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아홉이라는 숫자를 붙인 다음, 창구 밖으로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장부 담당“어머니 되시오? 여기 엄지.”
어머니가 엄지에 인주를 묻히는 동안 종이는 창구 턱에 놓여 있었고, 그 높이가 마침 칼의 눈높이였다. 글자를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숫자는 읽을 수 있었다. 맨 위에 십 년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줄에 밥과 잠자리와 작업복이라는 낱말이 나란히 있었다.
칼“이게 뭐야?”
어머니“밥이 나오는 종이다.” 어머니는 엄지를 종이에 누르고 나서 앞치마에 닦았다. 붉은 물은 앞치마에 옮지 않고 엄지의 주름 사이에 남았다.
칼“십 년이면 몇 밤이야?”
장부 담당“세지 마라. 세면 길어진다.” 장부 담당이 종이를 거두어 서랍에 넣었다. “여기 들어오는 놈들은 첫날 다 그걸 묻는다. 대답해 준 적은 없는데, 물어본 놈들은 다 아직 여기 있다.”
어머니는 정문 앞에서 칼의 옷깃을 한 번 바로잡아 주고 돌아섰다. 어머니는 부두 쪽 골목 모퉁이를 돌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칼은 모퉁이가 빈 뒤에도 한참 그쪽을 보았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서 그 모퉁이 너머의 쇠사슬 소리가 여기까지 희미하게 왔다.
마당은 넓었고, 바닥에 깔린 쇠판 사이마다 배수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기둥에는 사람 모양의 기계 하나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키는 어른보다 머리 하나가 컸고, 얼굴판은 여기저기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가슴판의 칠은 다 벗겨져 녹이 꽃처럼 번져 있었다. 눈 자리에는 둥근 유리가 둘 있었는데, 왼쪽 유리에는 금이 가 있었다.
아이“멍텅구리야.” 옆에 선 아이가 말했다. 칼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고, 코 밑이 늘 젖어 있어서 소매로 훔칠 때마다 소매 끝이 반들거렸다. “말 걸어도 못 알아들어. 때려도 안 피해.”
칼“그럼 왜 묶어 놨어?”
아이“도망갈까 봐.”
칼“못 알아듣는다며. 그럼 도망가라는 말도 못 알아듣잖아.”
아이“몰라. 교관이 묶었어.” 아이는 코를 훔치고 자기 이름 대신 별명을 댔다. 다들 자기를 콧물이라고 부른다고 했고, 칼보다 한 해 먼저 들어왔는데 한 해 동안 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은 없었다.
칼“가슴판에는 뭐라고 적혀 있어? 기계는 다 번호가 있다던데.”
콧물“교관이 긁어서 지웠어. 연습용은 번호 없어도 된대. 번호가 없으면 아무도 안 찾으러 온대.”
칼은 기계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금이 가지 않은 쪽 유리 안쪽에 아주 희미한 불이 남아 있었다. 꺼진 줄 알았던 등잔 심지에 남은 불씨만 한 빛이었고, 칼이 옆으로 한 걸음 옮기자 그 빛이 조금 늦게 따라왔다.
교관“거기, 새로 온 놈.” 마당 끝에서 교관이 불렀다. 키가 크고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굵은 쇠반지를 낀 사내였으며, 목소리가 마당의 쇠판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그건 구경하라고 세워 둔 게 아니다. 너희는 내일부터 그걸로 배운다.”
칼“뭘 배워요?”
교관“기계를 여는 법. 그 전에 기계를 세우는 법.” 교관은 다가와서 칼의 손을 뒤집어 손톱을 보았다. “깨끗하군. 오늘까지다.”
칼“저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교관“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두에서 쓰다가 눈이 나가서 이리 왔다.”
칼“한쪽 눈은 살아 있던데요.”
교관“그건 불빛이지 눈이 아니다. 불빛이 남았다고 보는 건 아니야. 그 둘을 구별하는 것도 내일부터 배운다.”
콧물“너 몇 년짜리야?” 그날 밤 이층 침대의 아래 칸에서 콧물이 물었다.
칼“십 년.”
콧물“나도. 여기는 다 십 년짜리야, 장부 아저씨가 세지 말라고 했지? 나는 그래도 셌는데 삼천육백 밤이 넘더라. 그다음부터는 까먹었어.”
칼“멍텅구리 눈에 불 있던데.”
콧물“없어, 다 꺼졌어. 교관이 그건 꺼진 기계라고 했어.”
칼“있었어. 내가 옆으로 가니까 따라왔어.”
콧물“거짓말.” 콧물은 그렇게 말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느 쪽 눈?”
칼“안 깨진 쪽.”
콧물은 더 묻지 않았다. 칼은 위 칸에 누워 쇠사슬 소리를 기다렸다. 하역기는 담 너머 멀리 있어서 소리가 셋방에서보다 작았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 때만 겨우 들렸다. 그는 어머니가 말한 대로 들릴 때만 셌다. 숫자는 셋방에서보다 훨씬 느리게 올라갔고, 서른을 넘기지 못한 채 그는 잠들었다. 아래 칸에서 콧물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쇠사슬 소리 사이사이를 메웠다.
III · 닫힌 문
처음으로 담을 넘은 것은 들어온 지 마흔하루째 되는 밤이었다. 칼은 날짜를 세지 않으려고 했지만, 손톱 밑이 다시 까매진 날부터 날짜가 저절로 세어졌다. 숙소 뒤편 창고 담은 녹슨 함석을 덧대어 놓아서 발을 디딜 데가 많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 끈으로 묶어 목에 걸고 맨발로 담을 넘었다.
부두까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낮에는 짐수레와 사람 때문에 길이 길었는데, 밤에는 하역기 불빛만 따라가면 되었다. 쇠사슬 소리는 걸을수록 커졌고, 셋방 골목에 들어섰을 때는 셋방 창틀을 흔들던 그 크기가 되어 있었다. 칼은 그 크기를 귀보다 먼저 발바닥으로 알아들었다.
셋방 문은 잠겨 있었고, 칼은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문 앞까지 와서 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등잔 불빛이 그 사람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칼“엄마. 나야.”
어머니“알아.” 문 너머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목소리는 문판 하나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왔고, 조금 쉬어 있었다. “신발은 신었니.”
칼“목에 걸었어. 담 넘을 때 소리 나서.”
어머니“신어라. 바닥이 차다.”
칼은 계단에 앉아 신발을 신었고, 끈을 다 묶을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문판에 이마를 대고 섰다. 문판 너머에서 어머니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그는 숨소리의 높이로 알았다.
칼“열어 줘.”
어머니“돌아가.”
칼“거기 싫어. 애들이 밤마다 울고 밥에서는 쇠 냄새가 나. 열어 줘.”
어머니“돌아가라, 칼. 거기가 너 밥 먹는 데다. 여기서 문 열면 내일부터 너 먹을 데가 없어.”
문고리가 한 번 달그락거렸다. 여는 소리가 아니라 안쪽에서 고리를 한 번 더 거는 소리였고, 칼은 그 소리를 알았다. 바람 부는 밤마다 어머니가 잠들기 전에 문고리를 두 번씩 확인하던 소리였다.
칼은 세 번째로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문 앞 계단에 앉아 등을 문판에 붙였다. 문판은 차가웠지만 등을 대고 있으니 조금씩 덜 차가워졌다. 얼마 뒤 문 안쪽에서 무언가가 문판에 기대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문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앉은 셈이었다.
그 밤 칼은 쇠사슬 소리를 세지 않았다. 대신 문 안쪽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소리는 밤새 한 번도 문에서 멀어지지 않았는데, 잠든 숨은 아니었다. 잠든 사람은 그렇게 오래 같은 자리에 같은 무게로 기대어 있지 않는다. 바닷바람이 골목으로 몰려 들어올 때마다 칼은 무릎을 끌어안았고, 문 안쪽의 숨도 그때마다 한 번씩 멎었다가 이어졌다.
새벽에 쇠사슬 소리가 멎었고, 교대 시간에 맞추어 골목 끝에서 아버지가 걸어왔다. 아버지는 밤새 쇠사슬을 건 사람답게 오른쪽 어깨를 낮게 기울이고 걸었으며, 계단에 앉은 아들을 보고도 걸음의 박자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아들 앞에 서서 한참 내려다보다가 작업 장갑을 벗어 칼의 손에 끼워 주었다. 장갑 안쪽은 아직 따뜻했고 쇠사슬 기름 냄새가 났다.
칼“엄마가 안 열어 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닫힌 문을 한 번 보았을 뿐 두드리지는 않았다. 그는 칼의 장갑 낀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되짚어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등 뒤의 문판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어머니“칼. 손톱.”
칼“알아.” 칼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대답이 문판까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칼은 버티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은 쇠사슬을 감는 손이었고, 한 번 감긴 쇠사슬은 짐이 땅에 닿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두에서 자란 아이라면 다 알았다.
훈련소 정문 창구에서 장부 담당이 하품을 하며 장부를 펼쳤다. 아버지는 칼의 등을 정문 안쪽으로 한 번 밀었고, 그것이 그날 그가 아들에게 한 말의 전부였다. 장부 담당이 보호자 칸에 엄지를 찍으라고 하자 아버지는 인주에 엄지를 눌렀는데, 쇠사슬 기름이 밴 엄지에는 붉은 물이 잘 묻지 않아서 두 번을 눌러야 했다. 장부 담당은 칼의 이름 옆에 무엇인가를 적고 펜으로 밑줄을 두 번 그었다.
칼“뭐라고 적었어요?”
장부 담당“반품.” 장부 담당이 펜을 잉크병에 꽂으며 말했다. “보낸 데서 도로 보내면 반품이지. 이 장부에 그거 말고 적는 말은 없다.”
칼“나 물건 아닌데요.”
장부 담당“장부에 적히면 다 물건이다. 나도 회사 장부에는 물건이야.” 장부 담당은 장부를 덮고 턱을 들어 정문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라. 아침 점호까지 늦으면 그건 또 따로 적어야 한다.”
점심 무렵에는 숙소 아이들이 다 그 낱말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칼이 지나가면 반품이라고 불렀고, 칼이 돌아보지 않자 더 크게 불렀다.
아이“야, 반품, 집에서 안 받아 줬다며? 물건이 맞지 않아서 돌아온 거래.”
콧물“나도 첫해에 나갔었어.” 그날 밤 아래 칸에서 콧물이 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채 말했다. “우리 엄마는 열어 줬어. 국 먹이고, 아침에 업어서 데려다줬어. 나도 장부에는 반품이야. 근데 애들은 나를 콧물이라고만 불러.”
칼“왜?”
콧물“반품보다 콧물이 먼저 붙었으니까.”
칼은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의 장갑을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장갑 손가락 끝에서는 그 뒤로도 며칠 동안 쇠사슬 기름 냄새가 났다. 장갑은 그 뒤로 오래 그 자리에 있었고, 별명은 그보다 더 오래 남았다.
IV · 멍텅구리
두 번째로 나간 것은 열 살 가을이었고, 이번에는 셋방 골목까지 가지 않았다. 그는 부두 끝 계류 기둥에 앉아 하역기가 짐을 내리는 것을 밤새 보았고, 어느 쇠사슬이 아버지의 것인지 끝내 가려내지 못한 채 아침 점호 전에 제 발로 정문을 넘었다. 장부 담당은 이번에는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지만, 아이들은 그것까지 반품이라고 불렀다.
그 겨울 마당의 쇠판에는 아침마다 서리가 앉았다. 맨손으로 쇠를 잡으면 살갗이 들러붙었다가 떨어질 때 따끔했다. 그런 아침에 교관은 아이들을 멍텅구리 앞에 줄 세우고 한 사람에 하나씩 망치를 쥐여 주었다. 망치 자루는 아이들 팔에 비해 길었고, 머리는 아이들 주먹만 했다.
교관“눈부터 깬다.” 교관이 멍텅구리의 얼굴판을 손가락 마디로 두드렸다. “정비하다 보면 멈추지 않는 기체를 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눈이 살아 있으면 손이 떨린다. 너희 손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희 손을 보는 눈 때문에 떨린다. 그러니 눈부터 끄는 법을 손에 익혀라. 유리 테두리 바깥, 이 이음매다. 정확히 치면 한 번에 꺼진다.”
아이“저거 진짜 안 피해요?” 앞줄의 아이가 물었다.
교관“안 피한다.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선 채로 맞는다. 피하는 기계는 정비공이 못 쓴다.”
칼“깬 눈은 누가 다시 붙여요?”
교관“정비공이 붙인다. 깨는 것도 정비공이 하고 붙이는 것도 정비공이 한다. 둘 중 하나만 할 줄 아는 놈은 정비공이 아니다.” 교관은 칼을 한 번 보고 줄 맨 앞의 아이에게 턱짓을 했다.
아이들이 차례로 망치를 휘둘렀다. 대부분은 이음매를 맞히지 못하고 얼굴판의 넓은 데를 때렸다. 망치가 닿을 때마다 마당 전체가 둔하게 울렸고, 멍텅구리의 고개가 맞은 쪽으로 조금 돌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움직임이 우스꽝스러워서 처음에는 몇 아이가 웃었고, 나중에는 다 웃었다. 교관은 웃지 않고 이음매를 맞혔는지만 보았다.
아이“멍텅구리 고개 춤춘다!” 줄 뒤쪽에서 누가 소리쳤고, 웃음이 한 번 더 커졌다.
콧물의 차례가 왔다. 콧물은 망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다가 어깨 높이에서 멈추었다. 팔이 떨려서 망치 머리가 그의 머리 위에서 원을 그렸고, 줄 뒤쪽에서 반품 다음으로 쓸 별명을 찾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교관“내리쳐라. 들고 있으면 더 무겁다.”
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콧물을 보지 않고 멍텅구리를 보고 있었다. 맞을 때마다 맞은 쪽으로 밀리던 고개가 이번에는 맞기 전에 움직였다. 아주 조금, 금 간 유리가 있는 쪽 얼굴이 망치를 든 콧물 쪽으로 돌아갔다. 피하려는 움직임이라면 반대쪽으로 돌아야 맞았다. 그 고개는 망치가 아니라 망치를 든 아이의 떨리는 팔꿈치를 향해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자기 하나뿐이라는 것을 칼은 웃음소리로 알았다. 그다음에 한 일은 생각보다 손이 먼저 했다. 그는 자기 망치를 쥔 팔을 옆으로 크게 돌려 멍텅구리가 아니라 마당 가장자리의 배수 쇠창살을 향해 던졌다. 망치는 쇠판 위를 한 번 튀고 쇠창살 모서리에 부딪혔고,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웃음소리를 한꺼번에 끊었다.
교관“누가 던지라고 했나.” 교관이 줄 사이로 걸어왔다.
칼“쟤가 콧물 쪽을 봤어요.”
교관“기계는 아무 데도 안 본다. 눈이 달린 쪽이 앞일 뿐이다.”
칼“봤어요. 맞기 전에 돌렸어요.”
교관은 규정대로 했다. 연장을 던진 견습생에게는 뺨 한 대와 밤 벌이 정해져 있었다. 교관의 왼손이 칼의 뺨을 쳤고, 가운뎃손가락의 쇠반지가 왼쪽 눈썹 끝을 긁고 지나갔다. 따뜻한 것이 눈꺼풀로 흘러내렸다. 교관은 그것을 보고 손을 거두었는데, 거둔 손을 잠깐 내려다보는 얼굴에 다시 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교관“눈썹은 붙는다. 의무실 가서 소독하고, 해 지면 저 쇠창살 위에 꿇어앉아라. 해 뜰 때까지.” 교관은 쇠창살 앞에 떨어진 망치를 주워 콧물에게 내밀었다. “너는 다시. 이음매다.”
콧물은 그날 이음매를 맞히지 못했다. 그 뒤로도 맞힌 아이는 없었고, 해가 질 무렵 멍텅구리의 얼굴판은 아침보다 훨씬 깊게 우그러져 있었다. 멍텅구리는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칼은 눈썹에 거즈를 붙인 채 남은 오후 내내 그 고개를 지켜보았지만, 맞기 전에 고개가 돌아가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지자 교관이 쇠창살 앞까지 와서 칼이 무릎을 꿇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칼의 거즈와 마당 한가운데의 기둥을 번갈아 보았다.
교관“어느 쪽으로 돌렸다고 했나.”
칼“콧물 쪽이요. 망치 말고 팔꿈치 쪽이요.”
교관“다음부터는 던지지 말고 말로 해라. 말로 하면 나도 본다.” 교관은 그렇게 말하고 멍텅구리 앞으로 가서 한동안 그 얼굴판 앞에 서 있다가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밤은 길었다. 배수 쇠창살은 서리를 먹어 무릎 밑에서 하얗게 빛났고, 바지를 뚫고 올라오는 냉기는 한 시간쯤 지나자 아픔이 아니라 무게가 되었다. 자정이 넘어 숙소 창문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렸다.
콧물“반품.” 콧물이 창틈에 입을 대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너 왜 던졌어?”
칼“쟤가 너 봤어.”
콧물“멍텅구리가 나를 봤다고? 왜?”
칼“몰라. 모르는데 봤으니까 던졌어.”
콧물“내가 그거 맞혔으면 어떡하려고.” 콧물은 한참 말이 없다가 창틈으로 담요 한 장을 밀어 내렸다. 담요는 쇠창살까지 닿지 않고 창 밑 서리 위에 떨어졌고, 칼은 무릎을 떼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집지 않았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칼은 무릎을 옮겨 딛다가 쇠창살 한쪽이 덜컥거린다는 것을 알았다. 망치가 부딪힌 모서리의 볼트 하나에 금이 가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볼트를 한참 만지다가 손을 떼었다. 마당 한가운데에서 멍텅구리의 성한 눈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그 눈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는 너무 어두워서 알 수 없었다.
V · 배수로
열한 살 여름 장마는 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다. 마당의 배수 쇠창살은 사흘째부터 물을 다 삼키지 못하고 거품을 토했고, 숙소 바닥에는 밤마다 물이 발목까지 올라왔다 빠졌다. 칼은 그 아흐레 동안 금 간 볼트를 매일 밤 손가락으로 조금씩 돌렸다. 장마 마지막 밤에 볼트가 빠졌다.
쇠창살 한쪽을 들어 올리자 아래에서 물소리가 올라왔다. 칼은 신발을 목에 걸고 쇠창살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고, 벽에 박힌 사다리가 손에 잡혔다. 그 사다리가 부두 쪽 큰 배수로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 년 동안 아이들의 소문으로 들어 둔 것이었다. 바닥에 닿으면 물을 따라 바다 쪽으로 걷기만 하면 되고, 부두에 닿으면 셋방 골목까지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사다리는 열두 칸이었고, 칼은 칸을 세며 내려갔다. 일곱째 칸에서 물이 발목에 닿았고, 여덟째 칸에서 무릎까지 올라왔다. 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머리와 어깨를 눌렀고, 곰팡이와 바닷물 냄새가 입안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홉째 칸을 디디려는데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왼쪽 무릎이 사다리 쇠 칸 모서리에 정통으로 찍혔다.
소리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소리가 모든 소리를 먹었다. 칼은 바닥의 물속에 주저앉았고, 물은 금세 가슴까지 차올랐다. 일어서려고 왼쪽 다리에 힘을 주자 무릎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고, 다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물은 계속 올라왔는데 손으로 쥔 무릎만 뜨거웠다.
물속 저편에서 불빛 두 개가 다가왔다. 사람의 등불은 흔들리는데 그 불빛은 흔들리지 않았고, 물을 가르며 오는 소리도 사람의 걸음보다 무겁고 일정했다. 칼은 부두에서 그런 걸음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밤에 배수로를 걸으며 막힌 데를 치우는 기계들이었고, 부두 사람들은 그것들을 배수 깡통이라고 불렀다.
기계는 칼 앞에서 멈추더니 물속에 무릎을 꿇었다. 물이 기계의 가슴판까지 올라왔고, 칼은 그것이 일부러 낮아지는 동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계는 한 팔로 칼의 등과 무릎 밑을 받쳐 물 밖으로 들어 올렸다. 쇠로 된 팔은 차가웠다. 사람의 팔이 차가운 것과는 다른 차가움이었고, 아무리 오래 닿아 있어도 칼의 체온이 그쪽으로 옮아가지 않았다.
철인“움직이지 마십시오. 물 밖으로 옮깁니다.”
칼“집에.” 칼은 이가 딱딱 부딪쳐서 말을 한 번에 다 하지 못했다. “부두 셋방에 데려다줘. 골목 끝에서 둘째 집이야.”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걸었다. 칼은 그 말을 들어 준다는 뜻으로 들었다. 기계의 팔에 안겨 있으니 물소리가 멀어졌고, 그는 무릎을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을 풀었다.
칼“너 누구야.”
철인“배수 이 구역 담당입니다.”
칼“이름은 없어?”
철인“번호가 있습니다.”
칼“몇 번인데.”
철인“가슴판에 있습니다. 물 밖에서는 보입니다.”
칼“이쪽이 바다 쪽 맞아? 쇠사슬 소리가 안 들려.”
철인“물 밖으로 가는 중입니다.”
칼“너 팔 차가워.”
철인“온도를 유지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물 밖까지 이백십 보 남았습니다.”
칼“그럼 내가 셀게.” 칼은 쇠사슬 소리 대신 기계의 걸음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걸음은 쇠사슬보다 박자가 빨랐고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다.
배수로는 몇 번 갈라졌고 기계는 갈라질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한쪽을 골랐다. 칼은 그 대답이 자기 질문에 맞는 대답인지 따지기에는 너무 추웠다. 그는 쇠로 된 가슴판에 뺨을 붙이고 걸음을 세면서도 쇠사슬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어느 갈림목에서 위쪽 관이 한꺼번에 물을 쏟았고, 그 소리에 셈이 끊겼다. 백삼십 몇까지 왔는지 떠오르지 않아 칼이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에 기계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철인“백사십일입니다.” 칼은 백사십이부터 다시 셌고, 그 뒤로는 숫자를 놓치지 않았다.
이백십 보째에 기계는 다른 사다리를 올라 쇠 덮개를 밀어 올렸다. 빗줄기가 다시 얼굴을 때렸고, 칼은 눈을 떠서 둘레를 보았다. 쇠사슬 소리는 없었다. 대신 낯익은 함석 담과 그 담에 박힌 정문, 그리고 정문 위에 매달린 등불 하나가 보였다. 등불은 비에 젖어 노랗게 번져 있었고, 기계는 그 등불 아래까지 걸어가 칼을 정문 계단에 내려놓았다.
등불 밑에서 칼은 기계의 가슴판을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판의 앞쪽 절반은 진흙과 녹에 덮여 있었고, 오른쪽 끝에 찍힌 숫자 넷만 빗물에 씻겨 드러나 있었다. 칠, 영, 구, 삼. 칼은 그것을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읽었다.
칼“왜 여기야.”
철인“당신을 받을 수 있는 등록자가 이곳뿐입니다.”
칼“엄마는.”
철인“그 이름은 목록에 없습니다.”
칼“확인한다고 했잖아. 집에 간다고.”
철인“확인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주소입니다.” 기계는 일어서서 정문의 종 줄을 한 번 당겼다. 종소리가 빗소리 위로 울렸다. “인계합니다.”
정문 안쪽 문지기 방에 불이 켜지고 발소리가 났다. 기계는 그 발소리가 문 가까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칼은 일어나 기계를 붙잡으려 했지만 왼쪽 무릎이 다시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계단에 앉은 채 두 손으로 무릎을 쥐었다. 기계는 빗속을 걸어 쇠 덮개 쪽으로 돌아갔으며, 덮개가 닫히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문지기“또 너냐.” 문지기가 우산도 없이 나와 칼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은 왜 그래.”
칼“사다리.”
문지기“깡통이 건져 왔구나. 너희 학교 애들은 꼭 이리로 데려온다.” 문지기는 칼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칼“장부에는 뭐라고 적어요?”
문지기“그건 내일 장부 담당이 정할 일이고 오늘은 의무실이다. 무릎 펴지 말고 내 어깨에 걸쳐라.”
칼은 고개를 들지 않고 정문 등불이 젖은 무릎 위에 만든 노란 동그라미를 보았다. 등불은 밤새 거기 켜져 있었을 것이다. 두드리지 않아도 누군가 나와 보는 문이었다. 그가 두드리고 싶었던 문은 여기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고, 그 문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첫 번째 숫자
VI · 못
의무실에서 보낸 사흘 동안 칼은 그 네 자리를 입속으로 굴렸다. 간호인이 무릎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을 때도, 묽은 보리죽을 떠먹일 때도 그는 숫자를 놓지 않았다. 잠이 들면 숫자가 빠져나갈 것 같아서 밤에는 손가락으로 이불 위에 한 자씩 썼다. 쓰고 나면 이불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썼다.
간호인“뭘 그렇게 중얼거리니.” 붕대를 갈던 간호인이 물었다. 손이 차가운 늙은 여자였고, 소독약 냄새가 손등까지 배어 있었다.
칼“아무것도 아니에요.”
간호인“아무것도 아닌 걸 사흘이나 중얼거리면 그게 제일 큰 거다.” 간호인은 붕대 끝을 매듭짓고 무릎을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깡통이 건졌다며. 정문에 내려놨다고 들었다.”
칼“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요.”
간호인“그래도 제대로 내려놓은 거다. 바다에 내려놨으면 어쩔 뻔했니.” 간호인은 소독약 병을 들고 일어나며 덧붙였다. “이 무릎은 다 붙어도 비 오는 날마다 너한테 말을 걸 거다. 대답은 안 해도 된다.”
칼“무릎이 뭐라고 하는데요?”
간호인“그날 밤 일을 잊지 말라고 하지. 잊고 싶어도 비만 오면 다시 일러 준다.”
사흘째 오후에는 장부 담당이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의무실까지 왔다. 그는 침대 발치에 서서 펜촉에 침을 묻혔고, 칼의 무릎과 장부를 번갈아 보았다.
장부 담당“이번 건 뭐라고 적어야 하냐. 집에서 보낸 것도 아니고 제 발로 온 것도 아니고.”
칼“인계라고 적어요. 깡통이 그렇게 말했어요.”
장부 담당“그런 말은 이 장부에 없다.” 장부 담당은 한참 펜을 들고 있다가 칼의 이름 옆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반품 하나에 자진 복귀 하나, 이번 건 건져짐이다. 이름 옆에 세 줄 붙은 놈은 여기서 네가 처음이야.”
숙소로 돌아온 첫날 밤, 칼은 베개 밑에서 못 하나를 꺼냈다. 담을 처음 넘던 해에 함석 담에서 빠진 것을 주워 둔 못이었고, 아버지의 장갑 손가락 하나에 끼워 두어서 녹이 덜 슬어 있었다. 달빛이 창살 사이로 들어와 이층 침대의 나무 틀을 비스듬히 갈랐다. 그는 위 칸에 누운 채 머리맡 틀의 안쪽 면, 누워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자리를 골랐다.
나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못 끝으로 한 획을 긋는 데 한참이 걸렸고, 획이 깊어질 때마다 나뭇가루가 베개 위로 떨어졌다. 칼은 일곱부터 팠다. 그다음 동그라미를 팠는데, 동그라미는 못으로 파기가 가장 어려워서 모서리가 여러 개 생겼다. 아홉의 꼬리를 내릴 즈음 아래 칸에서 이불이 들썩였다.
콧물“그게 뭔데.” 콧물이 아래 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뭇가루가 콧물의 이마에 떨어져 있었다.
칼“숫자.”
콧물“무슨 숫자.”
칼“외우기 쉬운 숫자.”
콧물“뭐가 쉬워, 넷이나 되는데. 쉬운 건 하나짜리야.” 콧물은 소매로 코를 훔치고 칼의 손끝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셋 넘어가면 못 외워. 교관 방 열쇠 번호도 셋이라서 외운 거야.”
칼“하나짜리는 금방 까먹어. 넷이면 손가락 하나가 남아서 쉬운 거야.” 칼은 마지막 획을 그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숫자의 반쪽만 말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고, 나머지 반쪽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콧물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누웠다.
콧물“반품. 그 깡통 무서웠어?” 한참 뒤에 아래 칸에서 콧물이 다시 물었다.
칼“아니. 차가웠어.”
콧물“차가운 거랑 무서운 거랑 달라?”
칼“달라. 무서운 건 떨어지고 싶은데, 차가운 건 그래도 붙어 있게 돼. 물보다는 덜 차가우니까.”
삼까지 다 파고 나서 칼은 손가락으로 홈을 하나씩 더듬었다. 일곱은 곧았고 동그라미는 울퉁불퉁했으며 아홉은 꼬리가 길었고 삼은 아래쪽 배가 조금 작았다. 눈을 감고 더듬어도 넷이 구별되었다. 이제 잠이 들어도 숫자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손끝으로 확인했다.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와 쇠사슬 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왔다. 칼은 소리가 한 번 들릴 때마다 손가락을 홈 하나로 옮겼다. 칠에서 영으로, 영에서 구로, 구에서 삼으로 옮기고 나면 다시 칠로 돌아갔다. 숫자는 백을 넘어가지 않고 넷 안에서 돌았고, 그는 그 넷을 몇 바퀴 돌기 전에 잠들었다.
가을 점검 날, 교관이 침대 틀마다 손바닥을 훑고 지나가다가 칼의 머리맡에서 멈추었다. 손가락이 홈 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교관“이게 뭐냐.”
칼“외우기 쉬운 숫자요.”
교관“침대 틀은 회사 물건이다.” 교관은 홈을 한 번 더 쓸었고, 칼의 눈썹 끝에 남은 흰 흉에 잠깐 눈을 두었다. “더 파지는 마라. 네 자리면 됐다.”
콧물“혼날 줄 알았지?” 교관이 숙소를 나가자 콧물이 아래 칸에서 속삭였다.
칼“아니. 혼낼 거였으면 처음 손 댔을 때 혼냈을 거야. 손가락이 홈에서 한 번 멈췄잖아. 혼낼 사람은 거기서 안 멈춰.”
콧물“너는 그런 걸 어떻게 봐.”
칼“보이니까 보는 거지.” 칼은 머리맡의 홈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쓸었다. 교관의 손가락이 멈췄던 자리는 동그라미였고, 거기는 그가 가장 서툴게 판 자리였다.
VII · 콧물
그 겨울 첫눈이 온 밤, 새벽 두 시쯤 잠이 얕아졌을 때 칼의 손가락은 눈을 뜨기도 전에 머리맡 틀로 먼저 갔다. 네 자리 홈을 끝까지 더듬고 나서야 그는 아래 칸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았고, 훌쩍이는 소리가 없다는 것이 숨소리가 없다는 것보다 먼저 걸렸다. 콧물의 신발이 없었다. 마당의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장마 뒤 볼트 대신 감아 두었던 철사가 눈 위에 풀어져 있었다.
콧물은 소문을 들은 것이다. 소문은 칼이 어디로 나갔는지까지만 전했지 어디로 돌아왔는지는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칼은 쇠창살로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어 방파제 아래 배수로 출구로 걸었다. 무릎이 눈길에서 두 번 꺾였다.
출구는 쇠살문으로 막혀 있었고, 겨울이라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다. 칼은 출구 옆 돌에 앉아 기다렸다. 물이 바다로 빠지는 소리가 쇠살문 사이에서 일정하게 났고, 칼은 그 소리를 세다가 그만두었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왔다. 무릎 아래가 다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랬으며, 칼을 보자 그 자리에 섰다.
콧물“왜 여기 있어.”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윗동네까지는 걸어가면 금방이야.”
칼“돌아가자. 아침 점호 전이면 자진 복귀로 적힌다.”
콧물“너는 세 번이나 나갔잖아.”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내 반으로 갈라 큰 쪽을 콧물에게 내밀었다. 콧물은 빵을 보다가 받았고, 받자마자 반을 입에 넣었다. 칼은 남은 반쪽을 들고 쇠살문 앞으로 가서 문틀에 앉은 성에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일곱이 생기고 동그라미가 생기고 아홉과 삼이 생겼다.
콧물“그거 네 침대에 있는 거잖아.”
칼“이 안에 사는 깡통 번호야.” 칼이 성에 위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물이 차면 이게 와서 건져 줘. 건져서 정문에 내려놓고, 집에는 안 데려다줘. 우리 집은 이 깡통 목록에 없었어.”
콧물“네 무릎 그때 그렇게 된 거야?”
칼“그래. 오늘은 물이 얕아서 안 왔지만 장마 때 나가면 와. 오면 정문이다. 안 오면 그냥 물이고.”
콧물은 빵을 씹던 입을 멈추고 성에 위의 숫자를 오래 보았다. 그사이 숫자 가장자리가 두 아이의 숨결에 녹아 조금씩 흐려졌다. 콧물이 소매로 코를 훔쳤고, 소매 끝에서 얼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콧물“너희 엄마는 왜 안 열어 줬는데. 우리 엄마는 열어 줬어.”
칼“몰라. 안 열어 줬다는 것만 알아. 문 안쪽에서 밤새 같이 앉아 있었다는 것도 알고.”
콧물“그럼 열어 주고 싶었던 거 아니야?”
칼“그건 엄마한테 안 물어봤어.” 칼은 성에 위의 숫자를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덧그었다. 흐려졌던 일곱이 다시 선명해졌다.
콧물“그럼 너는 왜 이제 안 나가?”
칼“숫자를 가졌으니까.” 칼은 대답하고 나서 그 대답이 콧물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말했다. “담 넘고 싶은 밤에는 손가락이 먼저 틀로 가. 네 자리 다 더듬고 나면 아침이야.”
콧물“숫자 더듬으면 집 생각 안 나?”
칼“나. 근데 손가락이 바쁘면 다리가 안 나가.”
콧물“나도 하나 새겨 줘. 셋짜리로.”
칼“무슨 숫자로.”
콧물“아무거나. 외우기 쉬운 거.”
칼“그건 네가 정해야 돼. 내가 정하면 네 숫자가 아니야.”
콧물“그럼 돌아가면서 생각할게. 오래 걸려도 돼?”
칼“돼. 점호 전까지만.”
돌아오는 길에 콧물은 칼의 왼쪽에서 걸었다. 칼의 무릎이 꺾일 때마다 콧물의 어깨가 거기 있었는데, 칼은 그것이 일부러인지 묻지 않았다. 정문 등불 아래에는 장부 담당 말고 마당 교관이 먼저 나와 서 있었다. 교관은 두 아이의 젖은 바짓단과 칼의 무릎을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교관“둘이 나가서 둘이 왔군. 누가 데려왔나.”
칼“같이 왔어요.”
교관“누가 먼저 돌아가자고 했나.”
칼“제가요. 두 번 했어요.”
교관“세 번째는.”
칼“빵을 줬어요. 저녁에 남긴 거요.”
교관“다음에는 빵 대신 나를 깨워라. 눈길에서 무릎 꺾이는 놈이 사람 데리러 가는 건 규정에 없다.” 교관은 장부 담당에게 고개를 까딱했고, 장부 담당은 두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다.
콧물“반품, 너는 나중에 뭐 할 거야?” 숙소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콧물이 물었다.
칼“정비공. 여기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잖아.”
콧물“나는 하역기 쇠사슬 거는 거 할래. 그건 숫자 안 외워도 된대.”
칼“하나는 외워야 돼. 숨 네 번에 한 번.” 칼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왼쪽 다리를 한 칸 끌어올렸다. “그 사이에 고리를 걸어야 하거든.”
그 주에 칼은 아래 칸 틀에도 숫자 셋을 새겨 주었다. 콧물이 고른 숫자였다. 칼이 못으로 획을 긋는 동안 콧물은 침대 밑에 쪼그려 앉아 나뭇가루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받았고, 다 파고 나자 손가락으로 세 홈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무슨 숫자인지 칼은 묻지 않았고, 콧물도 말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칼은 담을 넘지 않았고, 이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넘지 않았다. 위 칸의 네 자리와 아래 칸의 세 자리는 손가락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매끄러워졌다.
VI · 다시 물속
비는 이틀 뒤 새벽에 그쳤다. 칼은 의무실 간호인이 소독약 병을 들고 나간 사이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목을 댄 왼쪽 다리는 무릎이 굽지 않아서 그는 다리를 끌며 걸었다. 마당의 쇠창살은 빠진 볼트 자리에 철사가 감겨 있었는데, 감은 사람이 매듭을 대충 지어 두어서 손가락 셋으로 풀렸다.
사다리 열두 칸을 내려가는 데 그날 밤보다 세 배는 오래 걸렸다. 굽지 않는 다리를 먼저 내리고 성한 다리로 받쳐 가며 한 칸씩 내려갔고, 아홉째 칸에서는 잠깐 멈추었다. 칸의 모서리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바닥의 물은 장마 때보다 훨씬 얕아 무릎 아래에서 찰랑거렸고, 터널 끝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빛은 바다 쪽 출구였다. 쇠살문 너머로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그 빛 속에서 기계 하나가 허리를 굽히고 일하고 있었다. 장마에 떠내려온 나뭇가지와 깨진 상자와 그물 조각을 쇠살문에서 떼어 내 한쪽에 쌓는 중이었다. 기계는 칼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돌아보지 않았다.
칼은 물속에서 돌을 하나 집어 기계의 등에 던졌다. 돌은 등판에 맞고 물에 떨어졌지만 기계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칼은 하나를 더 던졌고, 그것도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는 세 번째 돌을 쥐었다가 내려놓고 물을 헤쳐 기계 앞으로 갔다.
칼“돌 맞았는데 왜 가만있어.”
철인“작업에 지장 없습니다.”
칼“아프지도 않아?”
철인“그 항목은 측정하지 않습니다.”
칼“너 장마 끝나면 어디 가?”
철인“이 구역에 있습니다. 폐기 전까지 이 구역입니다.”
가슴판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날 밤 진흙에 덮여 있던 앞쪽 절반이 장마 물에 다 씻겨 있었다. 칼은 소매로 남은 물기를 닦아 내고 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숫자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길어서 열 자리가 넘었고, 칠영구삼은 그 끝에 붙은 꼬리였다. 숫자 줄 아래에는 작은 글자가 한 줄 찍혀 있었다. 배수 이 구역, 인계는 등록자에 한함.
칼“앞에 숫자는 다 뭐야?”
철인“제조 번호입니다. 앞자리는 공장, 가운데는 만든 해, 끝 네 자리는 그해의 순번입니다.”
칼“그럼 너는 칠천구십삼 번째야?”
철인“그렇습니다. 그해에 만들어진 기체 가운데 칠천구십삼 번째입니다.”
칼“나 기억해?”
철인“이틀 전 밤, 이 구역 셋째 사다리 아래. 왼쪽 무릎 손상. 훈련소 정문에 인계했습니다.” 기계가 허리를 펴고 칼을 내려다보았다. 눈의 불빛은 아침 빛 속에서 생각보다 어두웠다.
칼“왜 정문이었어? 셋방이 더 가까운데.”
철인“거리는 인계 조건이 아닙니다.”
칼“물에 빠진 애 많이 건졌어?”
철인“이 구역에서 열한 명입니다.”
칼“다 정문에 내려놨어?”
철인“등록자에게 인계했습니다. 부두 감시소 다섯, 시료소 둘, 가정 셋, 훈련소 정문 하나입니다.”
칼“정문 하나는 나지?”
철인“그렇습니다.”
칼은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접어 보았다. 열한 명 가운데 셋은 집으로 갔다. 집에 등록자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정문으로 간 아이는 하나였고, 그 하나가 지금 부목을 대고 물속에 서 있었다.
칼“그럼 우리 엄마 이름 알려 줄게. 목록에 넣어.” 칼은 어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고, 셋방 골목의 위치를 덧붙였다. 골목 끝에서 둘째 집이라고, 창틀이 쇠사슬 소리에 떨리는 집이라고.
철인“등록할 권한이 당신에게 없습니다.”
칼“그럼 누가 있는데.”
철인“등록자입니다.”
칼“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철인“대답입니다. 다른 대답은 목록에 없습니다.” 기계는 그렇게 말하고 물속에 다시 무릎을 꿇었는데, 이번에는 칼을 안으려는 동작이 아니었다. 눈의 불빛이 칼의 부목 댄 다리에 머물렀다. “보폭이 이틀 전 기록과 다릅니다. 왼쪽 무릎 보행 이상이므로 인계 절차를 따릅니다.”
칼“안지 마. 걸어갈 거야.”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칼을 안지 않았다. 대신 칼의 오른쪽에서 걸었다. 칼이 굽지 않는 다리를 끌며 한 걸음을 떼는 동안 기계는 한 걸음을 반으로 나누어 떼었고, 칼이 사다리 아홉째 칸에서 쉴 때는 사다리 아래에서 기다렸다. 칼은 그것을 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계는 인계를 하는 중이었고, 인계할 물건이 느리면 느린 대로 가는 것이 일이었다.
칼“왜 천천히 가.”
철인“인계 대상의 보폭에 맞춥니다.”
칼“나 물건 아니야. 장부 아저씨는 물건이라고 했지만.”
철인“확인합니다.” 기계는 그렇게 대답하고도 보폭을 바꾸지 않았다. 쇠 덮개를 밀어 올리자 정문 등불이 낮인데도 켜져 있었다.
칼“또 올게.” 기계가 몸을 돌리려 할 때 칼이 말했다.
철인“등록자가 아닌 사람의 방문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칼“기록 안 해도 올 거야.”
정문 계단에서 칼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기계가 그를 데려다줄 수 있는 문은 세상에 하나뿐이고, 그 문이 여기라는 것을 칼은 그때 처음으로 원망하지 않고 생각했다. 다시 그 기계를 보려면 여기 있어야 했다. 여기서 사라진 아이는 물에서 건져져도 이 계단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VII · 출구
첫눈이 온 그 밤에 칼을 깨운 것은 마당 쪽에서 난 쇳소리였다. 녹슨 쇠창살이 돌바닥에 끌리는 소리는 짧았고, 칼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몸부터 일으켰다. 새벽 두 시쯤이었고, 아래 칸의 훌쩍이는 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다음에 알았다. 창으로 내다보니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감아 둔 철사가 눈 위에 풀어져 있었다. 소문은 칼이 어디로 들어갔는지까지만 전했지 어디서 나왔는지는 전하지 않았다.
칼은 쇠창살로 따라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출구가 어디인지 알았다.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어 방파제 아래 쇠살문으로 걸었다. 겨울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고, 쇠살문 앞에는 장마 때 기계가 쌓아 둔 나뭇가지 더미가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칼은 그 더미에 앉아 기다렸다. 무릎이 추위에 먼저 반응해서 그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왔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눈 불빛 두 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기계는 콧물이 쇠살문 틈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도 돕지도 않고 지켜보았다. 물이 얕아서 건질 일이 없었고, 건질 일이 없으면 인계할 일도 없었다.
콧물“왜 여기 있어.” 콧물이 칼을 보고 그 자리에 섰는데,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저 깡통도 나를 안 잡잖아.”
칼“물이 얕으니까 안 잡는 거야. 돌아가자.”
콧물“얕으면 뭐.”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냈다. 빵을 왼손에 쥔 채 일어나 쇠살문 앞까지 다리를 끌고 가서 오른 손바닥으로 기계의 가슴판을 짚었다. 기계는 피하지 않았다. 칼은 손바닥을 옆으로 밀어 판 끝의 네 자리가 콧물에게 보이게 했다.
칼“이게 나 건진 깡통이야, 칠영구삼.” 칼이 판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장마 때 물이 차면 얘가 와서 건지는데, 건지고 나면 집에 안 데려가고 정문으로 데려가. 판에 그렇게 적혀 있어, 인계는 등록자에 한함이라고. 네 엄마는 등록자가 아니고, 우리 엄마도 아니었어.”
콧물“그걸 어떻게 알아.”
칼“물어보면 돼.” 칼은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물에 빠지면 어디로 데려가?”
철인“등록자에게 인계합니다.”
칼“얘 등록자는 어디야.”
철인“훈련소 정문입니다.”
칼“들었지? 나는 두 번 데려다줬는데 두 번 다 정문이었어.” 칼은 빵을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내밀었다. “오늘은 물이 얕아서 너 혼자 윗동네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면 너희 엄마가 문을 열어 줄 수도 있고 안 열어 줄 수도 있어. 그건 나도 몰라. 근데 안 열어 주면 그 앞에서 밤새 앉아 있어야 돼. 나는 해 봤어.”
콧물“나도 기억해?” 콧물이 기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 작년에도 저 쇠창살로 나갔었어.”
철인“기록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지 않은 아이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콧물“그래도 우리 엄마는 열어 줘. 전에도 열어 줬어.”
칼“열어 주고 아침에 업어서 데려다줬지. 그럼 오늘 나가도 내일 아침엔 정문이야. 너희 엄마만 밤새 업고 걷는 거고.”
콧물“그래도 국은 먹잖아.”
칼“국 먹고 정문이야. 국 안 먹고 가는 정문이랑 같은 정문이고, 너희 엄마만 국 끓이고 업고 걷는 게 더 있는 거야.”
콧물은 빵을 받았다. 받은 빵을 한참 들고만 있다가 한 입 베어 물었고, 씹는 동안 기계의 가슴판을 보았다. 기계는 두 아이 사이에 선 채 눈 불빛을 한 번도 흔들지 않았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 하역기 쇠사슬 소리가 넘어왔다.
콧물“너 무릎 아프지. 갈 때 내 어깨 잡아.”
칼“안 아파. 차가운 거야.”
콧물“그게 아픈 거야, 반품아.” 콧물은 남은 빵을 입에 몰아넣고 칼의 왼쪽으로 가서 섰다.
칼“얘 기억해 둬.” 담 쪽으로 걸음을 돌리기 전에 칼이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얘가 물에 빠지면.”
철인“물에 빠지면 기록합니다.”
칼“빠지기 전에 기억해 두라고.”
철인“그 항목은 없습니다.” 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없는 항목을 만들어 달라고 할 권한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은 장마가 끝난 아침에 이미 들었다.
돌아가는 길은 담을 넘는 길이었다. 콧물이 먼저 올라가 손을 내밀었고, 칼은 그 손을 잡고 굽지 않는 다리를 함석 위로 끌어올렸다. 담 꼭대기에서 칼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방파제 아래 쇠살문 앞에 눈 불빛 두 개가 아직 그대로 있다가, 칼이 담을 다 넘을 즈음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문지기“또 너냐.” 담에서 마당으로 내려선 두 아이 앞에 문지기가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이번엔 깡통도 없이 둘이냐.”
칼“깡통은 출구에 있어요. 물이 얕아서 안 따라왔어요.”
문지기“그게 따라오는지 안 오는지를 네가 어떻게 아냐.” 문지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부 담당의 창구를 두드려 깨웠다.
아침 점호 전에 장부 담당이 두 이름 옆에 자진 복귀라고 적었다. 그 뒤로 칼은 담을 넘지 않았다. 다만 장마가 올 때마다 마당의 쇠창살 위에 서서 물소리를 들었고, 물소리 속에서 무거운 걸음이 지나가는지 들으려 했다. 걸음은 몇 해 동안 몇 번 지나갔다. 칼은 그 걸음이 같은 기계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걸음이 지나갈 때마다 쇠창살 위에서 숫자 넷을 한 번씩 입술로 읽었다.
VI · 목록
기름 학교에는 교관이 둘 있었다. 하나는 마당에서 망치를 가르치는 교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업장 안쪽 창가에서 고장 난 기계를 열어 보이는 늙은 정비 교관이었다. 아이들은 마당 교관을 무서워했고 작업장 교관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늙은 교관은 말이 느리고 귀가 어두워서, 아이들이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릎에 부목을 댄 지 나흘째 아침, 칼은 다리를 끌고 작업장으로 갔다. 늙은 교관은 창가 작업대에서 기계의 팔 하나를 분해하고 있었다. 관절 속의 톱니를 하나씩 꺼내 기름 접시에 담그는 손은 느렸지만 한 번도 같은 톱니를 두 번 집지 않았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기름 접시 위에서 무지갯빛으로 갈라졌다.
칼“등록자가 뭐예요?”
늙은 교관은 대답하지 않고 톱니 하나를 접시에 마저 담갔다. 칼은 그가 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한 걸음 다가가 다시 물었고, 교관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정비 교관“두 번 묻지 않아도 들었다.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늙은 교관은 기름 묻은 손을 행주에 닦았다. “누가 그 말을 하더냐.”
칼“배수 깡통이요. 나를 받을 수 있는 등록자가 여기뿐이래요. 그래서 엄마한테 안 데려다주고 정문에 내려놨어요.”
정비 교관“그랬겠지.” 늙은 교관은 작업대 아래에서 녹슨 가슴판 하나를 꺼내 칼 앞에 놓았다. 폐기된 기체에서 떼어 낸 판이었다. 판의 아래쪽에 이름 몇 줄이 쇠에 새겨져 있었고, 그 밑으로 빈 줄이 여럿 남아 있었다. “이게 목록이다. 여기 이름이 있는 사람이 이 기계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 기계가 무엇이든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이다. 길 잃은 아이도 넘긴다. 이름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안 넘긴다.”
칼“여기 빈 줄에 내 이름 들어가요?” 칼이 빈 줄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비 교관“이 판은 폐기된 거다. 네 이름은 네가 맡을 기계 판에 들어간다. 그 기계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르지.”
칼“엄마 이름은 어떻게 넣어요?”
정비 교관“못 넣는다. 네 어머니는 기계를 맡은 사람이 아니니까.” 늙은 교관은 빈 줄 하나를 손톱으로 긁었다. “정비공이 되면 맡은 기체 목록에 이름이 올라간다. 고치는 사람은 명령할 수 있지. 열일곱에 견습 등록을 하고, 그때 정지 코드를 하나 고른다. 기계를 세울 때 쓰는 네 자리다.”
칼“아빠는요? 아빠는 하역기 쇠사슬 걸어요.”
정비 교관“하역기는 사람이 쇠사슬을 거는 기계다. 쇠사슬 거는 사람은 기계를 쓰는 사람이지 맡은 사람이 아니야. 목록에는 없다.”
칼“명령하면 깡통이 뭐든 해요?”
정비 교관“규칙 안에서는. 사람을 해치라는 말은 안 듣고, 목록에 없는 사람 말도 안 듣는다.”
칼“그럼 목록에 있는 사람이 집에 데려다주라고 하면요?”
정비 교관“그 집에 받을 사람이 있으면.”
칼“한번 올라간 이름은 안 지워져요?”
정비 교관“지워진다. 그만두거나 죽거나, 기계가 폐기되거나, 위에서 지우라고 하면.”
칼“위가 어딘데요.”
정비 교관“너는 아직 몰라도 되는 데다. 거기서 지우라는 말이 내려오는 건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하니까.”
칼“코드는 아무 숫자나요?”
정비 교관“아무 숫자나. 잊지 않을 숫자로.”
칼“그럼 그거 할게요.”
정비 교관“왜 하려는 거냐.”
칼“다음에 물에 빠지면 정문 말고 다른 데 내려 달라고 하려고요.”
정비 교관“어디.”
칼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셋방 문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그 밖에 그가 아는 문은 정문 하나뿐이었다.
칼“아직 없어요. 생기면 그때 말할게요.”
늙은 교관은 칼을 한참 보았다. 그다음 작업대 서랍에서 손때 묻은 수첩을 꺼내 한 장을 넘기고 무엇인가를 적었다. 칼은 발돋움을 해서 보려고 했지만 교관의 글씨는 기름 얼룩처럼 뭉개져 있었다.
정비 교관“열일곱까지 여섯 해다. 그 사이에 한 번만 더 담을 넘으면 이 쪽은 찢는다.” 교관은 수첩을 덮었다. “명령하는 법은 열일곱에 가르쳐 주마. 그때까지 너는 명령은 못 하고 물어볼 수만 있다. 묻는 것도 일이니까 제대로 해라. 오늘처럼 물으면 된다.”
정비 교관“기왕 왔으니 이거나 해라.” 교관이 톱니 한 줌을 칼 앞으로 밀었다. “하나씩 접시에 담그고, 담근 건 왼쪽에 놓아라. 같은 걸 두 번 집으면 처음부터 다시다.”
칼은 의자에 왼쪽 다리를 뻗고 앉아 톱니를 하나씩 담갔다. 기름은 손톱 밑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어머니가 밤마다 문질러 빼던 그 까만 것이 이번에는 칼이 고른 일로 묻었고, 정오의 종이 울릴 때까지 그는 같은 톱니를 한 번도 두 번 집지 않았다.
칼은 작업장을 나오면서 기름 접시 위의 무지갯빛을 한 번 더 보았다. 그는 마당 교관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담을 넘어서 얻은 것은 반품이라는 낱말과 끊긴 눈썹이었고, 물에 빠져서 얻은 것은 무릎이었다. 오늘 그는 한 번 물었고, 빈 줄 하나와 네 자리를 얻었다.
VII · 빈 줄
그 겨울 첫눈이 온 밤, 새벽 두 시쯤 아래 칸이 빈 것을 알았을 때 칼의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콧물이 아니라 늙은 교관의 수첩이었다. 한 번만 더 담을 넘으면 찢는다던 그 한 쪽이었다. 칼은 그 생각을 밀어 두고 아래 칸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불은 접힌 채 식어 있었다. 마당의 쇠창살 하나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감아 두었던 철사가 풀려 눈 위에 늘어져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칼은 쇠창살 앞에 잠깐 서서 늙은 교관의 숙소 창문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칼은 저녁에 받아 둔 빵 한 덩이를 외투 안에 넣고 담을 넘었다. 넘으면서 그는 이것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데리러 가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두 번 말했다.
방파제 아래 쇠살문 앞에서 그는 기다렸다. 겨울 물은 무릎 아래로 흘렀고, 바닷바람이 쇠살문 사이로 휘파람 소리를 냈다. 한 시간쯤 지나 쇠살문 안쪽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콧물이 물을 헤치고 나와 칼을 보고 섰는데, 무릎 아래가 다 젖어 있었고 입술은 파랬다.
콧물“왜 여기 있어.”
칼“돌아가자.”
콧물“싫어. 집에 갈 거야.”
칼“돌아가자. 지금 가면 점호 전이야.”
콧물“너는 왜 안 가는데? 너도 집에 가고 싶잖아.”
칼은 외투 안에서 빵을 꺼내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내밀었다. 콧물은 받지 않으려다가 빵에서 김이 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받았다. 빵은 차가웠지만 콧물의 손보다는 따뜻했다.
칼“기계한테는 목록이 있어.” 칼은 쇠살문 옆 돌에 앉으며 말했다. “목록에 이름 있는 사람만 기계한테 일을 시킬 수 있어. 아이를 넘겨받을 수도 있고. 우리 엄마는 목록에 없어서 배수 깡통이 나를 엄마한테 안 데려다줬어.”
콧물“그래서 뭐.”
칼“정비공이 되면 그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열일곱에. 그러면 기계가 우리 말을 들어.” 칼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깐 멈추었다. 그다음 말은 그도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등록자가 되는 거야. 그다음에 누가 물에 빠지면 그 애는 정문 말고 우리한테 넘겨질 거야.”
콧물“그거 진짜야?”
칼“앞에 건 작업장 교관이 그랬으니까 진짜야. 뒤에 건 모르겠어, 나도 아직 안 해 봤으니까.”
콧물“목록에 이름 올라가면 엄마한테 갈 수 있어?”
칼“엄마가 목록에 있어야 돼. 근데 엄마들은 기계를 안 맡는다고 작업장 교관이 그랬어.”
콧물“그럼 소용없잖아.”
칼“우리한테는 소용없지. 우리 다음에 빠지는 애한테는 소용 있을 거야.” 칼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 말이 자기 귀에도 낯설게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남이 할 일을 생각해 본 적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
콧물은 빵을 씹으면서 한참 생각했다. 생각하는 동안 그는 코를 두 번 훔쳤고, 세 번째로 훔치려다 손을 내렸다.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 하역기 쇠사슬 소리가 넘어왔다. 칼은 그 소리를 세지 않고 콧물의 대답을 기다렸다.
콧물“나는 셋 넘어가면 못 외워. 정지 코드 네 자리는 못 외울 거야.”
칼“그럼 넌 셋만 외워. 하나는 내가 갖고 있을게.”
콧물“그런 게 돼?”
칼“모르겠어. 내일 물어볼게.”
콧물“모르면서 하나는 갖고 있겠다고 했어?”
칼“모르니까 물어본다고 한 거야. 안 되면 안 된다고 말해 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돌아가는 길에 콧물은 칼의 왼쪽에서 걸었고, 칼의 무릎이 꺾일 때마다 어깨를 내밀었다. 방파제를 다 지났을 즈음 콧물이 걸음을 늦추었다.
콧물“반품, 셋은 뭐로 할까.”
칼“네가 정해. 내가 정하면 네 숫자가 아니야.”
콧물“그럼 우리 집 번지로 할래. 윗동네 골목 첫 집, 그거 셋이야.”
칼“그거면 안 까먹겠다.” 칼은 그 숫자를 한 번 따라 말해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번지까지는 오늘 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고, 둘은 그 반대쪽으로 걷고 있었다.
정문은 등불이 켜진 채 반쯤 열려 있었다. 등불 아래에서 장부 담당이 하품을 하며 장부를 펼쳤다.
장부 담당“이번엔 뭐라고 적어 주랴, 반품.”
칼“자진 복귀 둘이요. 둘 다 제 발로 왔어요.”
장부 담당“이제는 장부에 적을 말까지 골라 오는구나.” 장부 담당은 혀를 차면서도 칼이 고른 말을 두 이름 옆에 그대로 적었다.
다음 날 아침 칼은 작업장 창가로 가서 늙은 교관에게 지난밤 일을 그대로 말하고, 네 자리를 둘이 나누어 외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교관은 기름 접시에서 톱니를 건지던 손을 멈추었다.
정비 교관“안 된다. 코드는 한 사람이 다 갖는다. 둘이 나눠 가진 코드는 급할 때 반쪽만 온다.” 교관은 수첩을 꺼내 그 쪽을 펼쳐 보았다.
칼“찢으실 거예요?”
정비 교관“찢는다고 했지. 담을 넘으면.” 교관은 펜을 들고 한참 수첩을 내려다보다가 찢지 않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넘은 건 맞는데 혼자 돌아오지는 않았군. 그건 따로 적어 둔다.”
칼“뭐라고 적었어요?”
정비 교관“그건 열일곱에 물어라. 그때도 궁금하면.”
칼은 그 뒤로 담을 넘지 않았다. 넘을 일이 생기면 먼저 작업장 창가로 가서 물었고, 대답이 늦게 오는 날에도 물은 것을 무르지 않았다. 칼은 그날 점심에 콧물에게 안 된다는 대답을 그대로 전했고, 콧물은 그해 겨울에 숫자 셋을 외웠다. 무슨 숫자인지는 칼만 알았다.
이 선택은 다음 장의 장면에 이어집니다.